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로셀리니는 안나 마냐니에게 호기 있게 약속을 하나 했다. “다음 영화는 너의 경력에서 분수령이 될 거야.” 마냐니와 함께 <사랑>(1948)을 찍은 뒤였다. 그는 다음 영화가 화산섬에서 촬영될 거라는 아이디어만 밝혔다. 황무지에 가까운 척박한 땅, 외지인에 대한 폭력적 배타주의, 문명과 먼 원시적인 일상 등이 화산섬의 특성인데, 로셀리니는 바로 그것이 전후 패전국 이탈리아의 현실이라고 봤다. 마냐니는 그 섬을 배경으로 배타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주인공을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역은 마냐니에게 가지 못했다. 알다시피 잉그리드 버그먼이 로셀리니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 때문이다. 로셀리니는 자신과 영화를 함께 만들고 싶다는 할리우드 스타의 편지를 받자마자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 역은 버그먼에게 돌아갔다. 로셀리니와 버그먼이 찍기로 한 화산섬이 바로 스트롬볼리이고, 걸작 <스트롬볼리>(1950)는 그렇게 탄생했다.
로셀리니와 버그먼, 스트롬볼리에 가다
잉그리드 버그먼은 유명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에 발탁돼 1939년 스웨덴에서 할리우드로 갔다. 곧바로 스타가 됐고, 대작영화의 히로인이 됐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대중의 스타는 달리 보자면 제작자의 인형에 가까웠다. 대자본의 중심에 있는 스타로선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한데, 버그먼은 배우로서 꿈꿨던 자유, 예술, 모험 등의 가치와는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그때 본 영화가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와 <전화의 저편>(1946)이었다. 영화가 예술일 수 있는 걸 확인했고, 무엇보다 스크린 뒤 제작환경의 자유와 모험이 느껴졌다. 당시에 버그먼은 셀즈닉 제작,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1945) 그리고 하워드 휴스 제작, 히치콕 감독의 <오명>(1946) 등으로 할리우드의 별이 됐을 때다. 그런데 버그먼은 제작자의 더 많은 요구에 부응해야 했다. 스트레스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버그먼은 <오명>의 주인공처럼 위험할 정도로 술을 마셔댔고, 할리우드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럽으로 돌아가서 예술영화를 찍을 거야.” 당시에 버그먼이 자주 했던 말이다.
로셀리니와 버그먼은 1949년 4월4일 스트롬볼리에 도착했다. 여전히 화산 활동이 일어나던 섬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벽지였다. 길에는 먼지가 풀풀 일고, 지중해의 태양은 너무 뜨거워 일을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로셀리니와 버그먼은 새 영화에 대한 기대로 꿈에 부풀었다. 인구 400명 정도 되는 섬 주민 가운데 대부분이 영화제작에 참여했다. 제작팀의 짐도 옮기고, 고기도 잡고, 아이들은 수영도 하고, 또 엑스트라도 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건너온 구름 같이 많은 기자들이 있었다. 현장 분위기는 버그먼이 기대한 대로 자유가 있고, 또 매일 도전해야 할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로셀리니가 화산섬 스트롬볼리를 선택한 이유는 이탈리아의 배타적인 지역주의를 성찰하기 위해서였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전통에만 얽매여 있는 협량한 시각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미국에 갔을 때, 새뮤얼 골드윈(MGM), 하워드 휴스(RKO) 등 소위 ‘할리우드의 타이쿤(제작 거물)’들을 만나면서 배타주의는 불행하게도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쟁이 새겨놓은 세상의 일반적인 악덕임을 확인했다. 배타주의의 극복이라는 테마는 전세계에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였다. 로셀리니는 자신의 제작방식(그 유명한 스크립트 없이 즉흥에 의존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제작자들과 다퉜고, 제작자들은 할리우드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로셀리니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다(스크립트에 따른 일정에서 제작비용이 산출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로셀리니는 지독한 배타주의에 시달렸다. 타이쿤들은 로셀리니를 ‘이탈리아의 사기꾼’으로 취급했다. 이에 맞서 로셀리니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영화를 “공장에서 만들어진 통조림 소시지”라고 비판하면서 결국 제작자들과 틀어지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잉그리드 버그먼을 연모하던 RKO 제작자 하워드 휴스가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이면서 겨우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휴스는 오직 버그먼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투자를 했지 ‘이탈리아 남자’ 로셀리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불카노> 화산섬의 배타주의와 맞서는 인물로 안나 마냐니가 나왔다.
