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지 말고 행동하라.” 스파이크 리 감독의 수상소감은 올해 칸영화제의 기류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넷플릭스와의 전면전으로 문을 연 제71회 칸영화제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고 수상 결과를 통해 방향 설정을 마쳤다. 프랑스 극장협회의 반발로 시작된 스트리밍 서비스와의 갈등은 칸영화제에 영화의 정의와 범주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칸이 우선 설정한 방향은 기본과 뿌리, 근원을 단단히 하자는 쪽이었다. 결과적으로 경쟁부문에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의 영화들이 전면 배제됐고 이로 인해 이름을 알 만한 감독들의 걸음이 상대적으로 뜸해졌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가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영화인들의 발길이 그쪽으로 몰리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칸은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영화제 초창기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취했다. <요메드딘>의 A. B. 샤키 감독 등 경쟁부문에 한번도 오지 못했던 젊은 감독들의 신작을 과감히 발탁했고, 지역 배분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기존 감독들의 라인업은 주로 칸이 사랑하는 아시아 감독들의 약진으로 메워졌다. 지아장커,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창동 등이 그 자리를 메웠고 북미의 스파이크 리가 선명한 정치색을 드러낸 영화를 통해 상징성을 부각했다. 누리 빌게 제일란, 아스가르 파르하디, 자파르 파나히 등 익숙한 이름들도 다양성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신작 <이미지의 책>을 경쟁부문에 올렸다는 것이 상징적이다. 점차 극장이란 공간을 벗어나고 있는 영화의 흐름에 대한 반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나 실험과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칸의 또 한번의 도전이자 침묵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폐막식 여우주연상 시상자로 참석한 배우 아시아 아르젠토(오른쪽).
정치적 메시지와 안전한 선택 사이
하지만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수상은 다소 안전한 선택으로 이뤄졌다. 매체와 평단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무관에 그쳤고, 열광적인 관객 반응으로 조심스레 황금종려가 점쳐졌던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은 심사위원상에 만족해야 했다. 경쟁부문의 외면을 받은 <버닝>은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과 벌컨상을 수상했는데, 한국영화 중 처음으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름 의미심장하다. 올해 칸이 영화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제성, 정치적 메시지를 선택했다는 평가의 중심에 <버닝>이 있기 때문이다. 장 뤽 고다르의 <이미지의 책>에 특별황금종려상을 안기며 오마주의 영역으로 미뤄버린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예견된 선택이긴 했지만 안전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일견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프로그래머들의 개척과 쇄신의 결과로 경쟁부문에 발탁된 신예감독들이 대체로 외면받고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감독들이 수상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린 것도 혁신보다는 안전을 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버닝>과 <가버나움>은 올해 칸영화제가 화두로 내세운 여성이란 키워드의 양극단에 서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버닝>은 높은 영화적 완성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여성에 접근하는 시각과 방식, 특히 과도하고 전시적인 작가주의에 종속된 여성성의 소비라는 점에서 다소 박한 평을 받았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심사위원단이 이 영화에 선뜻 손을 들어주긴 어려웠을 것이다. 반대로 <가버나움>은 여성감독이라는 점에서 중반부터 주목을 끌었다.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1993)에 이어 25년 만의 여성감독의 황금종려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베이루트 변두리 지역의 버려진 아이를 다룬다는 주제적인 면에서도 정치적 메시지를 충분히 담고 있었기에 조심스레 황금종려상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심사위원단은 영화 내적인 완성도가 아닌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했다는 부담을 피해가고 싶었던 듯하다.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만비키 가족>은 완벽한 탈출구였다.
