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감독과 장규성 감독. 두 사람은 ‘부적절한 관계’다. 그렇게 지낸 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인지 요즘 두 사람은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필요할 때면 실컷 까발리고 다닌다. “이번에 <재밌는 영화> 만든 장규성이, 사실 내가 낳았다”라거나, “저, <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 새끼거든요” 하고.
그저 웃자고 하는 농담이 아니다. 두 감독의 나이 차이는 고작해야 세살. 하지만 장 감독에게 김 감독은 그것 ‘이상’이다. 적어도 “웃길 수만 있다면, 망가져도 좋다”며 당분간 코미디 장르만을 시추하겠다는 장 감독에게 김상진 감독은 지금까지 믿음직한 길잡이였다. <돈을 갖고 튀어라>부터 <투캅스3>까지 조감독을 맡아 자신을 믿고 따라준 장 감독에 대한 김 감독의 애정도 마찬가지.
4월12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장 감독의 데뷔작 <재밌는 영화>의 첫 시사회가 있던 날. 낮술이라도 한잔 걸친 듯한 김 감독의 상기된 볼은 자신의 차기작 <광복절 특사>의 시나리오를 그날 아침 탈고했다는 후련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새끼, 장하다’라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였다. <재밌는 영화>의 입심 좋고, 순발력 좋은 배우 김정은을 시사회 직후 이뤄진 ‘수다’의 향연에 뒤늦게 합류시킨 것도 두 감독의 끈끈한 관계 때문. 하지만 충무로가 맺어준 ‘부자’간의 대화는 칭찬과 격려만큼 조언과 걱정이 뒤따랐다. 편집자
장규성 감독이 조금 늦는 바람에 먼저 도착한 김상진 감독과 김정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정은 >>> 김 감독님, 준비하시는 시나리오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김상진 >>> 오늘 아침에 시나리오 끝내고 왔어요. 하… 죽죠… 죽이죠. 내 영화에도 출연 좀 부탁해요. 하하하. 그런데 이거 오늘은 내 이야기 하면 안 되는 날이에요.
김정은 >>> (웃음) 영화, 어떻게 보셨어요?
김상진 >>> 재밌더라고. 장 감독 없을 때 하는 말인데… . 영화보고 나니까, 뿌듯해. <신라의 달밤>도 있고 <주유소 습격사건>도 있고, 내 영화가 저런 많은 장면에서 요소요소에 박혀 있다는 게, 뿌듯하더라고. 내 이야기 하면 정말 안 되는데.
김정은 >>> 장 감독님이 김상진 감독님 조감독 생활을 오래 하셨잖아요. 솔직히 그때 어땠는지 너무 듣고 싶어요.
김상진 >>> 솔직히 말하면, 쌈마이로 봤지. 하하. 처음에 걔가 연출부 들어왔을 때 너 제일 많이 본 영화가 뭐냐? 물으니까, <총알탄 사나이>라고 대답하더라고. 청량리 오스카극장에서도 보고 열몇번을 봤대. 처음엔 이상한 얘다, 취향 참 특이하다, 왕무시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패러디영화를 하려고 그랬나봐. 말을 잘 듣고 일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준비할 때만. 그러다 현장나가서 삐딱선 타는 스타일이었지. 한참 찍고 있는데 와서 “감독님 이건 좀 이상한데요” 뭐 이러는 얘들. 욕심도 많고 의견도 많고 그런 사람이었어요.
(문제의 감독 장규성, 입장)
김상진 >>> 장 감독은 뭐하다가 지금 와?
장규성 >>> 어이구, 말도 마세요. 죽다가 살아났어요. 40계단 장면의 <할리데이>를 비지스가 못 쓰게 해서 너무 속상해 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금방 연락이 왔대요. 써도 된다고.
김정은 >>> 와, 너무 다행이다.
장규성 >>> 사실 거기는 <할리데이> 없으면 너무 유치하거든. 판권을 가진 BMG에서는 허락을 했는데, 비지스는 코미디, 패러디영화라니까 싫다고 하더라고. 오죽하면 내가 비지스한테 안 되는 영어로 편지까지 썼다니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장면하고 우리 영화 장면하고 다 들어 있는 비디오 자료도 보내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패러디영화가 기획되었는데, 흥행이 죽일 것 같다. (웃음) 뭐 이렇게 써서 말이야. 음, 믹싱 다시 해야지. 신난다. 아, 정은씨. 시사회장에서 정은씨가 제일 많이 웃더라고.
