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모든 권력은 실질적인 무력(武力)을 필요로 한다. 첨단의 무기를 재래식 조직인 군대가 운용한다는 사실이 골칫거리다. 유사시 전쟁에 나갈 병력은 실제 전투력보다는 평상시 산출 가능한 수치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너무 많은 인간은 통제하기 어렵다. 권력은 늘 의심이 많고, 대중의 절대적 믿음을 갈구하는 반면 절대로 그들이 대중을 믿지는 않는다. 소수의 엘리트로 구성된 권력은 수하 역시 소수 정예로 두길 원한다. 권력에겐 슈퍼 군인, 인간병기 혹은 암살자가 필요하다. 권력은 언제나 인간을 수단으로, 로봇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국가와 국민이 위험에 처했을 때 조국의 부름(Call of Duty)을 받아 목숨을 걸고 의무를 다하는 숭고한 행위를 삐뚤어진 노예근성으로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권력이 말하는 국가의 안보적 위기가 정말로 국민의 위기인지 아니면 그들 권력의 위기인지 애매한 경우다. 권력이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위협에 대해, 극한으로 도구화된 인간 몇몇이 명령을 받아 음지에서 ‘무명(無名)의 헌신’을 한다. 특수요원, 혹은 스파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우리는 그 존재에게 음모론적인 호기심과 영웅적 환상을 동시에 가진다. 007과 <미션 임파서블> 같은 시리즈를 우파의 정치선전영화라며 보이콧하는 관객은 없으니까. 우리는 극도로 도구화된 인간의 위태로운 모험담을 좋아한다. 역설적으로, 그런 이야기들은 겨우 한낱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기 위해 역시 어떤 수단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잠시 잊게 만든다.

그러나 실재의 세계에서, 영웅도 사람이다.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욕구(Safety Needs)가 애초에 없을 리 없다. 권력이 일회성 도구로 간편히 쓰고 버리기엔 치명적인 약점. 피아(彼我) 이념의 구분이 무색하게도 권력을 잡은 자들이라면 어느 쪽이든,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같은 인간에게 서슴지 않고 자행한 세뇌(洗腦, Brainwash)의 역사가 있다.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쳐 오늘날까지 나치와 중공군과 미 중앙정보국 등등이 실험하고 실제로 운용한 정신 조종의 사례는 첩보물의 단골 설정과 뻔한 플롯이 되기 이전에 이미 현실이었다. 게다가 이 ‘뇌 씻기기’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종교와 사상의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은 그들만의 진리는 이쪽의 영웅이 저쪽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결과로 간단하게 뒤집어진다. 인간성을 씻겨버린 근본주의는 세계와 그 안에 사는 무고한 개인들을 위협한다. 스스로를 맹신한 권력이 인간을 수단으로, 로봇으로 만들려 한 결과는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이다.

존 프랑켄하이머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1962)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포로로 붙잡힌 미군이 공산주에 세뇌당했던 실제 사례를 소재로 한다. 전쟁 중 실종되었다 돌아온 레이먼드 쇼 (로렌스 하비)는 나머지 생존 부대원들의 한결같이 똑같은 증언에 따라 전우들을 구한 공으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는다. 레이먼드의 어머니(안젤라 랜스베리)는 “여기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선동하는 우파 상원의원인 새 남편을 다가오는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당선시킬 야망으로 자신의 아들을 선전과 또 다른 일에 이용한다. 실종 당시 레이먼드의 상관이었던 벤 마르코 대위(프랭크 시내트라)는 매일 밤 기이한 악몽에 시달리며 레이먼드에 대한 의심을 품는데, 그의 꿈속의 레이먼드는 영웅이 아니라 전우들을 죽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레이먼드에게 심어놓은 암시가 어머니의 억압에 대한 잠재의식과 맞물리면서 정치 스릴러 이면에 인간관계와 심리를 촘촘히 심어놓은 것도 재미있지만, ‘공산주의=만악의 근원’이었던 시대 인식에 머물지 않고 매카시즘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지금 시각으로 보아도 세련된 뒤틀기를 선보이는 결말은 이 작품이 위대한 고전임을 증명한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여기 불순 세력이 있다!”고 외치는 집단이 사실은 진짜 그쪽 세력이 아닐까 의심하고픈 현재의 대한민국 관객에게도 정확히 먹히는 반전이다. 자신이 조종당해 괴물이 된 것을 깨달은 레이먼드의 최후 암살 임무 이후, 마르코 대위는 손에 전사자 명단이 적힌 ‘미군의 역사’ 책을 들고서 기록에 남길 수 없는 레이먼드의 마지막 공적을 대신 읊은 후 “젠장”(Hell)이라 내뱉는다. 그 내뱉음은 기이한 현실이 되어 다음해인 63년, 존 F. 케네디는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조너선 드미의 리메이크 <맨츄리안 켄디데이트>(2004)는 이념의 대결이었던 전작의 한국전을 철저한 경제논리가 작용한 새로운 전쟁, 걸프전으로 바꾸어놓는다. 원작의 시대에 주적이었던 공산주의는 실질적으로 소멸한 지 오래지만, 우리가 믿는 민주주의는 정치와 권력과 그래서 경제 독점을 노리는 부자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개인이 소유하고 조종하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세뇌당한 입후보자를 내세우려는 흑막은 이제 적국도 이념도 아닌, 미국 정부와 연계하여 전쟁으로 이득을 보며 사모펀드를 굴리는 다국적 기업 ‘맨츄리안 글로벌’이다. 이 영화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허황된 음모론이 정치 스릴러에 어울리느냐는 물음이었던 모양이지만, 9•11과 이라크전과 이후의 세계를 목격한 지금, 음모론은 현실이 되었다. 작금의 슈퍼 부자들은 영화에서처럼 누군가를 세뇌하거나, 현실에서 저택이나 요트를 여러 채 사듯이 정치인을 매수하는 대신, 이제 직접 대통령선거 후보로 나와 대중을 선동한다. 조너선 드미가 DVD 부록에서 한 말마따나 “우리의 유일한 경쟁자는 현실”이었다.

