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내 성폭력’ 여섯 번째 대담은 독립영화 감독들의 이야기로 채웠다. <거짓말> <피로> 등 세편의 독립장편을 선보인 김동명 감독, 20대 때 페미니즘 활동을 가열차게 했고 현재 첫 번째 독립장편 극영화를 작업 중인 김보라 감독, 성폭력과 낙태 등 여성 문제를 카메라에 담아온 조세영 다큐멘터리 감독, 내년에 첫 번째 다큐멘터리를 선보일 예정인 마민지 감독이 한자리에 모였다. 영화과 출신인 김보라 감독과 마민지 감독은 학교에서의 성차별부터 술자리에서의 공공연한 성희롱까지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주었고,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세영 감독은 일상에 만연한 폭력적 현상을 들춰냈으며, 한 아이의 엄마이자 영화감독인 김동명 감독은 여성 영화인의 육아 문제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씨네21>은 지난 1079호부터 여성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들어왔으며,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토론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나갈 계획이다.
김보라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 대학원 영화과에 진학했다. 단편 <빨간 구두 아가씨>(2003), <귀걸이>(2004) 등을 만들었고, 대학원 졸업작품인 단편 <리코더 시험>(2011)으로 미국감독조합 학생영화상, 우드스톡영화제 학생단편영화 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1994년, 14살 중학생 은희가 주인공인 독립장편 <벌새>를 작업 중이다.
김동명
단편 <전병 파는 여인>(2007)으로 전주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이후 독립장편 <이상한 나라의 바툼바>(2008), <피로>(2011), <거짓말>(2014)을 발표했다. 허언증을 앓는 주인공의 이야기 <거짓말>로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대명컬처웨이브상, 2015 여성영화인축제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육아와 영화의 병행을 고민하고 있다.
마민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예술사 과정에서 연출을 전공했고,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다. 단편 극영화 <언어생활>(2009), <아폴로 17호>(2011), 중편 다큐멘터리 <성북동 일기>(2014)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부동산 열풍을 가족 이야기로 풀어내는 사적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의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다. 영화는 2017년 상반기 완성 예정이다.
조세영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2009),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자, 이제 댄스 타임>(2013)을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 최근엔 단편극영화 <물물교환>(2015)을 만들었으며,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자, 이제 댄스 타임>은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 손경화, 강유가람 등과 공동제작 형식으로 협업해 완성했다.
-매주 대담자 섭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커서 그런 건가 싶다. 어렵게 이 자리에 나와줘서 감사하다.
=조세영_ 전화를 받고 덥석 하겠다고는 했는데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이 되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1인 체제로 움직이다 보니 촬영장에서의 성폭력 실태보다는 내가 겪었거나 들었던 불합리한 처우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어제의 일이다. 지역의 작은 영화관 사업의 일환으로 농촌 지역 어르신들에게 <미워도 다시 한번>(1970)을 보여드렸는데 30년 만에 영화 처음 구경한다며 굉장히 기분 좋아하셨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던 찰나에 이장님이 다음번엔 박찬욱 감독님의 <아가씨> 같은 영화를 보여주면 어떻겠냐고 하더라. 영화 마지막에 굉장히 ‘좋은’ 장면이 있지 않냐면서. 현장에선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훅 한방 얻어맞게 된다.
=김동명_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제대로 된 현장 스탭 경험 없이 바로 내 영화를 찍은 경우라 신체적 접촉이 있는 성폭력 경험은 없었는데, 최근에 육아를 하면서 느낀 고립감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2014년부터 육아를 시작했다. 육아를 하면서 다시 영화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다.