로셀리니와 할리우드 제작 거물들과의 설전
스트롬볼리는 시칠리아 주변에 있는 화산섬이다. 시칠리아의 북단에는 8개의 작은 화산섬들이 있고, 이를 묶어 ‘에올리에 제도’라고 부른다. 인구 1만명 정도 되고 제도의 가운데 있는 리파리(Lipari) 섬이 가장 크고, 서쪽 끝의 주민 120명 정도 되는 알리쿠디(Alicudi) 섬이 가장 작다. 스트롬볼리는 이 섬들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무명에 가까웠던 이 섬들이 주목받게 된 데는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리투아니아 출신 전쟁난민 카린(잉그리드 버그먼)은 오로지 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한다. 그런데 그 남자의 집이 스트롬볼리이고, 카린은 생각지도 않았던 화산섬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카린은 화산섬의 ‘원시적인 환경’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고, 게다가 대부분이 어민들인 이곳 주민들의 지독한 배타주의에 시달린다. 금발에 북유럽 여성 특유의 자유분방한 태도 자체가 주민들에겐 경멸의 대상이다. 카린은 2차대전 중 나치 장교와의 관계 때문에 수용소에 감금됐는데, 나치와의 관계와는 별도로 매춘 혐의도 받고 있다. 카린이 스트롬볼리의 남자들과, 특히 교회의 신부와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을 하는 태도는 그의 과거 행적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자유를 찾아 이탈리아에 남았는데, 화산섬 스트롬볼리는 마치 수용소처럼 카린을 구속하고, 결국 그녀는 탈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는 자유를 억압하는 수용소의 은유인 셈이다. 섬은 멀리서 보면 시커먼 삼각형처럼 생겼다. 견고하고 검은 삼각형의 돌섬, 처음에 카린은 그곳에서 절망했는데, 어떡하든 저항하고 벗어나려고 온 힘을 쏟는다. 탈출을 시도할 때, 화산의 정상 부근에서 뜨거운 검은 흙을 헤쳐나가며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카린의 모습은 절망을 넘어서려는 왜소한 인간의 간절한 몸짓으로 보인다. 카린이 스트롬볼리라는 ‘감옥’을 벗어날지 영화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전하는 태도 자체를 찬양의 대상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에는 종교적인 숭고함이 그려져 있다. 미국의 비평가 태그 갤러거의 말대로, 카린은 바로크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테레사 성녀의 엑스터시> 속 성녀처럼, ‘은총’을 받은 여성의 몸짓을 하고 있다.
한편 로셀리니로부터 ‘버림받은’ 안나 마냐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의 동시에 스트롬볼리 옆에 있는 불카노(Vulcano) 섬에서 역시 화산섬의 배타주의에 맞서는 강인한 여성 역을 연기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는 이런 상황을 마냐니의 로셀리니에 대한 ‘전쟁’으로 봤다. 영화 <불카노>(1950)는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두 진영의 경쟁적인 영화제작 덕분에 스트롬볼리를 포함한 ‘에올리에 제도’는 단번에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베스트 오브 유스> 뒤로 스트롬볼리의 화산섬이 보인다. 오른쪽은 주인공인 루이지 로 카시오.
난니 모레티가 다시 찾은 스트롬볼리
난니 모레티는 1993년 마치 일기를 쓰듯 대단히 사적인 작품인 <나의 즐거운 일기>를 발표한다. 세개의 에피소드 모음인데, <베스파> <섬들> <의사들>이란 소제목을 달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섬들>의 배경이 바로 시칠리아 북단의 에올리에 제도이다.