물론 <만비키 가족>이 황금종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영화는 고레에다의 15년이 농축된 가족에 대한 연대기이며 섬세하고 정밀한 장면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실질적인 계승자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다만 한편으로 고레에다의 잔혹함은 매우 정돈되고 다듬어진 형태이기에 안전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영화지만 새로운 충격을 안기거나 혁신적인 매혹을 느끼기엔 다소 부족하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만비키 가족>은 1997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 이후 21년 만에 일본영화에 황금종려의 영예를 안겼다. 한동안 활력이 줄어들어 보였던 아시아영화가 여전히 영화미학의 에너지로 들끓고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한편 심사위원단의 어정쩡한 태도는 여우주연상에서도 드러난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의 <아이카>는 러시아에서 살아남으려는 카자흐스탄 여성의 험난한 삶을 그린다. 이 영화는 정치적 메시지와 핍박받는 여성이라는 상징으로서 완벽하다. 하지만 비전형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바랐다면 지아장커 감독의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에 그 자리가 돌아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심사위원단이 <아이카>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 선명성 때문일 것이다.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스파이크 리 감독의 <블랙클랜스맨>도 마찬가지다. 올해 칸은 심사위원대상, 여우주연상 등 몇몇 부문에서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선택하고 황금종려 등에서는 안전한 영화적 완성도를 선택하는 분열적인(혹은 정치적으로 타협적인) 행보를 보였다. “아름다운 혁신 정신으로 출발했지만 모든 곳의 모두를 위한 영화라는 안락한 담요로 감싸버렸다”는 <리베라시옹>의 지적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안전한 선택은 다른 측면에서 균형감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치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순간에도 프로그래머들의 미학적 나침반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예컨대 에바 허슨 감독의 <걸스 오브 더 선>은 레드카펫에서 82명의 여성 영화인 행진을 진행할 만큼 상징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공식 데일리의 낮은 평점이 말해주듯 노골적이고 미화된 드라마라는 지적을 피해가기 어려웠고 일부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수상에서 비켜갔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의 <언더 더 실버 레이크>나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의 <더 와일드 페어 트리>의 경우 수상권에 언급되는 영화도 아니었고 평단의 반응도 대체로 밋밋했지만 다양한 주제와 개성을 포용한다는 측면에서 영화제의 라인업을 채워주는 작품이었다. 이런 삐죽한 부분을 수용할수록 영화제의 혈색은 밝아지는 법이다. 전반적으로 “꽤 훌륭한 수준의 경쟁부문과 풍요로웠던 패러럴 섹션(감독주간, 비평가주간, ACID-프랑스독립영화배급협회 등)이 어우러진”(프랑스 문화전문지 <레쟁록>) 준수한 한해였다.
여성이 막을 올리고 여성이 피날레를 장식하다
제71회 칸영화제는 (스트리밍 업체와의 의도치 않은 충돌로 강요받은 측면이 있지만) 과감한 도전으로 문을 열었고 아쉽지만 안정적인 선택으로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올해 영화제가 보여준 상징성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될 것 같다. 무엇보다 올해는 여성으로 시작해 여성으로 마무리된 한해였다. 심사위원장 케이트 블란쳇이 전반부 여성의 목소리를 대표했고 중반부 82명의 여성 영화인의 행진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면, 폐막식의 화제가 된 것은 여우주연상 시상자로 나온 이탈리아 배우 아시아 아르젠토의 연설이었다. 아시아 아르젠토는 미투(#MeToo) 운동을 촉발시킨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1997년 칸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말 그대로 장내를 마비시켰다. “오늘 밤 이 자리에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와 있다. 당신들이 더이상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발언은 올해의 칸이 전세계 영화인을 향해 외치는 선언과도 같았다.
정치라는 말에 이런저런 프레임들이 덧씌워져 있지만 사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정치적이다. 행동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점에서 어쩌면 정치적이어야 한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칸은 뿌리로 돌아가 근원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미학적으로는 과감한 실험과 새로운 시선의 발굴을 도모했고, 주제적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차별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가깝게는 영화계 내의 성차별과 부당한 시선에 당당히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이를 개선해나가는데 힘을 보탰고, 멀게는 세상을 위해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일견 미학과 정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두 가지가 언제나 대립하고 충돌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올해 칸은 둘 사이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70년 세월을 디딤돌 삼아 새롭게 시작하는 1년으로 나쁘지 않은 첫걸음이다.
제71회 칸영화제 수상작
황금종려상_ <만비키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심사위원대상_ <블랙클랜스맨> 스파이크 리 감독 감독상_ <콜드 워>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 심사위원상_ <가버나움> 나딘 라바키 감독 각본상_ <라자로 펠리체> 알리스 로르바러 감독 / <스리 페이스> 자파르 파나히 감독 여우주연상_ <아이카> 사말 예슬라모바 남우주연상_ <도그맨> 마르첼로 폰테 특별황금종려상_ <이미지의 책> 장 뤽 고다르 감독 벌컨상_ <버닝> 신점희 미술감독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FIPRESCI)_ <버닝> 이창동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