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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류승완 감독 인터뷰 - '국뽕'과 친일 두가지 논란이 동시에 불거지다니...
김성훈 사진 최성열 2017-08-09

-피곤해 보인다.

=최근의 논란 때문에 잠을 못 잔 건 아니고. (웃음) 불면증 때문에 약 먹은 지 꽤 됐다. 후반작업과 무대 인사를 차례로 강행군하는 바람에 몸은 피곤한데 잠을 푹 잘 수 있어 수면 건강은 좋아진 것 같다.

-개봉 첫주 400만(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 관객을 동원했는데(8월 2일 현재 <군함도>는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편집자).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극장가 반응은 좋은 것 같다. 한 젊은 제작자가 “야마다(김중희) 목이 날아가는 순간 박수가 나왔다”고 알려와서 “진짜?”라고 되물었더니 “아니, 관객 전부 다 쳤다는 건 뻥이고 100명 정도인 것 같다”고 하더라. (웃음)

-군함도를 처음 알게 된 계기가 뭔가.

=<베를린>(2012) 촬영을 마친 뒤 <군함도>를 공동 제작한 김정민 필름케이 대표와 그의 친구인 신경일 작가가 보여줄 게 있다고 해서 만났다. 군함도 사진이었는데 이게 뭔가 싶더라.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인데 자연의 모습은 아니고, 사람들이 그런 모양으로 만들었다기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호기심이 동했다. ‘그곳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딱 꽂혔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시바타 도시아키 나가사키 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 사무국장(재일조선인 인권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일본 정권, 사회와 싸워왔다.-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군함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들었다. 군함도를 처음 봤을 때 어떤 감흥을 느꼈나.

=군함도는 나가사키에서 배로 20분 거리에 있는데 이오지마(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의 배경)를 포함한 폐광 세개를 지나 도착했다. 그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이 섬의 부속품이 된 느낌이 들었다. 보통 유적지나 관광지에 가면 ‘여기, 정말 좋다’거나 ‘이곳에서 영화 찍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어떤 공간을 보고 느낀 주체인 내가 없어지는 듯이 느껴지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군함도의 경우, 인간이 자연을 이긴 느낌이 들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 기에 짓눌리고 말았다. 영화 초반부에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군함도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감정도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한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공간에 가서 ‘이게 뭐지?’ 하고 느끼는 기분 말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세트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까닭에 무모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세트가 아니면 내가 느낀 감정을 배우, 제작진에 설명하고 설득할 길이 없었다. 주연배우 네댓명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계속 등장하는 수백명의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을 보여줘야 하는 이야기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블루 매트가 아닌 세트에서 체화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려고 했다.

조선인들의 집단 탈주는 프로젝트 시작부터 고수한 설정

-외교부(당시 윤병세 장관)가 제작진의 군함도 방문 사실을 예의 주시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군함도 취재를 다녀온 뒤 외교부 라인에서 연락이 왔다. 그곳에 왜 갔냐고 물어왔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구나 싶었다. 일본에 취재갈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도 그래서다.

-50년 동안 조선인 강제 연행을 기록해온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1933년생으로, 1968년부터 2016년까지 책 57권을 내며 후쿠오카부터 홋카이도, 한국, 사할린, 뉴기니, 시베리아까지 과거 일본 제국을 망라한 연구를 해왔고, 그중 37권이 강제 동원된 조선인 광부와 노동자와 특공대의 삶에 대한 집요한 기록이다. 대표작은 <청산되지 않은 쇼와(昭和)-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1990).-편집자) 선생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와 어떤 얘기를 나눴나.