모레티는 시나리오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리파리 섬에 살고 있는 친구 집을 방문한다. 친구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전공 학자이고, 최근 30년간 TV를 보지 않을 정도로 문명과는 거리를 둔 인물이다. 조용한 섬, 학자 친구, TV가 없는 공간, 이 정도면 왠지 글쓰기가 제대로 진척될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모레티의 팬이라면 짐작하겠지만 사정은 영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조용할 것 같은 리파리 섬은 관광객에게 점령당해 도로에는 차들이 넘치고, 클랙슨 소리는 밤에도 빵빵거린다. 모레티는 친구와 함께 도망치듯 리파리를 떠난다. 그러면서 두 남자의 ‘에올리에 제도’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이 방문한 세 번째 섬이 바로 스트롬볼리다. 모레티답게 여기서의 이야기는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를 일부 패러디하고 있다. 척박했던 스트롬볼리는 로셀리니 덕분인지 어느덧 ‘영화의 섬’이 돼 있다. 시장은 만나자마자 영화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자랑한다. 두 남자가 조용히 머물 집을 직접 알아봐준다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 주민들은 시장을 보면 아예 문을 열어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시장만 ‘영화의 섬’이라는 이미지를 팔아 업적을 쌓으려 하고, 주민들은 그런 허황된 개발 계획이 싫은 것이다. 시장은 섬을 떠나려는 두 남자를 환송할 때도 자신의 영화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바쁘다. “음악은 엔니오 모리코네가 맡을 것이고, 촬영은 대가인 비토리오 스토라로(베르톨루치의 촬영감독)에게 맡길 것입니다. 어때요?” 두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트롬볼리를 떠난다. 원시의 땅에 가까웠던 스트롬볼리는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에 의해 영화사에 남았는데, 이젠 영화가 이곳에서 ‘공해’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스트롬볼리>의 원시적 공간, <나의 즐거운 일기>의 허황된 공간을 넘어, 스트롬볼리가 이탈리아의 고향처럼 묘사된 것은 마르코 툴리오 조르다나 감독의 <베스트 오브 유스>(2003)를 통해서다. 조르다나는 로셀리니의 흠모자로서 리얼리즘 계보의 적자로 평가받는 감독이다. <베스트 오브 유스>는 베르톨루치의 <1900>(1976)을 의식하여, 20세기 후반의 이탈리아 현대사를 그린 6시간짜리 대작이다(베르톨루치의 작품은 20세기 전반부의 역사극이다). 소위 ‘68세대’가 주인공인데, 이들이 1970년대 ‘테러의 정치시대’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굴곡진 역사가 펼쳐진다.
의사인 니콜라(루이지 로 카시오)의 아내는 정치테러집단인 ‘붉은 여단’의 멤버가 되면서 가족이라는 세속과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의 형은 가족의 기대와 달리 갑자기 진압경찰이 되고, 그러면서 역시 가족과 점점 멀어진다. 니콜라는 극좌(아내)와 극우(형) 사이에서, 가족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는다. 형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가족들은 그의 변화에 놀라면서 걱정하고, 그러던 중 형이 충동적으로 자살하면서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한다. 10년이 지난 뒤, 니콜라는 형의 유복자가 살아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는다. 그가 어머니를 모시고, 형의 아들을 보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바로 스트롬볼리다.
스트롬볼리는 해변의 하얀 집들, 화산섬 기슭의 나무들, 맑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상상 속의 고향’처럼 평화롭게 표현돼 있다. 형은 죽기 전에 연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유복자와 함께 이곳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자를 통해 죽은 큰아들의 모습을 본다. 큰아들은 문학을 전공하던 순진한 청년이었는데, 진압경찰이 된 것은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한다. 어머니는 스트롬 볼리에 머물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손자와 함께 스트롬볼리에서 여생을 보내는데, 그 모습은 죽은 아들을 되찾아, 다시 소년이 된 그 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젊은 엄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아드리아나 아스티, 베르톨루치의 <혁명전야>의 주인공)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늘 행복과 슬픔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비거 스플래쉬>, 판테레리아의 난민을 주목하다
에올리에 제도는 시칠리아 북단에 있다. 남단에도 유명한 섬이 세개 있다. 최남단의 람페두사(Lampedusa), 바로 위의 리노사(Linosa), 그리고 튀니지에 더 가깝게 붙어 있는 판테레리아(Pantelleria) 등이다. 세섬 모두 지중해 특유의 아름다움, 특히 아프리카와 가까운 데서 느껴지는 또 다른 이국정서 때문에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런데 2011년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정치민주화 바람이 불고, 또 불행하게도 내전이 벌어지면서 난민들이 급증했는데, 이들이 처음 도착하는 곳이 대개 시칠리아 남단의 바로 이 세섬이다. 다시 말해 먼 과거에는 평범한 어촌이었고, 1960년대 경제발전 이후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 지금은 난민 문제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2011년의 난민과 관련한 문제작이 <테라페르마>(에마누엘레 크리알레세 감독, 2011)이다. 제목은 ‘땅끝’(Terraferma)이라는 의미다. 바다에서 보면 육지의 입구이기도 하다. 장소는 시칠리아 바로 아래에 있는 리노사 섬이다. 인구 400명 정도 되는 조그만 섬이고, 주민들은 이제 대부분 관광업에 종사한다. 일부 노인들이 아직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20살 청년 필리포는 할아버지와 함께 고깃배 작업을 한다. 어느 날, 고기잡이 도중에 뗏목 위에 의지하고 있는 난민들을 만났는데, 접근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해양경찰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들을 구해준다.
