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연기한 인물 중 가장 큰 우월감을 지닌 사람이다.” 배우 조우진의 설명대로 <국가부도의 날> 속 재정국 차관은 엘리트 권력층의 한 표상을 보여준다. 국가적 위기 상황 앞에서도, 사사건건 대립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앞에서도 그는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기득권 세력이 더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야심을 불태운다. 직전작 <창궐>에서 정의감과 의협심으로 빛나는 조선시대 충신을 연기했던 그가 곧바로 방향과 보폭을 바꿔,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믿음의 체계를 새롭게 비틀어버렸다. 매 순간 묵직한 고민 끝에 답변을 도출해내는, 깨끗한 달변의 소유자인 조우진을 만나 그가 창조한 새로운 안타고니스트의 미덕을 물었다.
-영화는 7일 정도의 현재 시점만을 다룬다. 그래서 재정국 차관이라는 권력 중심부에 오르기까지 인물의 전사를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다.
=하버드 MBA 출신의 엘리트인데 국가적으로 잘못 사용되어지는 인재라 볼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선과 악을 나눠서 연구하진 않았다. 그만의 신념이 존재한다. 관객에게는 그것이 그릇된 신념으로 비쳐질 테지만 나는 한국 경제구조가 다소 기형적으로 발전해온 탓에 탄생된 인물로 받아들여지기 바랐다. 잘못된 뿌리에서 잘못 자라버린 인물. 본인 입장에선 철저하게 정당하고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기득권 사회에 편승해가면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그런 인물을 상상했다.
-이를테면 <내부자들>(2015)의 조 상무처럼 완전히 극악무도한 인물은 아니다. 여기에 조우진 배우가 캐릭터의 다층적 면모를 더했을 거라는 기대도 생긴다.
=특히 힘 조절에 신경을 썼다. 톤이나 화술, 필요할 때마다 썼던 애드리브에 있어서도. 모든 말과 대사를 찍어 누르듯이 한다고 해서 그게 꼭 위압적으로 느껴지리란 법은 없지 않나. 카리스마는 오히려 여유로움에서 온다. 딱 한 장면, 예외가 있었다. 부하 직원과 같이 용변을 보고 손을 씻는 화장실 장면이다. 차관의 속내를 은연중에 보여주는 부분인데, 유일하게 힘 조절을 신경쓰지 않고 툭 튀어나오는 대로 표현했다.
-애드리브가 편하게 허용되었던 분위기인가 보다.
=감독님이 ‘우리 대본은 가이드입니다’라고 표현하셨을 정도다. 물론 많이는 아니고, 촌철살인이 필요할 때 한두 마디 정도만 미리 참고자료를 보면서 준비해두는 식이다. 나는 경제용어나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특히 신문을 많이 봤다.
-IMF 외환위기 당시는 실제로 스무살 무렵이었다고.
=나를 비롯해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빈 소주병이 넘치고, 한숨 섞인 담배 연기가 자욱한 것이 내가 기억하는 당시 풍경이다. 엄마의 뒷모습, 점점 늘어나는 교회 불빛도 기억난다. 그래서 <국가부도의 날> 속 인물들이, 심지어 차관 역할을 포함해 내게는 모두 처연하게 느껴진다. 살면서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힘듦을 겪는 시대랄까. 도대체 돈이라는 게 뭔지 나도 좀 알아보자는 심정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많이 해봤다. 나중에 나이 들고 보니,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그때의 경험들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더라.
-가장 오래한 아르바이트는.
=레코드점 아르바이트다. 감정적으로 격랑의 시기를 겪었는데, 그때 큰 영감을 안겨준 음악가가 류이치 사카모토다. (웃음) <Rain>과 <Merry Christmas Mr.Lawrence>가 담긴 명반을 들으면서 하루를 버텼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기도 했는데.
=사실 개막식 다음날 류이치 사카모토와 점심을 함께했다. <남한산성> 덕분이다. 감독님과 대표님이 내가 워낙 류이치 사카모토 팬이라는 걸 알고 계셔서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밥은 코로 먹고 음료수는 귀로 마셨지. 성공한 덕후다.
-영화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김혜수 배우는 아역배우로 시작해 오랜 기간 자리매김한 배우이기에, 스타를 만난다는 생경한 감각도 있었을 것 같다.
=그 또한 ‘성덕’의 길이었지. (한참 고민하다) 파도가 넘치는 바닷가에 뚝방을 만들어주신 선배는 ‘자, 우진아 여기 들어와서 헤엄쳐. 마음껏 헤엄쳐!’라고 해주셨다. 그분은 세트에 걸어들어오는 순간부터 필요한 감정과 분위기를 적확하게 잡아주신다. 늘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아우라를 영접하는 현장이었다.
-<내부자들> 이후 <더 킹>(2016) <남한산성>(2017) <강철비>(2017) <1987>(2017) 등 최근 2~3년간 쉬지 않고 전성기를 경신 중이다.
=처음 각오가 변치 않는 것만이 목표다. 이제는 작품을 조금 가리기도 하고 수를 줄여야 한다는 말도 듣는데, 그런다고 해서 내게 아주 큰 변화나 새로운 파도가 다가오리라는 섣부른 기대는 없다.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늘, 하던 대로. 뭐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