=일본이 징용 노동자를 다룬 방식, 일본군의 위안부 운영 방식, 그곳에 존재했던 친일파 조선인 등 우리가 조사한 자료 전부를 챙겨가 사실관계를 검토받아야 했다. 이 프로젝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니까. 우리의 상상이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역사를 왜곡하는 건 아닌지, 영화에서 허용될 수 있는 범위에 해당되는지 등 그에게 하나하나 검증받는 게 중요했다. 가령 영화에서 탄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불이 다른 갱도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매몰시키는 사건은 실제로 군함도가 아닌 군함도 인근 섬의 탄광에서 발생했었다. 그런 소스들을 가지고 군함도라는 공간에서 벌어졌을 법한 사건, 사고들로 재구성한 거다. 그 과정에서 어떤 장면이 명백한 왜곡이라고 한다면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시바타 도시아키, 하야시 에이다이와의 만남은 시나리오를 쓰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함도와 관련된 논쟁 중에서 과장이나 왜곡이 적지 않다. 우리가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것 중 하나가, 당시 군함도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 징용 노동자, 미군 포로 등 다양한 군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고. 시바타 선생님도, 하야시 선생님도 군함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라고 강조하셨다. 특히 시바타 선생님은 당시의 미쓰비시와 지금의 미쓰비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견을 주시기도 했다.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우리의 과거를 단순한 연민이나 감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목적이 더 흐려질 수 있으니 오히려 더 냉정하게 역사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조언이 영화의 밸런스를 맞추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2016년 1월 진행된 <씨네21> 신년 대담에서 <군함도>를 “스티브 매퀸의 <대탈주>(1963)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었는데.

=조선인들의 집단 탈주는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바뀌지 않았던 설정이다. 집단 탈주가 영화적 상상력에서 출발한 설정이라면 탈주의 목적성에 있어서 취재를 할수록 조선인들이 스스로 군함도 밖으로 나가게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당시 개개인의 탈주 시도는 빈번했다고 한다. 시바타 선생님도 영화처럼 수백명까지는 아니지만, 몇 십명 단위의 집단 탈출 시도가 있었다고 알려주셨다. 군함도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육지인 노모반도의 앞바다는 11월에 수온이 가장 높단다. 그래서 11월에 탈출을 많이 했다더라. <황해>를 찍으면서 바다 전문가가 된 나홍진 감독에게도 물어보니 11월이 가장 따뜻한 게 맞다고 했다. (웃음) 그런데 바다가 매우 거칠어서 노모반도까지 헤엄치고 가더라도 마지막에 파도에 휩쓸려 돌이나 바위에 부딪혀 죽은 사람이 많았고, 그때 죽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흔적들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모든 기록이 덮여서 사실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집단 탈출 흔적을 확인한 거다. 그때 당시 탈출은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사실이기에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당시에는 집단 탈출을 영화적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프닝 시퀀스를 흑백으로 처리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지막 시퀀스 또한 흑백으로 전환되는데 나가사키 원폭만 컬러로 구분해 표현한 의도는 뭔가.

=청산되지 않은 과거라 조금만 이상하게 건드려도 자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소재인 까닭에 처음에는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갈까도 생각했다. 그래서 현장에서 모니터를 흑백으로 처리해봤는데 탄광 속 열기나 생생함이 잘 살아나지 않더라. 무엇보다 군함도 흑백 사진을 보고 느꼈던 생경함을 흑백으로 전달해야 관객과 소통을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흑백 이미지로 출발했다. 마지막 시퀀스를 흑백으로 전환한 건 컬러를 관통했던 강옥(황정민) 세대를 일단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취재하러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아베 정권이 원폭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군이 떨어뜨린 폭탄들을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전시해 아이들에게 일본이 어떤 참사를 겪었는지 교육하고 있더라.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과거의 과오를 명확하게 바라봐야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나. 떠나는 사람들은 보내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과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소희(김수안)가 관객을 응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까지 살고 있는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이 메시지가 전달됐으면 했다. 사실 흑백 처리는 뒤늦게 결정됐다. 컬러에서 흑백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원래는 지금 상영 버전보다 뒷부분에 있었는데, 화면 색감이 워낙 무채색이라 그 지점을 (흑백으로 처리해보니) 느낌이 잘 살지 않아서 강옥이 죽은 직후로 앞당겼다. 내 의도도, 색감도 잘 표현된 것 같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초반부,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군함도에 상륙하는 시퀀스가 굉장히 생생하고, 세심하게 그려져 다큐멘터리 같은 인상을 받았다.