난민들은 주로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출신들이다. 필리포 가족은 에리트레아 출신의 임신부와 그의 어린 아들을 집에 숨긴다. 정치적 문제가 아니면 난민들은 대개 본국으로 추방됐는데, 임신부 가족은 불법이주민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수사는 점점 좁혀오고, 필리포는 밤을 이용해 고깃배 속에 난민 가족을 싣고 달린다. 이들이 희망대로, 해양경찰의 경계를 뚫고 육지(테라페르마)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배를 모는 필리포의 긴장되고 단호한 얼굴은 관객의 호응을 끌어낼 만큼 진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밤의 불안한 항해에서 아프리카 현악기의 구슬프고 심장이 뛰는 듯한 빠른 박자의 연주는 필리포의 긴장된 마음을, 그리고 그를 응원하는 관객의 마음까지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베네치아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크리알레세 감독의 부모는 시칠리아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시칠리아와 그 주변에서 주로 영화를 만든다. 자신을 알린 <레스피로>(2002)는 이탈리아 최남단인 람페두사 섬이 배경이다. 그리스의 신화와 신화 같은 종교가 섞여 있는 람페두사 섬에서의 어느 가족의 이야기다.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발레리아 골리노)가 실종됐는데, 온 가족이 그녀를 찾는 과정은 마치 성모 마리아를 간절하게 원하는 신도의 마음처럼 표현하고 있다. 람페두사 섬의 푸른 바다 아래, 성모의 조각처럼 숨어 있는 어머니를 찾는 장면은 서사의 논리를 깨는 감정이입의 압축적인 절정으로 남아 있다(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그랑프리). <레스피로>의 람페두사는 신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비현실의 공간인 것이다.
<레스피로>가 발표될 때만 해도 람페두사에서 난민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인구 6천명인 이곳에 두배가 넘는 난민들이 살고 있다. 2011년 한때는 4만명이 넘는 난민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주민들의 거주환경도 심하게 파괴됐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람페두사 주민들이 <테라페르마>의 그 어부들처럼, 휴머니즘을 발휘하여 섬에 들어오는 모든 난민들을 대부분 받기로 한 점이다(람페두사의 주민들은 최근에 계속하여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고 있다).
최근에 개봉된 루카 구아다니노의 <비거 스플래쉬>(2015)는 튀니지와 가까운 판테레리아 섬이 배경이다. 지중해의 절경으로 유명한 섬이다. 영화는 그 절경을 배경으로 한 심리 드라마다. 그런데 이곳에도 난민 문제는 간접적으로 표현돼 있다. 한쪽에는 휴양지를 찾아온 백인들의 사랑싸움이 있고, 또 한쪽에는 목숨을 걸고 넘어온 유색인들의 생존투쟁이 있다. 그들이 닭장의 닭처럼 ‘취급’되는 모습은 세상의 많은 관객에게 복잡한 감정이 들게 했을 것이다. 난민들의 눈에 낙원처럼 아름다운 판테레리아의 모습은 어떤 인상을 남겼을까?
다음엔 나폴리 부근의 아름다운 바닷가 ‘아말피’(Amalfi) 해안으로 가겠다. 북쪽 제노바 근처의 ‘친퀘테레’(Cinque Terre)와 더불어 이탈리아 최고의 해안으로 꼽힌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인지, 이곳 배경의 영화는 유난히 로맨틱 코미디가 많다. 노먼 주이슨의 <온리 유>(1994) 같은 코미디가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다. 계속하여 바닷가를 여행하겠다(로셀리니 관련 일화는 태그 갤러거가 쓴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모험>(The Adventures of Roberto Rossellini)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