=김보라_ 김동명 감독님이 운이 좋았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 표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봤다. 성폭력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나는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동국대 영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때 학내 성폭력 사건이 있었는데, 후배가 피해자이고 선배가 가해자였다. 후배가 선배를 규탄하면서 대자보를 썼는데 학과의 남자 선배들이 그 대자보를 찢어버렸다. 그게 찢겼을 때 내 마음도 찢겼다. 나에게 친절했던 선배들의 민낯을 봤다. 심지어 이런 얘기도 있었다. “걔(후배)는 못생겼는데 선배가 왜 그랬지?” 그 문장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날의 풍경이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닌 것 같다. 그즈음부터 페미니즘 단체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술자리에서 미묘하게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술자리에서 유부남 영화인 두명이 불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한테 맥락 없이 물어본 경우가 있었다. 당황했지만 순진하게 대답하고 넘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남자사람친구한테 물어봤더니 바보 아니냐고, 날 떠본 거라더라. 그들의 입장에선 자명한 언어였는데 나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을 긍휼히 사랑했던 거다. 물론 그들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공기들을 느끼게 되면서 어느 순간 술자리도 멀리하게 됐다. 외모 품평 역시 심심찮게 듣는다. 상암동 디렉터스 존에 입주했을 때 가진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감독님, 여자감독치고는 외모 톱인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구혜선이 있잖아” 그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감독님, 솔직히 연기하고 싶었는데 감독하는 거죠” 이러더라. 대체 이건 뭔가 싶어서 떡볶이만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20대 때는 모든 술자리를 불바다로 만든 화력 장전 페미니스트였는데 최근 몇년은 조용히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안 되겠다 싶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지금 나는 전투력 충만한 상태다. (웃음)
여자감독 문제 있다고?
=마민지_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동료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깨나’라는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모일 때마다 우리끼리 규탄대회를 열었다. 동료들과 자주 얘기하는 문제는 두세 가지다. 다큐멘터리 현장에서 경험하는 성폭력 문제, 생계유지를 위한 영상 작업 아르바이트에서 어린 여성감독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수모, 그 과정에서 겪는 남성감독과의 임금 격차 문제다. 동료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어제 문자로 ‘네가 우리의 모든 경험을 다 토해내고 오라’고 했다. (웃음) 어깨가 무겁다.
-김보라, 마민지 감독은 대학 영화과 출신이다. 여성감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대학에서부터 만연해 있는 듯 보인다.
마민지_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다. 학부에서 단편을 연출할 때였다. 중간에 로케이션이 변경돼서 급하게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는데, 조연출 오빠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서 벽으로 나를 밀쳐 때리려고 했다. 그때 나는 21살이었고 조연출은 20대 후반이었다. 내가 마동석이었다면 분명 당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웃음) 또 다른 연출하던 언니의 경우는, 로케이션이 어그러지자 연출부의 누군가가 화가 나서 그 언니한테 의자를 집어던진 적이 있다. 그것은 분명 젠더의 권력 차이에서 발생한 성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 및 주변 남자들은 그것을 그냥 폭력으로만 인식하더라. 한발 더 나아가 ‘얼마나 짜증나게 했으면 그랬을까’라고 의자 던진 사람을 두둔하는 이도 있었다.
김동명_ 그런 남자들이 결국 영화계로 진출하고 영화를 업으로 삼게 될 텐데, 정말 문제다.
마민지_ 다큐멘터리 스탭으로 일할 때 한번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감독님이 내 면전에 대고 욕을 했다. 단둘이 방 안에 있는 상황에서. 너무 무서워서 PD님한테 설명드렸지만 결국엔 내가 잘못해서 쌍욕 먹은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 일이 내겐 너무 충격이었는데, 지금도 활동하는 감독님이라 어디선가 마주칠까 피해 다닌다. 이 얘기는 꺼낼까 말까 고민했는데, 얘기하다보니 화가 나서 해버렸다. (웃음)
김동명_ 나 역시 첫 장편을 찍을 때 남자 촬영감독과의 작업이 편치 않았다. 촬영감독과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럴 거면 네가 찍어”라면서 카메라를 내미는데 완전 멘붕이었다. 그 뒤로 여성 스탭과 작업하는 걸 선호하게 된 것 같다.