=조선인들이 군함도에 상륙해 징용 환경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박무영(송중기)이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그 이후에 끌고 가려는 사건들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조사했던 군함도의 실상을 다 축약해 보여줘야 하는 게 목표였다. 그 시퀀스를 연출할 때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일단 군함도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끌려간 사람도 있고, 자원한 사람도 있으며, 무언가를 피해서 간 사람도 있으니 다양한 사연들을 보여줄 것.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의 설움까지 온몸으로 느껴지게 할 것. 공간이 관객이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따라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할 것. 무엇보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어떤 감상도 들게 하지 말고 최대한 객관적인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것. 숏 지속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클로즈업숏(인물)과 풀숏(배경)을 따로 분리하지 않으려고 한 것도 이 원칙들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다. 촬영 전, 제작진이 단체로 <사울의 아들>(감독 라슬로 네메시, 2015)을 보러 가서 관객이 영화를 체험하는 방식을 참조했다. 카메라가 인물에 근접해 계속 따라감으로써 관객이 인물의 경험을 체험하게 하는 영화니까.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탄 관부 연락선 화물칸 시퀀스, 강옥의 스기야마 형사 추천서가 휴지 조각처럼 버려지는 시모노세키 항구 시퀀스, 군함도가 유령처럼 시야에 등장하고 <군함 행진곡>이 들려오는 바다 시퀀스, 일본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조선인을 때리며 수송선으로 옮겨 태우는 군함도 선착장 시퀀스, 군함도에 상륙해 신체검사를 받고, 임금 지불 방식, 숙소 제공 방식을 정신없이 설명 듣는 시퀀스가 매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데, 그렇게 정신없이 보여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일본 군가 <라바울코우타>가 울려퍼지는 동안 최대한 많은 정보를 줘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은 친절하게 설명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강옥처럼 일본어를 잘 구사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을 건데, 그런 사람들에게 징용 계약서를 내밀며 서명하라고 하니 그게 뭔지도 모르고 서명했을 거다. 관객이 이들처럼 두들겨 맞으면서 봐야 영화 속 인물들과 공평하고, 그게 이 영화의 스타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징용 계약 내용과 임금 지불 방식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계약서 클로즈업숏이 이어진 뒤, 계약서를 받는 사람의 감정숏을 따로 붙이는 컷 분할 방식은 아닌 거지. 이모개 촬영감독과 함께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들이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큐멘터리같은 숏으로 펼쳐내 보여주면 좋겠다고 입을 맞췄다.

박무영 캐릭터에 가장 영감을 준 인물은 장준하

-미 육군전략정보처(OSS) 소속 대원인 박무영이 임시정부(3·1 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선포된 정부)와 건국동맹(여운형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이 광복 직전 조직한 독립운동단체.-편집자) 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1941년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로, 이승만이 외교위원부 책임자로 활동. 좌우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정치 활동을 했으나 큰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편집자) 등 세 단체의 갈등을 풀어줄 만한 인물인 윤학철(이경영)을 구출하기 위해 군함도로 들어가는 설정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건가.

=박무영 캐릭터를 구축할 때 가장 영감을 받은 역사적 인물은 장준하 선생이었다.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에 배속되었다가 쉬저우에서 탈출해 충칭광복군에 합류했다는 박무영의 코스가 장준하 선생의 행보 그대로다. 또, 유일한 박사는 냅코(NAPKO) 특수요원으로 참여해 폭파, 통신, 낙하 등 특수공작훈련을 받으며 1945년 한국 침투를 준비하기도 했다(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암호명 A’라 불린 이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편집자). 광복을 앞두고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각 단체들의 입장이 다르니 이들을 한데 모을 만한 분이 하시마섬에 있고, 그 사람을 데려오는 작전을 실행할 수 있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창작물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설정했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 영화의 모든 인물이 창작된 캐릭터라 할지라도 역사가 베이스가 아니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인물과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최칠성(소지섭)의 거대한 육체가 군함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더라.