두 작품이 40년이 넘는 시차를 두고서 당대의 현실을 지적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중간에 세뇌나 약물 실험 등 권력의 인간 도구화를 소재와 주제로 다루는 숱한 영화들이 있었다. 그저 인간 병 기나 슈퍼 스파이가 나와서 활약했던 대다수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에이드리언 라인의 <야곱의 사다리>(1990)와 리처드 도너의 <컨스피러시>(1997)가 기억에 남는다. 바람둥이 제임스 본드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 람보, 또는 <유니버셜 솔저>(1992) 같은 인조인간 좀비 수준에 머무르던 스파이, 암살자, 슈퍼 군인의 육체 액션 장르에서 마침내 어떤 성찰에 도달한 것이 바로, 2002년에 시작된 ‘본’ 시리즈였다.

<본 얼티메이텀>

본 시리즈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본 슈프리머시>(2004)일 것이다. 영화는 굳이 안 가도 되었을 결말에 끝내 본이 스스로 도착 하도록 만든다. 피해자가 기억도 못하는 진실을 애써 밝히는 본의 행동은 결코 남성적 허세나 죄인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한 괴물의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한 처절한 갈구였다. 괴물 제이슨 본은 그가 권력의 암살자로서 한 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인간 데이비드 웹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이 비록 비열한 범죄라고 할지라도, 내가 한 일이 곧 나 자신이다. 사실 도구에게는 죄가 없다. 마블 슈퍼히어로의 세계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윈터 솔져를 감싸며 하는 유명한 대사는 “당신은 지금 방아쇠를 당긴 인간이 아닌 총에게 책임을 묻고 있어”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사용해주길 기다리는 장전된 무기로서의 인간, 권력의 도구로서 군인인 자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탈한 요원, 제이슨 본은 굳이 자신이 도구였음에 대한 속죄를 한다. 그도 고문당하고 세뇌당한 피해자이지만, 암살자 양성 프로젝트에 자원했고 그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본은 희생자의 딸 앞에서 진실을 담담히 밝히고 “미안하다” (Sorry)고 한마디를 남긴 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절뚝이며 순백의 눈길 위를 성큼성큼 걸어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또한 본 시리즈가 장르의 세계에서 유독 빛났던 점 중 하나는 시리즈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인물은 바로 트레드스톤의 일원이었던 니키 파슨스(줄리아 스타일스)다. 사실 니키는 슈퍼히어로인 본의 무자비한 모험에 마리(프란카 포텐테)를 대신하여 인간성을 부여하는 인물이었다. 시리즈에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본 얼티메이텀>(2007)인 이유 역시 오로지 그녀 때문이다. 내게 본 시리즈 전체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 것은 슈퍼히어로 본의 시종일관 열 받은 무뚝뚝한 표정이 아니라, 3편의 결말에서 니키 파슨스가 보여준 백만불짜리 미소였다. 권력의 수단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맞서 자신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한 개인의 미소. 거기서 딱, 모비의 <Extreme Ways>를 튼 지점은 정말로 완벽하지 않았나? 그래서 나는 돌아온 <제이슨 본>(2016)을 용서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