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일간지 <미러>는 파졸리니의 영화 <마태복음>이 가지는 특별한 힘을 이렇게 설명했다.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파졸리니의 예수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서있다. 그 차이는 매우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
그 문장은 살아 있었을 때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미움 받았던 파졸리니가 어떻게 죽은 뒤에도 수많은 영화에 화상처럼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 설명해주는 한 예일 것이다. 그는 농민의 딸로 태어난 자신의 어머니를 강인하면서도 가엾은 마리아로 기용했고, 이탈리아 농촌의 가난한 풍경 속에서 카메라를 돌렸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삶이 영화보다 지독하다는 사실을 한번도 잊지 않았다.
파졸리니는 1922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던 아버지보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어렵게 교사가 된 어머니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가 뿌리를 두고있는 농촌 문화를 경애하게 됐다. 세살 때 이미 소년들의 다리에서 관능을 발견한 파졸리니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됐으나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 젊은 파졸리니가 가장 먼저 택한 직업은 교사였다. 동시에 그는 열성적인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시와 산문을 써냈지만, 10대 소년과의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당에서 축출됐다. 그 이면에는 파졸리니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하지 않고 부르주아 취향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로마로 근거지를 옮긴 파졸리니는 시나리오를 쓰다 곧 연출을 시작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사실적인 그의 데뷔작 <걸인>은 로마 길거리를 배회하는 무능한 인물의 발걸음을 따르는 영화였다. 태어나서 단 하루도 일해본 적이 없는 기둥서방과 밤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들. 파졸리니는 이탈리아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고, 자신이 관찰한 결과에 성실했으며, 오만하거나 비정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을 말하는 지식인보다는, 반역자일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와 끈질기게 가난을 견디는 빈민들을 더 믿었다. 레지스탕스였던 파졸리니의 동생은 독일군의 총탄이 아니라 파르티잔 내부 분쟁 때문에 죽었으므로, 파졸리니는 정치가 무엇인지 일찌감치 깨달았을 것이다.
이런 파졸리니의 불경과 신념이 녹아 있는 <테오레마>는 <살로, 소돔의 120일>과 함께 가장 악명 높은 영화 중 한 편이다. 낯선 청년이 부르주아 가정의 구성원들을 하나씩 성(性)적으로 정복하는 <테오레마>는 기교 없고 간결한 파졸리니의 카메라가 얼마나 충격적일 수 있는지 입증했다. 파졸리니에게 ‘가톨릭-마르크시스트’라는 기묘한 호칭을 선물한 <마태복음>처럼, <테오레마>는 하나의 이념으로 재단할 수 없어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영화였다.
이후 파졸리니는 느닷없이 중세의 음담과 이국적인 풍경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생의 3부작’인 <데카메론> <켄터베리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는 시대극의 스펙터클에 현혹되지 않고 섹슈얼리티의 힘에 주목하는 영화였고, <메데아>는 신화 속에 마녀로 남은 메데아를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1975년 작 <살로, 소돔의 120일>은 그의 영화 중 정점이었고 마지막이었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이미 참을 수 없도록 불경한 사드의 원작을 사람들 눈앞에 들이댄 이 영화는 충격과 경악을 몰고 왔다. 그해, 파졸리니는 해변가 쓰레기장에서 무참하게 구타 당한 뒤 자동차에 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한 청년이 범행을 자백했으나, 사람들은 그 뒤에 더 큰 권력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손가락이 모두 꺾이거나 잘리고 얼굴은 부풀어 오른 채 버려진 파졸리니. 그의 심장은 53년 동안 멈출 수 없었던 전투를 떠올리듯 파열돼 있었다.
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