=소지섭씨가 음식도 제대로 안 먹으면서 찍었는데…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골격이 있지 않나. 주변의 다른 배우들이 워낙 혹독하게 감량하고, 체구가 작은 아역배우들이 많이 등장해서 소지섭씨의 몸이 상대적으로 더 커 보이는 것도 있다. 칠성이 살아남기 위해 노무계원을 쟁취하잖아. 당시 노무계원은 먹은 음식이나 대우가 징용 노동자들과 달랐다. 일본인들이 가는 유곽에 갈 수 있었고.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너무나 멀쩡한 일본인 간부 같은 사람이 실제로는 조선인인 경우도 많았다. 어쨌거나 이런 비판은 좋은 논란인 것 같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면서 군함도와 그것을 둘러싼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군함도의 조선인 노무계원 송종구(김민재) 같은 일반인부터 윤학철 같은 지식인까지 전향 조선인을 그릴 때 어떤 고민을 했나. 1930년대부터는 지식인들이 대거 전향을 하고, 일제의 문화정책에 투신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아닌가.

=친일 청산 문제는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초반부, 반도호텔 시퀀스에서 ‘대일본부인회’ 띠를 두른 친일파 부인들이 징용 가는 학생들을 앞에 두고 징용을 찬양하지 않나. 이들이야말로 ‘선동꾼’이다. 이 영화를 시작할 때 친일파, 전향 조선인이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했던 까닭에 (이 영화가 친일파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조선인들이 친일파나 전향 조선인들에게 착취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황했나보더라. 불편한 진실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고. 어떻게 한 영화에 대해 ‘국뽕’과 친일을 동시에 들을 수 있나. (웃음) 한국영화가 친일파와 전향 조선인을 다룬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앞으로 더욱 많이 논의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일본보다 같은 (전향) 조선인이 더 심했다’는 해석에 이르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데.

=박무영이 그렇게 얘길하지 않나, 군함도에 있는 일본군들은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하자가 있기 때문에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들이라고. 군함도가 전쟁의 최전선이 아니다. 이들은 군인도 경찰도 아닌 경방대원이라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아니기에 군함도에서 파업이 벌어졌을 때 나가사키에서 병력을 따로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단체로 들고일어나면 자신들이 밀릴 걸 아니까 한 사람만 괴롭히는 거다. 당시 일본인들이 아주 야비했던 게 조선인 노무계원을 세워 조선인을 관리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노무계원이 편한 자리니까 그곳에서 같은 조선인을 상대로 사업하는 사람도 있고, 함바집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함바집을 운영한 사람 중에는 자신의 가족들까지 군함도에 데리고 가서 생활한 사람도 있다. 수십년간 감추어져 있던 군함도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우리조차 이 공간 안에서 얼마나 많은 레이어들이 있는지 파악이 잘 안 되고 있다.

-대탈주의 도화선이 되는 촛불 시퀀스는 현실 정치로부터 영향을 받았나.

=그 전 시퀀스에서 미군이 군함도를 폭격해 전기가 다 끊겼는데 초를 들고 있지, ‘후레시’를 들고 있을까? 스마트폰의 라이트를 켤 수도 없고. (웃음) 물론 촛불을 든다는 의미가 분명히 있었다. 지난해 촛불 혁명 이전에 2002년 효순·미선양 사건(장갑차로 이들을 치여 숨지게 한 미군 2명에게 미군 군사법정이 무죄를 선고했다-편집자) 때 삭발식에 참여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촛불 시위는 우리가 꼭 찍어야 했던 이미지였다. 민중의 이미지가 중요한 영화니까. 또, 그 뒤에 이어지는 대탈주 시퀀스에서 조선인이 한데 뭉쳐서 사다리탑을 들어올리는 이미지도 굉장히 중요했다. 사다리탑이 무너졌을 때 강옥은 자신의 딸 소희만 살리려고 하지만 소년과 소녀들이 하나둘씩 나와서 사다리탑을 들어올리려고 하지 않나. 가장 힘없는 아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으 으 ’ 잘해보자 하는 이미지가 박무영이 총을 쏘고, 최칠성이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는 장면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으쌰으샤’하는 소리만 따려고 현장에서 후시녹음을 다시 했을 정도니까. 우리가 나아갈 길은 스스로의 힘으로 간다, 그게 촛불을 드는 상황의 연장선상이다.