김정은 >>> 제가 원래 웃음이 헤퍼요. (웃음) 게다가 저는 편집 때도 안 보고 처음 보는 거였는데 너무 웃기더라고요. 솔직히 저야 이 영화가 마음에 안 들 수 없죠. 제가 앞장서서 오버하고, 욕심냈던 영화인데, 싫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걸. 제 나름대로는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까놓고 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있는 일이였던 것 같아요.
김상진 >>> 난 보고나니 유쾌해지더라고. 그건 뭐 장 감독이 재미있게 만들었기도 하지만 이런 패러디 장르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가능했던 건, 근간에 크게 터졌던 한국영화들 때문인 것 같아. 그런 영화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오히려 늦은감도 있지.
장규성 >>> 사실이에요. 앞에 자막에도 썼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게 좋은 한국영화 만들어주신 모든 영화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김상진 >>> 패러디 영화는 특 이야기 전개에 대한 궁금점과 기대심리는 그만큼 낮은데 똑같은 장면을 가지고 새로운 웃음을 줘야 하니까. 하여튼 대단해.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어.
장규성 >>> 정확히 잘 찔러주었어요. 패러디란 장르를 좋아하면서도 데뷔작으로 남들이 다 해놓은 것을 한다는 게 처음엔 되게 싫었어요. 여전히 패러디라는 게 그냥 조금 웃기게 만들고, 그냥 베끼는 거 아냐?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시잖아요. 하지만 초고 보는 순간, 이렇게 이렇게 고치면 진짜 재밌는 영화 나오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고 저예산으로 가면, 조잡하게 가면, 유치하거나 장난스럽게 가면, 절대로 안 된다고 판단했어요.
김상진 >>> 영화보면서 내내 배우들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서태화는 자신이 출연했던 <친구>를 그런 식으로 패러디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로 보이더라고.
김정은 >>> 처음에 이 영화 출연한다고 하니까 미쳤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선입견을 가진 분들이 많더라고요. 코믹이미지로 굳혀지는 걸 우려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그런데 과연 제가 CF 몇편 찍고 얻은 코믹한 이미지를 콤플렉스로 가져가야 하나, 왜 앞선 걱정을 하나, 했어요. 사실 코믹이란 장르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시나리오를 괭장히 재미있게 읽었고 아무도 하지 않은 영화를 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라고 판단했죠.
장규성 >>> 내가 아는 정은씨는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에요.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결정을 못 내리더라고요. 나는 처음부터 이 역할을 해낼 사람은 김정은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안 해주면 안 되잖아요. 감독이란 사람을 보고 싶다고 하기에, 개끌려가듯(웃음) 끌려가서 심사를 받았죠. 이를테면 감독 오디션을 본 거죠.
김정은 >>> 어휴, 아니에요. 감독님. 그냥 제 걱정이고 노파심이었죠. 사실 영화의 흥행보다 작업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만나고 나서 믿어도 될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즐겁게 작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장규성 >>> 나보고 똘똘해 보인다고 그랬다면서요?
김정은 >>> (당황) 그러니까… 내가 뭐 모르니까 그런 거라니까요. 뭐, 모르니까 감독될 사람한테 똘똘해 보인다느니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한 거죠.
김상진 >>> 영화를 안 했다는 게 정은씨의 큰 장점이기도 했을 거예요. 한번이라도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에겐 고정된 이미지란 게 있잖아요. 가령 신은경이나 전지현이 그 역할을 했을 때 자기가 자신의 역할을 패러디하는 꼴이 되니까 어려움이 많았을 거라고. 그런 점에서 <주유소습격사건> 때 철가방 했던 김수로가 다시 철가방으로 1인2역한 장면은 잔짜 웃기더라.
장규성 >>> 잘했죠? 사실은 그 철가방 역할이 우리 음악했던 손무현이 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안 그래도 수로씨한테, 참 감회가 새롭지 않냐, 며 농담하고 있는데 시간이 됐는데 손무현이 안 오는 거야. 그래서 김수로가 직접 하게 된 거예요.
전지현보다 더 드럽게, 시나리오보다 엽기적으로
김상진 >>>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많았겠네.
