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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짓느라 얻은 빚 때문에 이사 수십번 다녔어”
2002-03-29

영화 흥행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기 수차례, 대화재로 옷 3천벌 잃어버리기도

영화 <토지>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 위해 파나마영화제에 참석했던 김지미가 의상상을 대신 수상했다는 소식은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섭섭했어. 그땐 스탭 관련 시상은 감독이나 배우가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어. 상을 탔다는 소식만 듣고 상은 구경도 못했다는 스탭들도 있었고. <토지>의 의상상도 결국 김지미가 받았다는 것만 알았지, 뒤에 아무 말이나 보상도 없더라고. 하긴 국내 영화제만 해도 스탭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 게 최근의 일인데.

그것보다 더 힘빠지는 경우는 주연급 배우 의상만 몇벌 만든 이가 의상부 대표로 상을 받을 때야. <사의 찬미>(1991)와 <금홍아 금홍아>(1995)는 대종상 의상상을 수상한 작품이지만 나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 장미희와 이지은에겐 전속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그이들이 수상자가 됐거든. 온갖 엑스트라와 다른 주조연들 옷들은 내가 다 지었지만, 다 소용없더라구. 상을 타야 공이 인정되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해봐야…’란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꼭 힘빠지는 경우만 있었던 건 아냐. 1977년 변강문 감독과 <난중일기>를 찍으면서 의상일에 대한 참된 자부심도 느꼈으니까. 이순신 장군이 입었다는 갑옷을 지을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일단 참고할 견본이 없다는 거야. 어떻게든 이순신 동상을 참조해 그럭저럭 모양을 흉내내긴 했는데, 이번엔 입체감이 잘 살지 않는 거야. 그래서 급히 프레스 공장을 찾아가서 갑옷에 달 쇠미늘을 차례로 오린 뒤 한장한장 두드려 볼록한 모양이 나오게 가공했지. 그리고 양옆에 구멍을 뚫어 실로 엮으니 척 모양이 나오는 거야. 그땐 낚싯줄 같은 나일론줄이 없어서 그냥 무명실을 여러 줄 겹쳐 썼기 때문에 한컷 찍고나면 날카로운 비늘 가장자리에 실들이 뚝뚝 끊어져버려 다시 달아야 했어. 그러면 현장 한켠에 앉아 추운 바람을 피하느라 한벌은 입은 채로 다른 한벌은 바느질을 하곤 했지. 지금 영화 의상 연구하는 이들이 그때 갑옷의 섬세함과 정교함을 높이 평가해주면 뿌듯한 마음이 들어.

80년대 들어 나에게도 영화를 보는 눈이 생겼달까. 단순히 흥행이 될 만한 영화를 고르는 게 아니라 작품다운 작품을 찍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어. 돈만 주면 아무 영화나 찍던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남는’ 영화에 관심이 생긴 거지. 하지만 작품이 좋아도 흥행이 보장되기란 힘들었어. 같이 일한 영화사가 엎어지면 돈만 못 받는 게 아냐. 간혹 빚이라도 얻어 의상을 지었으면 빚쟁이한테 쫓기기도 했어. 그러면서 이사도 수십번 했고. 63년 인현동에서 혜화동으로,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의정부로 이사를 갔다가 1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어. 그때 따라다니던 두 아들녀석이 이사라면 치를 떨었지. 쓸 만한 가구부터 냉장고며 다 버리고 재봉틀 하나만 겨우 챙겼으니까. 73년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 기념 작품으로 <이순신>을 준비하면서 돈이 좀 모여서 충무로에 살 집을 구했지. 그러고 쭉 살다가 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뚝섬에다 의상 창고를 얻었어. 창고를 얻을 당시 소품부와 특수효과부의 힘을 빌려 마련한 터라 창고 안에는 의상뿐만 아니라 각종 소품, 특수효과에 쓰일 재료까지 산더미였어.

그렇게 2, 3년이 흘렀을까. 그런데 그만 소품부의 관리 허술로 창고에 있던 폭탄에 불이 붙은 거야. 그게 82년의 일이었어. 이전에도 의상 창고에 화재가 두어번 났지만, 뚝섬에 창고를 얻은 직후인 82년만큼 큰 화재는 없었어. 얼마나 심하게 타들어가던지 불끄러 온 소방서 사람들이 “뭐가 이렇게 오래 타?” 하고 짜증을 낼 정도였어. 아마 3천여벌 정도가 불에 타서 없어졌을 거야. 지은 의상뿐 아니라 실물(관복, 도복을 비롯한)도 없어지고, 인민군, 일본군, 한국군 할 것 없이 각각 500명 정도가 완전군장 할 수 있는 군복들과 3천여명의 엑스트라가 아래위로 차려입을 수 있는 모든 옷들이 소실됐지. <춘향전>과 <성춘향> 때의 의상부터 <난중일기>의 갑옷까지 모두 한줌의 재가 돼버렸어.

의상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계획도 있었거든. 연구가치가 있는 몇벌은 대학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회갑 때쯤 의상박물관을 하나 지어 전시를 할까 하는 생각 말야. 근데 큰 화재를 몇번 겪으면서 의욕이 사라지더라구. 이후에도 의상 모으는 일은 계속됐는데, 다시 모인 옷 중 1만여벌은 현재 양수리 종합촬영소에, 1만여벌은 경기도 백동에 있는 우리집 창고에 보관중이야. 아직도 뜻맞는 이만 있다면 창고를 늘려서라도 의상 모으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 박물관 여는 일도 마찬가지구.

구술 이해윤/ 1925년생·<단종애사> <성춘향>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