김보라_ 대학 때부터 남자들은 쉽게 말한다. 여자감독 문제 있다고. 그들이 말하는 문제라는 것은 현장에서 잘 운다, 예민하다, 너무 꼼꼼하다는 거다. 예를 들면 여성감독이 꼼꼼하면 그냥 예민한 거고, 봉준호 감독이 꼼꼼하면 봉테일이 된다. 어떤 남자 동기는 여배우랑 사귀었는데 술자리에서 다른 남자애들이 부러워하니까 “부러우면 너도 감독해” 그러더라.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의 결혼을 두고도 남자들이 하나같이 영화감독이 됐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건 여자배우를 대상화하는 위험한 발언이다. 촬영 수업 때도 남성 우월적 시선을 많이 느꼈다. 나는 늘 촬영 수업할 때 불안했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시선들이 무서웠다. 그런데 미국 대학원에서 촬영 수업을 들었을 때, 모든 촬영 기자재는 20대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디자인됐기 때문에 C스탠드를 여성들이 잘 못 다루는 건 당연하다는 얘기를 듣고 해방감을 느꼈다. 그전까지는 내가 기계치인 줄 알았는데, 나에게 무슨 갑작스런 기계에 대한 사랑과 기술이 샘솟았는지 대학원에 다닐 땐 모든 기자재를 잘 다루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래서 대학원 재학 중에 촬영감독으로 많은 작품에 참여했다. 결국 여성들은 대학에서부터 성차별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자신의 능력치를 작은 그릇에 가두게 된다. 나 역시도 나를 작게 가두고 규정하고 검열했던 것 같다. 그건 여성들의 성취를 막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또 하나, 대학 졸업영화제나 독립영화제에 가면 좋은 영화를 만든 여성감독들이 참 많은데, 롤모델로서의 여성감독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명예남성이 되든지, 썅X이 되든지, 사라지든지
-롤모델이 없다는 것, 여성 영화인들의 연대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에 다들 동감하는 분위기다.
김동명_ 엄마가 된 입장에서 선배님들은 육아와 영화를 어떻게 병행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육아를 하면서 영화계와의 단절, 그에 따른 고립감이 크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영화를 찍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 이러한 고민을 먼저 했을 선배 영화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이 없는 것 같다. 공동육아를 하면서 만난 엄마들 중에 시나리오작가가 한분 있는데, 그분이 유명 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여성 시나리오작가의 얘기를 들려준 적 있다. 그 작가의 경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놓고 작업실에 들어가 사이보그처럼 화장실도 안 가고 글만 쓴다더라. 아이가 하원하면 영화 일은 잊고 육아에 전념하고. 그런데 너무 신화화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신화적 존재의 대표 격인 조앤 K. 롤링처럼. 육아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성공한 여성에 대한 정형화된 프레임이 있는데 가끔은 그 때문에 자괴감이 든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다 내 탓 같아서. 30, 40대 여성들의 결혼, 출산 이후의 경력 단절은 중요한 문제이지 않나. 그래서 육아를 하면서 상업영화를 찍은 선배 감독들의 얘기를 좀 듣고 싶더라.
김보라_ 최근 이화여대 사태 때 시위자들의 피켓 중에 ‘언니 왔다’라는 피켓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뜨겁게 뛰었다. 나도 저런 언니가 있었으면 싶었다. 지금 장편영화를 작업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선배 여성감독을 뵙고 싶어서 모 감독님에게 연락을 드려 뵌 적이 있다. 영화계 내 여성들의 롤모델이 없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건 그냥 개인의 성공이다, 네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 기대했던 만남은 아니었다. 비슷한 얘기일 수 있는데, 여성영화제 관계자가 그런 말을 했다. 영화제 뒤풀이 중에서 여성영화제 뒤풀이가 가장 재미없다고. 여성들끼리 연대하는 것을 재미없어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여성에게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20대 때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활동하면서 자매애가 주는 마약 같은 행복을 누렸다. 영화판에서도 그런 걸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계의 권력은 남성들이 쥐고 있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남성 권력에 기대야 하는 경우가 많다. 끌어주고 당겨줄 여자 선배가 있으면 좋겠는데.
