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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과 추상화된 연출의 장단점 <다른 길이 있다>

닉네임 검은새(김재욱)와 흰새(서예지)가 대화방에 입장한다.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궁리 중이다. 자살할 날짜와 장소는 10일 뒤 춘천으로 정했는데 어떻게 죽을지는 의견이 모이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교환하던 둘은 3일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대화방을 나간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여전히 죽는 방법에 이견을 보인다. 검은새는 얼음이 얕아진 쪽으로 걷다가 그 속에 빠지는 방법을, 흰새는 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우는 방법을 선호한다. 결국 흰새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대화를 끝낼 무렵, 흰새는 뜬금없이 검은새에게 아이디가 검은새인 이유를 묻는다. 검은새는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검은새 같았다고 답한다.

구도자의 선문답을 온라인으로 옮겨온 듯한 두 사람의 대화 탓일까. 모든 일에 초연한 듯 보이는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일까. 영화는 종교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일 중 몇 가지를 따다가 두 사람 앞에 던져놓은 것 같다. 여자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돌보며 행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상황이다. 밤이 되면 아버지로부터 지속해서 성적 학대를 당한다. 남자는 선한 마음으로 행한 일로 인해 돈과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정신질환자인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들을 탓한다. 충분히 선정적인 상황임에도 영화는 이를 생략하거나 추상화시켜 표현한다. 이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지만 이로 인해 인물들의 감정 역시 추상화된다. 영화의 주된 장소 중 하나인 단단한 얼음 강을 닮은 인물들은 그 속내를 보여주지 않은 채, 내내 차갑게 밀어대기만 한다. 그러므로 캐릭터나 풍경, 카메라의 움직임 등으로 표현되기 마련인 영화의 주제 의식 역시 다소 붕 뜬 것처럼 모호하다.

조창호 감독이 <폭풍전야>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감독은 첫 장편 <피터팬의 공식>과 옴니버스영화 <판타스틱 자살소동> 등에서 자살을 다룬 바 있다. <다른 길이 있다> 역시 이들의 연장으로 느껴지나, 한편으로는 한국영화에서 어느 순간 맥이 끊긴 구도자들의 이야기를 되살리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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