-모두가 촛불을 드는 상황에서 박무영만 유일하게 촛불을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무영이 군함도를 나가야 한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선동밖에 되지 않잖나. 박무영이 정치인처럼 “나가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나. 그때 강옥이 “이런저런 명분이고 뭐고 내 딸하고 살아야겠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잖나. 새신랑(백승철)도 “여기까지 와서 다리 잘리면서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데”라고 말하잖나. 사람들이 자신의 사연을 꺼내는 순간, 이 사람들이 움직인다. 누가 탈출을 시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가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사상보다 자신의 삶과 생존에 대한 절실함이 우선시되는 게 중요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내맡기거나 의존하는 사람들은 결국 불에 타버리잖아.

스크린 수 문제로 지금껏 해왔던 노력들이 묻히니…

-후반부의 대탈주 액션 신은 스티브 매퀸의 <대탈주>처럼 탈출하는 과정에서 서스펜스를 구축하기보다는 수백명의 조선인들이 뿜어내는 몸의 활동성, 에너지를 강조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대탈주>처럼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연출했더라면 더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이 영화가 나한테 가장 중요했던 건 육체성이다. 조선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탈출하는가, 몸의 움직임과 동선을 보여주고 싶었다. 촬영 전, 군사학자이자 군 역사학자인 전문가에게 시나리오와 콘티를 보여주며, 당시 일본군이 썼던 무기와 전략 전술, 군함도를 관리했던 경방대원들이 꺼낼 수 있는 병력과 전술, 조선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전술, OSS 대원이 세울 수 있는 전술 등을 자문받았다. 자문 결과를 콘티에 반영해 찍은 시퀀스다. 사람들이 사다리탑을 건너다가 땅에 떨어지는 이미지, 사다리탑이 무너지면서 생긴 패닉, 겁에 질려 있는 표정, 무기를 잘 못 다뤄 총알을 장전하다가 아군을 쏘는 오발 사고 등 인물들이 가진 육체성을 표현하는 건 너무나 명확했다.

-<군함도>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 대해 얘기해보자. 앞에서 짧게 언급한 대로 친일과 ‘국뽕’ 논란이 동시에 나오고 있는데.

=일일이 해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쉽습니다,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할 마음도 없다. 다만, 논란이 과열 양상을 띠는 것 같다. 만든 영화로만 평가받고 싶은데 다른 영화들처럼 관객의 평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아니, 한 영화에서 ‘국뽕’과 친일, 두 가지 논란이 동시에 불거져나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동료감독들도 이런 반응들을 보며 많이 놀라고 있다.

-여기에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기름을 부은 꼴인데.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입장은 명확하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매년 여름 반복되고 있는 논쟁인데 이 논쟁은 나를 포함해 모든 영화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번 독과점 논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나 또한 독립영화로 경력을 출발했고, <베테랑>이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수익의 일부를 여러 독립영화단체와 독립예술영화전용관에 후원했다. <옥자>나 <그 후> <재꽃> 같은 영화를 집 가까운 멀티플렉스에서 보고 싶다. 그런데 이 영화들을 보려면 시내까지 나가야 한다. 이 문제 때문에 산업이 피로한 상황에서 극장, 배급, 투자사 등 영화계 여러 구성원들이 모여서 스크린 수 제한선을 정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군함도>에 2천개가 넘는 스크린이 배정된 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뭐 어땠겠어, X됐다, 이거지. 돈을 벌려고 했다면 <베테랑2>를 만들었겠지. <베테랑>이 끝나고 난 뒤 회사(외유내강)에 거대 자본 투자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센 딜이 왔는데 아내인 강혜정 대표한테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부정하면서까지 큰 투자를 받는 건 아니지 않아?” 그랬단 말이야. 그런데 스크린이 2천개 넘게 잡히면서 지금껏(영화계에서) 해왔던 노력들이 묻히니 내 마음은 어땠겠나.