마민지_ 계속 영화를 하려면 명예남성이 되든지, 썅X이 되든지, 사라지든지 답은 셋 중 하나라는 얘기를 동료 감독들과 종종 한다. (웃음) 한번은 다큐멘터리하는 분들과의 편안한 술자리에서 선배 언니가 “마민지 감독, 술 안 따르고 뭐해” 그러더라. 남자 선배들의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내가 이러려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됐나 하는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썅X이 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내가 한심스러웠다.
-여성감독을 범주화하는 문제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김보라_ 대학원을 졸업하고 2011년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 인상 깊었던 풍경 중 하나가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여성들이 가방으로 치마를 가리고 걸어가는 거였다. 맥락을 찾아보니 이게 다 몰카 때문이더라. 몰카 문화가 확산되면서 여성들이 자기 몸을 사수 중인 거였다. 내겐 너무도 살풍경이었는데, 비슷하게 낯설고 당황스러운 경험을 영화제 GV 때 겪었다. 나는 할 말은 하는 편인데 그런 모습을 본 누군가가 한국에서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조언이라고 하더라. 외모 품평 얘기를 다시 하면, 영화제 때 ‘김보라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스탭들이 ‘미녀감독, 미녀감독’이라고 연호했다. 그게 칭찬이라서 내가 기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결국 여성을 카테고리화하는 것일 뿐이다.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성을 동료로 보지 않고,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여성으로만 환원하는 분위기가 불편하다.
마민지_ 나는 어린 여성으로 규정당하는 일이 많다. 현장에 촬영을 가면 일단 ‘감독’이 아니고 ‘어린 여자애’가 된다. 그래서 쉽게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한번은 재개발 지구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같이 활동하던 사진작가가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더라. 근처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집이 근처이니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빙 둘러가면서 운전하는 동안 계속 성적인 농담을 했다. 너무 공포스러웠다. 이 경험이 내게 큰 충격이었던 건 당시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과 촬영 대상자와의 윤리적인 관계맺기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문에서 이 경험은 결국 삭제했다. 현장에서 같이 활동하는 사람이었는데 감독인 내가 상황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많이 했다. 사실은 내 탓이 아닌데도. 이후 남성들만 있는 공간에 들어가 촬영할 때 젊은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인 나는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집단으로 활동할 때는 괜찮지만 혼자 타지에서 활동할 때는 위험에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문제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또 활동 스케치나 기록 영상 위주의 아르바이트가 자주 들어오는데, 지방촬영을 하러 가면 꼭 아재들이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한다. 술자리에선 계속 성적인 농담을 하고. 그러면 또 혼자 분개해서 부들부들 떤다. 젊은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그들에겐 그저 ‘아가씨’로 인식되는 거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는 2011년부터 성평등위원회를 마련해 매년 성평등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조세영 감독이 성평등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조세영_ 한독협 성평등위원회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있다. 어느 날 성폭력 피해자가 한독협 사무실을 찾아왔다. 가해자는 독립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던 영화웹진 ‘네오이마주’ 편집장이었다. 가해자는 한독협 회원이었고, 영화웹진의 신임 에디터였던 피해자는 한독협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는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매뉴얼도, 위원회도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이지연 한독협 사무국장이 당시 분과장들에게 SOS도 치고 성폭력 관련 공부도 많이 했다. 그렇게 해서 문정현 감독, 신은실 평론가를 주축으로 성평등위원회가 꾸려졌다. 나도 임시위원으로 그 사건을 지켜봤는데 당시 꽤 유명한 독립영화 여성감독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편집장이 그럴 사람이 아니다, 독립영화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분이다, 사과도 했다고 하니 사건을 잘 정리해서 독립영화계가 하나로 뭉치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하셨다. 그분이 워낙 말을 설득력 있게 잘하는 분이어서 잠깐 헛갈릴 뻔했다. (웃음) 다행히 <자, 이제 댄스타임> 공동제작팀이었던 손경화, 강유가람, 박소현 감독이 ‘지금 제정신이냐’, ‘그 말에 넘어가면 어떡하냐’고 해서 금방 정신차렸다. 젠더 문제로 사건을 보지 않고 집단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386세대의 운동방식이다. 그 문화가 독립영화판에 이식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느꼈다. 적어도 성폭력 문제, 성평등 문화와 관련해선 선배 감독들에게 기대지 않아야겠다고. 흥미로운 건 독립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인물들이 남순아 감독과 같은 20대의 젊은 영화인이라는 점이다.
