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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천명관의 <바톤 핑크> 빌어먹을, 무지하게 덥네
천명관(소설가) 2016-11-09

90년대 초반, 충무로를 기웃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아는 감독이라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유일했고 가장 재밌게 본 영화를 꼽으라면 <황비홍>이나 <원초적 본능> 같은 영화가 고작이었을 것이다(물론 그 영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훌륭하지만!).

<바톤 핑크>는 그즈음 비디오 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한 영화였다.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다보니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구별하는 기준도 없었다. 그저 내가 재밌게 본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 <바톤 핑크>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 트렌치코트에 중절모를 쓴 인물이 등장하는, 즉 마피아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멋진 마피아가 아니라 작가가 등장했다. 그는 총 대신 타자기를 사용했다. 그것도 지질하고 코믹한 이미지에 가까운 배우 존 터투로라니!

보통 사람들에 대한 희곡을 써서 유명해진 핑크는 할리우드로 가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만난다. 독재자 같은 제작자 립닉,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감독 벤 가이슬러, 술주정뱅이 작가 W.P 메이휴, 귓병을 앓고 있는 친절한 이웃 찰리 미도즈….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미스터리했고 이야기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 속에서 주인공 핑크는 늘 난감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음산한 벽지 뒤에선 접착제가 끈적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살인자 문트의 이마 위에 흐르는 땀처럼.

스토리만 따지자만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었고 결말도 분명치 않았다. 그런데도 나의 머릿속엔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 그저 모든 장면이 너무 매혹적이었고 모든 이야기가 투명한 느낌이었다. 살인자 문트가 왜 핑크를 풀어주었는지 그가 건넨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다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설명을 보태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덧 내 안에선 핑크처럼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엔 한번도 무언가를 써본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로부터 몇년 뒤, 시나리오작가가 된 나는 다시 <바톤 핑크>를 보면서 내가 두 등장인물의 삶을 모두 살아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때 나는 더운 여름날 찰리처럼 슈트케이스에 보험 팸플릿을 넣고 땀을 흘리며 공단 거리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시나리오작가가 되었으니 찰리와 핑크의 삶을 다 경험한 셈이었다. 후에 찰리 미도즈가 연쇄살인자로 밝혀졌을 때 그는 살인의 이유가 그들이 가여워서라고 말한다. 그들을 도와준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가 자신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필요하면 이웃이 돼줄게.

찰리는 침대에 묶인 핑크를 풀어주고 홀로 불타는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끝내 자신이 살해한 다른 사람들처럼 핑크를 도와줄 마음이 없는 것인가? 그렇게 연쇄살인자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는 작가의 운명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찰리처럼 살던 나는 핑크의 삶을 살기도 했고 지금은 W.P 메이휴처럼 소설가로 살고 있다. 언젠가는 벤 가이슬러처럼 감독으로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인생은 어차피 우연한 여행 같은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여정 속에서 나의 마음속엔 언제나 친절한 이웃, 찰리의 슬픈 듯 고통에 찬 얼굴이 떠오른다.

빌어먹을, 무지하게 덥네. 가끔은 내 피부를 벗어버리고 싶을 만큼 더워.

천명관 소설가. 장편소설 <고래>(2004), <고령화가족>(2010), <나의 삼촌 브루스 리>(2012) 등을 집필했다.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 <북경반점>(1999), <이웃집 남자>(2009) 등의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최근 신작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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