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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 편집장] <여고괴담>을 추억하며
주성철 2018-04-20

‘여름 공포영화’라고들 얘기하지만, 한국 공포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인 <여고괴담>(1998)은 5월 30일에 개봉했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공포영화 장르는 거의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학원물 역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이후 열일곱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열아홉 절망 끝에 마지막 희망 노래를 부르며 마치 제목 길게 짓기 경쟁이라도 하듯 우후죽순 만들어졌던 영화들도 싹 사라진 뒤였다. <여고괴담>은 신인감독 박기형에다 주인공 이미연, 김규리 정도만을 제외하고는 온통 신인배우들로만 이뤄져 난데없이 돌출된 영화였다. 하지만 관객이 무섭게 들기 시작했다. 방학이 되려면 멀었음에도 교복 관객의 힘은 엄청났다. 최종적으로 250만 관객 정도가 <여고괴담>을 관람했는데(전체 5편을 통틀어 1편의 흥행 성적이 최고 기록이다), 그때만 해도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 기록은 아마도 최소 500만관객을 불러모으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현재 <곤지암>이 4월 18일 기준으로 260만 관객을 동원한 것을 두고, 314만 관객을 동원한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에 이어 ‘역대 한국 공포영화 흥행 2위’라고 표현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여고괴담> 제작을 준비하던 당시, 공포영화에 대한 인식이 현저하게 낮은 탓에 제작진은 <여고괴담>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을 숨기고, <아카시아>라는 제목의 청춘영화 컨셉으로 학교 공간을 섭외하려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여고괴담> 개봉 이후 공포영화 장르는 물론이고 본격 장르영화들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이 높아졌고, 결과적으로 한국영화계 산업의 지형도가 변화하는 데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수많은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들을 배출하며 ‘여고괴담 사관학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애초 <여고괴담>의 기획서를 작성했던 오기민 PD는 이후 영화사 ‘마술피리’를 차려 <장화, 홍련>을 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고, 이후 시리즈로 돌아와 <여고괴담4: 목소리>(2005)를 만들게 되는 최익환 감독은 <여고괴담>의 조감독이었고, 류승완 감독, 김지훈 감독은 연출부 출신이며 권종관 감독은 제작부 출신이다. 이후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속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도 그 못지않다. 정재은 감독은 이 영화의 스크립터였고, 강이관 감독은 조감독이었으며, 이권 감독은 연출부 출신이다.

배출한 배우들의 리스트야말로 실로 어마어마하다. <여고괴담>의 김규리·박진희·최강희,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김민선(김규리로 개명)·박예진·이영진·공효진, <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 여우계단>(2003)의 박한별·송지효·조안 그리고 시리즈 중 20만 관객이라는 최저 흥행의 불명예를 가지고 있지만 이후 <박쥐>(2009)로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게 되는 주인공을 낳은 <여고괴담4: 목소리>의 김옥빈·서지혜·차예련, <여고괴담5>(2009)의 오연서·손은서·황승언 등 <여고괴담> 시리즈를 만든 영화사 씨네2000은 다른 모든 한국영화들의 젊은 여성배우 오디션을 대행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더 많은 한국 공포영화들의 기억은 이번호 특집 중, ‘한국 호러영화 흥행사, <여고괴담>에서 <곤지암> 이전까지’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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