창작자의 윤리의식에 대한 고민
-독립영화계는 이른바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기도 한데, 상업영화 현장과 비교해 얼마나 더 나은 영화적 환경, 영화적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지도 궁금하다.
김보라_ 체감하기엔 별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이번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에서 강백수 밴드의 노래가 문제되지 않았나. 예정된 선곡 리스트엔 없던 곡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만약 김태희랑 사귄다면 김태희 데리고 술 사먹을 거야’(<아이 해브 어 드림>)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데리고’라는 단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의 인디밴드 가사들에 종종 빈곤층의 화자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중식이 밴드의 <야동을 보다가> 역시 마찬가지였고. 독립영화도 비슷하다. 자신을 약자의 위치로 규정하는 남성들이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화풀이의 도구로 삼거나 억눌러도 좋은 대상처럼 생각한다. 나아가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포지션만으로 자신이 진보적이라 착각하는 이들도 있다.
마민지_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정치적 사안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남성 독립영화인들이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해선 아무 얘기도 꺼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김동명_ 다른 측면의 얘기일 수 있지만, 어쩌면 나도 감독으로서 가해자의 입장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더 나은 영화적 환경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싶다. 단적인 예로 영화를 만들면서 스탭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줘가며 일해본 적이 없다. 창작자로서 예술을 면죄부 삼으려 했던 경우가 있지는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최근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가 논란이 됐는데, 여배우와 합의하지 않은 채 강간 신을 찍었다는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영화를 본 나는 뭘까. 나는 강간의 목격자인가 싶어 섬뜩했다. 이 역시 예술이라는 명목하에 감독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건데, 내가 배우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배우들을 대상화하지는 않았는지. 성평등 교육 역시 중요하지만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의 윤리적 방식에 대해서도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민지_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탄산수 페리에 사건이 문제가 됐다. 여성의 강간살해 장면을 연상케 하는 장면을 보여준 뒤 ‘근데 이거 장난이야, 피해자는 실제 여성이 아니라 레몬이랑 라임이 들어간 페리에 병이야’라며 끝난다. 영상원 영화과 학생들이 만든 영상이다. 배우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에서부터 젠더 감수성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시나리오 디벨로프라고 하면 잘 팔리는 이야기가 뭔지, 장르적인 접근이 뭔지, 연출론에 대한 내용뿐이다. 나 역시도 창작자의 윤리의식에 대한 고민은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우면서 하기 시작했다.
김보라_ 한국의 흥행 영화들을 보면 여성 캐릭터는 주요 인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수라>의 감독님이 자신의 영화에 여성 캐릭터가 없는 이유가 자신은 여자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런 사고가 이해되지 않는다.
김동명_ 여자가 주인공이면 흥행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상업영화에선 뿌리 깊다. 남성은 주연이고 여성은 서브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가 많이 나오게 되면 그걸 보는 관객 역시 은연중에 성차별적 시선을 학습하게 된다.