장규성 >>> 배우들이 난리도 아니었어요. 현장에서는 애드리브가 줄줄 튀어나와요. 그래서 어떤 부분 눌러주는 것도 많았다고. 현장 스탭들이야 자지러져서 웃더라도 나중에 붙여보면 오버일 것 같은 부분이 많았어요. 그나마 정은씨는 오버하면 오버하는 대로 다 놔뒀죠. 순발력이 뛰어난 배우예요. 촬영장 가기 전에는 뭐 별다른 좋은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는 경우 많잖아요. 그럴 땐 미완의 콘티를 가지고 현장가서 샘플을 하나 던져줘요. 그러면 배우들이 이것저것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거죠. 예를 들어 정은씨가 치과에서 열받아서 스케일링 환자 이빨뽑아놓고 ‘나 쌍거풀한 거 티나? 턱은 깜쪽같지?’ 하는 장면은 애드리브였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폭탄 들고 객석 향해 “대가리 박아! 누구야? 대가리 안 박는 게, 너! 삼층 다열에 둘넷여섯여덟열…” 하는 대사는 후시녹음 중에 불쑥 튀어나온 거였고요.
김정은 >>> 하하하, 그 ‘둘넷여섯여덟…’은 우리 엄마 말버릇이에요. 저는 누가 던져주지 않으면 잘 몰라요. 찍을 때 제 별명이 ‘한번만 더’였잖아요. 불안한 거야. 하지만 감독님이 요런 면으로 요렇게 생각해봐라 하시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나더라고요. <엽기적인 그녀>의 지하철에서 오바이트하는 장면을 찍을 땐 진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가요. 사실 술은 잘 먹는데 오바이트를 잘 못해요. (웃음) 술 먹고 오바이트 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드라마 <해바라기> 찍을 때도 차태현씨 얼굴에다 오바이트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소주를 몰래 훔쳐 마시고, ‘웩’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진석 감독님이 그 장면 보시고선 저보고 ‘너, 오바이트 안 해봤제?’ 하시더라고요. 초범이 아닌 셈이죠. 이번에도 원희 오빠가 너무 괴로워 하니까 정은씨 손가락 한번 넣어보라고 해서 구역질나게 해서 했어요. 게다가 감독님이 영화 속에서 오물이 나오는 걸 싫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오물도 없이 전지현보다 더 드럽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래서 결국 오바이트중에 국물만 걸러서 컵에 쏟아내고 건더기는 다시 삼키고, 그러다 목막혀서 다시 그 국물을 마시는 정말 ‘엽기’적인 장면이 나온 거예요.
김상진 >>> 다른 배우들에 비해 정은씨는 패러디장면이 <쉬리> 빼고는 많이 없는 것 같아요.
김정은 >>> 그런 편이죠. 그래도 전 <쉬리>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는 정말 코믹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앞뒤 상황이 있으니까 그냥 내버려둬도 너무 웃긴다고 감히 생각했었는데. 그 장면은 실수로 박치기 하고 나서 원희 오빠의 코믹한 리액션이 있으니까. 현장에서 사실 그 장면, 더 코믹하게 가려고 재촬영도 했는데, 감독님 붙잡고 그랬어요. 이 장면에서 저만큼은 슬프게 가게 해주세요 하고. 나는 무지 슬프게 넘어가는데 관객은 웃겨서 나자빠지는 상황을 만들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장규성 >>> 시나리오하고 틀린 느낌으로 내가 요구한다거나… 그런 장면은 없었어요?
김정은 >>> 집에 들어가서 자기 전에 머리 속으로 오늘 찍었던 장면을 붙여보고 그랬거든요. 그러면 이상하게 현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틀렸고 감독님이 말한 방향이 맞는 거예요. 코미디는 사실 하면 할수록 만성이 들어서 스스로 수위조절을 하기 힘들 때가 있는데 감독님께서 잘 조정해주신 것 같아요.
김상진 >>> 코미디는 보통 첫 테이크갈 때가 가장 정확한 감정상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도 기술적으로 힘든 장면이 아니면 여러 번 안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김정은 >>> 특히 여관방 장면 찍을 땐 배우들끼리 미리 되게 웃기게 준비를 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냥 처음처럼 가라고 했을 땐 좀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에요. 그건 그렇고 우리 영화 보고나면 관객이 할말이 많아질 것 같아요. 그 장면은 그거 패러디지? 그거 아니었나? 뭐 이런 거. 그게 패러디영화 보는 재미겠죠?
김상진 >>> 일종의 수수께끼 푸는 느낌이겠지.
김정은 >>> 감독님이 아무도 몰래 ‘살짜쿵’ 집어넣은 장면을 오늘 보고서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고 그랬어요. 나중에 트렁크에 경호원들이 앉아 있는 장면 있잖아요. (옆자리에 앉은 매니저를 보고서) 그런데 죄송해서 어쩌죠? 저 라디오 생방송이 있어서 가봐야 된대요. 아, 더 놀고 싶은데…. ▶ 전반전 - <재밌는 영화> 재밌는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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