-투자자 크레딧이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 가장 먼저 뜨지 않는 건 반가운 시도다.

=크레딧의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한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열차의 도착>(1895)에는 크레딧이 없잖아. 크레딧은 할리우드에서 영화가 산업적인 기능을 하면서부터 누가 만들었는지, 출연하는지를 관객에게 알려주기 위해 생긴 거다. 이런 사람들이 만들었으니 재미와 완성도를 보증한다는 거지. 스탭들이 우리도 (이름을 올릴) 권리가 있다고 조합에 요구하면서 아티스트와 스타가 차례로 올라가는 원칙이 정해진 거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영화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이 영화를 만든 사람보다 먼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게 이상한 거다. 관객 또한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스타 이름을 먼저 보고 싶지, ‘왜 투자자 이름을 먼저 봐야 되지?’ 하면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고. 우리가 폭스나 워너 회장 이름을 모르잖아. 투자자들이 투자한 돈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현장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에 대한 순서를 지켜주자는 것이다. 이들의 가족, 친구들이 영화를 보고 ‘아, 내 아들이 한 영화다, 우리 딸이 참여했구나’ 같은 자랑스러운 마음 정도는 들게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투자자 크레딧 순서를 바꾸겠다고 하니 CJ에서 뭐라고 안 하던가.

=많이 했지. (웃음) 그래도 CJ한테 되게 감사한다. 처음 시도한 거니까. 이 결정이 앞으로 나올 영화의 크레딧 순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군함도> 2시간30분짜리 확장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영화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개봉하기 전에 CJ와 함께 약속한 거다.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스타들을 따라가기 좋은 버전이다. 여름 시장인 까닭에 영화를 편하게 보고 싶어 하는 관객에 대한 배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영화 감독으로서 자본에 무책임한 것도 옳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2시간30분 버전은 지금 상영버전보다 이름 없는 조선인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들에 대한 묘사를 더 중점적으로 보여준다고 보면 된다.

-스스로 대중영화 감독이라고 표현하지만 작가적 야심이나 욕망도 강하다고 생각하진 않나.

=그건 말장난인 것 같다. 19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작가들이 정의했던 작가의 기준에 따르면 마이클 베이도 작가에 해당될 수 있다.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사람을 작가라고 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비슷한 스타일을 유지해온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영화를 만들 때마다 생각하는 건 후지게 하진 말자는 거다. 영화산업의 모든 것들이 광풍의 도가니로 가고 있을 때 괴물은 되지 말자는 생각은 있다. 내 입으로 작가적 야심이 있다고 얘기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고, 지금까지 만들던 대로 영화를 만들 것이고, 나이가 들어서 더이상 일을 못할 때 내 영화의 블루레이를 꺼내보면서 ‘그 시절 만든 영화지만 괜찮네’라고 생각하면 만족할 것 같다. 나를 후진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힘이 있다면 그 힘에 밀리거나 지고 싶진 않다.

-첫 역사물을 내놓은 소감이 어떤가.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는 왜 빼먹나. (웃음) 예전부터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고 싶었고, <군함도>가 그 결과물이다. 다음에 이 시대를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한 상태에서 다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던 작품 중 하나가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는데 과도한 보도 경쟁 속에서 스포일러가 노출되어버렸다. 대체 내가 뭐라고. (웃음) 현재로서는 <베를린>의 스핀오프가 차기작이 될 것 같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배경으로, <베를린>보다 훨씬 더 차갑고 박력 넘치며, 죽여주는 액션을 선보일 것이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보다.

=이게 제대로 된 인터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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