-흥미로운 단편, 인상적인 독립영화를 만들어 상업영화로 진출하는 남성감독은 많은데 그에 비해 재능 있는 여성감독들의 상업영화 진출은 그만큼 활발하지 못하다는 느낌도 든다.
김보라_ 투자가 쉽게 되는 영화들이 남성 캐릭터 위주의 영화다. 그러니 남성감독들에게 상대적으로 기회가 더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연출부 경험을 하고 현장을 떠나는 여자친구들이 많은데, 거기엔 빈곤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롤모델도 부재하고 네트워킹의 자리도 부재하다. 실제로 술자리로 이루어지는 네트워킹에서 오는 피로가 크다. 한번은 만나보고 싶은 제작사 대표가 있다고 해서 모 감독이 부른 술자리에 나갔다. 가서 보니 신인 여배우가 있었고, 나이 지긋한 제작사 대표와 역시나 나이 많은 감독이 있었다. 이들은 신인배우한테 두 사람 중 누가 더 자신의 취향에 맞냐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마민지_ 아무도 좋을 리가 없잖아. (웃음)
김보라_ 역시나 그 질문이 나한테도 돌아왔다.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다들 저희 삼촌뻘이잖아요” 했더니 분위기가 촤악 가라앉았다. 술자리가 끝날 때쯤, 장편영화 제작을 의뢰하고 싶었던 제작사 대표에게서 그런 얘길 들었다. “보라씨는 너무 막혀 있어. 너무 예민해.” 특히나 그분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선 SNS에 글을 많이 올리던 분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술자리에 가지 않는 건 일종의 네트워킹 손실이다. 하지만 영화판의 네트워킹 구조는 여성 영화인들에게 벅차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창작자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건 내 시나리오일 테고 작업자로서의 태도일 것이다. 물론 좋은 남성 지지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보지 못하는 상황들이 슬프다. <여자, 정혜>(2005)에서 정혜가 신발 가게에서 하는 대사, “인간을 좀 인간답게 대해줬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이 요즘 문화계 내 성폭력 사건들을 보면서 계속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성별을 넘어 우정을 맺고, 인간을 인간으로 사랑하는 건 결국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건데 말이다.
마민지_ 이제 막 상업영화 현장에 들어간 젠더 감수성이 있는 남자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발 붙이고 일하고 싶은데 성적인 농담을 들어야 하고 제작사 대표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경우가 있어서.
조세영_ 목격자 매뉴얼이 없어서 그렇다. 예전에 성평등 교육 강사가 대학에서 강의했을 때의 얘기를 들려줬다. 엠티에서 한 남자가 여자한테 뽀뽀를 했고 여자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는 여자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다. 그럴 때 제3자인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고 학생들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그때 많은 학생들이 남자와 여자가 잘되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얘기했다더라. 우리는 중간자의 위치에 섰을 때, 좋아하는 감정이라든지 인간적인 감정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분명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는데도. 이럴 때 중간자, 목격자의 매뉴얼이 필요하다. 영화현장에서도 수 많은 목격자가 있지만 침묵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지연과 학연으로 엮인 관계망 속 여자와 남자의 기회 불균형
-앞서 마민지 감독이 여성감독으로서 받는 임금 차별에 대해 얘기했다.
마민지_ 영화현장의 상황은 다들 비슷할 것 같은데. 외주 영상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임금 차별을 느낀다. 20대 여성감독들이 받는 금액은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남자감독들을 보면, 아르바이트 한번 하고 나서 새로운 장비를 사고, 차를 샀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알고보니 큰 일들은 우리에게 들어오기 전에 남자 촬영감독들에게 먼저 돌아가더라. 누구는 한달 아르바이트하고 새 장비를 구입하는데 우리는 생활비 버는 것도 힘든 상황이다. 현장에 가면 또 아가씨나 미스 소리를 들어야 하고.
