감독 토마스 얀 / 출연 틸 슈바이거, 얀 요제프 리페르스 / 제작연도 1997년
때는 2000년, 대학 입시에 실패한 나는 방황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공부는 하기 싫었으며, 미래는 막연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던 내가 택할 수 있는 건 방구석에 틀어박혀 하루에 서너편, 많게는 대여섯편씩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나의 인생 영화를 만나게 됐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다. 잠이 오지 않던 새벽, 우연히 비디오데크에 넣은 이 영화는 내게 완벽한 몰입의 경험을 선사했다. 죽음을 앞둔 남자로 분한 틸 슈바이거의 연기도 굉장했고, 시한부 삶이라는 뻔한 소재로 이토록 재미있는 영화를 연출한 토마스 얀 감독의 솜씨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와닿았던 장면은 엔딩 신이다. 그저 바다를 보고 싶었던 두명의 불치병 환자, 마틴(틸 슈바이거)과 루디(얀 요제프 리페르스)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해변에 도착해 함께 테킬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이윽고 마틴이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은 루디는 묵묵히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다. 영화가 끝난 새벽 6시, 불현듯 바다를 보고 와야겠다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아올랐고 그길로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정동진행 티켓을 편도로 끊었다. 돌아올 차비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정동진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정동진 바닷가에 앉아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고 담배를 피우며 옆으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몇번,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가톨릭관동대를 다니는 학생이라며 혹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그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며, 나에게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마침 밥 먹을 돈도 차비도 없던 나는 흔쾌히 그와 함께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던 우리는 여러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나에게 독립영화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독립영화란 말 자체가 생소했던 나는 그에게 독립영화가 뭔지 물었다. 그는 나에게 독립영화에 대해 설명하며 이곳에서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리고 있다고, 함께 영화제에 가자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정동진에서 큰 스크린으로 ‘독립영화’를 보았다. 마치 <시네마 천국>(1988)의 한 장면처럼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그리고 언젠가 이곳에서 내가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처음으로 꾸게 되었던 것 같다.
삼수도 실패하자 나는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시나리오 작법을 독학했다. 제대한 뒤 단편영화로 시작해 2008년 영화 <우린 액션배우다>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고, 감독으로 정동진독립영화제에 가기까지는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감독이 된 지금도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맺어준 영화와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정동진에서 내게 여비 3만원을 쥐여주며 대학에 꼭 합격하라던 가톨릭 관동대 학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 정병길 영화감독. <악녀>(2017), <내가 살인범이다>(2012), <우린 액션배우다>(2008)를 연출했으며 미국 드라마 <악녀>, 할리우드영화 <애프터 번>을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