조세영_ 일감은 보통 알음알음 지인을 통해서 받게 되는데, 남자감독들의 친구들은 무슨무슨 장, 어디어디 과장 혹은 팀장, 촬영감독, 국회의원인 반면 내 친구들은 주부다. (웃음) 지연과 학연으로 엮인 관계망 속에서 남성들은 높은 자리를 꿰찬 친구들 덕을 보는 거다.
김동명_ 여성 기술 스탭들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여성 촬영감독의 경우 그 수도 적을뿐더러 진입장벽도 높은 것으로 안다.
마민지_ 심지어 언론사의 사진기자들만 해도 대부분이 남자다. 현장에 촬영하러 가면 여자가 나밖에 없을 때도 많다. 박근혜 탄핵 광화문 집회 때도 촬영을 나갔다. 작업 중인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가 핀란드와 국제 공동제작 중이라 한국에 온 핀란드 편집감독과 함께 광화문에 나갔다. 그 친구가 묻더라. 왜 사진기자들이 전부 남자냐고. 핀란드에선 40~50%는 여자라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영화계 내 성폭력 및 성차별적 문화가 개선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책이 있나. 또 영화감독으로서 앞으로의 작업은 어떤 식으로 이어나갈 계획인지 들려달라.
김보라_ TV시리즈 <트랜스페어런트>로 유명한 방송작가 겸 PD 질 솔로웨이의 마스터클래스가 최근 토론토영화제에서 열렸다. ‘피메일 게이즈(female gaze, 여성적 시선)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의였고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봤다. 질 솔로웨이는, 피메일 게이즈는 윤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고 말했다. 남성적 시선은 어디에나 있어서 진부하지만 여성의 시선은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 결국 영화가 미학적으로 훨씬 풍성해진다는 얘기였다. 또 질 솔로웨이는 피메일 게이즈가 ‘공감하는 카메라’라고 말했다. 나는 올해 나온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다 좋았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트레일러의 캐치프레이즈에 동감하는 바이다. 여성적 시선은 남성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로서 다른 시선, 새로운 시선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않나. 그 연장선에서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구성에 여성 쿼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들만 걸러지지 않게끔. 미국에는 여성감독의 작품에만 펀딩을 하는 ‘게임 체인저’라는 투자사도 있다. 이처럼 여성 영화인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나 장치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본질을 숨기지 않은 채 영화를 만들고 싶다. 덧붙여 여성들이 스스로에게 권력을 더 많이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부에서 부여한 권력이 아닌 자신의 본질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권력 말이다. 타인의 권력에 기대지 않고 나에게 권력을 부여해서 그 힘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민지_ 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적인 측면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 김보라 감독님이 피메일 게이즈 얘기를 했지만, 다큐멘터리 영역에서의 논의들도 지금까지는 남성 창작자들 위주로 진행되어왔다. 나만 당한 건가, 나만 고민하는 건가 싶어 발언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 창작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됐고, 다큐멘터리 현장에서의 윤리에 대해 여성 창작자들과 더 많은 것을 논의해 논의의 폭을 확장시켰으면 좋겠다. 사실 스스로도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여성이라서 그렇고 아직 장편을 완성하지 않은 신인감독이라서 더 그렇다. 하지만 이왕 이런 자리에 나왔으니 앞으로는 젠더 권력뿐 아니라 위계에 관한 부당함도 용기내서 이야기해야겠다.
조세영_ 영화진흥위원회가 책임감 있게 성폭력 및 성차별 관련 기구를 만들고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씨네21>에도 참 감사하다.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이슈를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책임감 있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는 게 중요하다.
김동명_ 여성 영화인들끼리 연대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면 좋겠다. 여성 스탭들이 만나서 현장의 문제점도 공유하고 여성 영화인으로서의 어려움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한 것 같다. 차기작은 구체화된 것은 없지만, 지금의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에서 주부의 얘기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