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리>의 프로치다 섬 시내 장면. <일 포스티노>를 오마주한 것이다.
장 뤽 고다르는 <경멸>(1963)을 준비하며, 두 가지의 새로운 경험을 기대했다. 먼저 프랑스 최고 스타였던 브리지트 바르도와 협업하는 것이며, 미국의 제작자를 통해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두개의 소망은 모두 실현됐다. 그런데 작업과정은 고통과 이에 따른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브리지트 바르도도, 미국의 제작자 조셉 레바인(대표작은 <졸업>(1967))도 고다르의 새로운 미학을 이해하지 않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미국인 제작자 역할을 맡은 잭 팰런스는 아예 말도 건네지 않았다. 고다르는 스타와 제작자로부터 거의 외면당한 채 촬영을 진행했다. <경멸>의 주요 무대는 로마와 나폴리 앞의 카프리 섬이다. 촬영 당시의 현장 분위기 때문인지, 아름답기로 소문난 카프리 섬도 고다르의 영화에선 ‘이방인의 태양처럼’ 고독하고, 부조리해 보였다.
카프리에서 겪은 고다르의 외로움
<경멸>은 이탈리아의 유명 소설가인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동명 원작(1954)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식인으로 여기는 연극 작가가 오직 돈 때문에, 경멸하는 상업영화 제작자와 함께 일하고, 역시 경멸하는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다. 작가가 원치 않은 일을 맡은 것은 그 돈이 있어야 아내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요 무대도 로마와 카프리 섬이다. 각색에서의 조그만 변화라면 영화 <경멸>은 이탈리아인 등장인물들을 다른 나라 사람들로 바꾼 것이다. 작가(미셸 피콜리)와 그의 아내(브리지트 바르도)는 프랑스인, 제작자(잭 팰런스)는 미국인으로 설정했다. 잭 팰런스가 고다르와 말도 섞지 않은 첫째 이유는, 자신도 제작자들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지만 대놓고 미국인 제작자를 멍청이처럼 묘사한 데 동의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자신이 ‘바보 같은’ 그 역을 맡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는 처음과 달리 많이 변해 있었다.
바르도도 팰런스 정도는 아니지만, 고다르와 거리를 두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고다르 스타일의 영화 만들기, 특히 배우에게 연기 지침을 내리지 않고 현장의 즉흥성을 강조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이해한들 동의하지도 않았다. 알다시피 당시의 고다르는 ‘로셀리니주의자’였다. 전통적인 연기와 제작 환경에 익숙한 두 배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현장에 적응하지 못했다. 감독과 배우 사이의 냉랭한 관계는 결국 촬영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팰런스는 가능한 한 감독과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경멸>에서 미국인 제작자가 준비 중인 영화는 <오디세이>이다. 그런데 제작자에 따르면 작가의식이 강한 감독(프리츠 랑)은 영화를 예술로만 고집하는 것 같다. 제작자에겐 주인공 율리시스와 아내 페넬로페의 사랑과 불륜이 더 흥미롭고, 그리스신화 속 요정들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더 매력적이었다. 지중해의 비취색 바닷속을 수영하는 요정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상상해보라. 제작자 는 촬영 중에 시나리오를 변경하기 위해 작가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변경된 내용을 찍기 위해 제작팀이 찾아간 곳이 바로 나폴리 앞의 카프리 섬이다.
말 그대로 비취색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며 카프리 시퀀스가 시작된다. 직접 조감독 역을 맡은 장 뤽 고다르가 배 위에서 배우와 스탭들에게 촬영을 준비시키고, 감독 역을 맡은 프리츠 랑이 ‘액션’을 지시하는 현장의 분주한 상황으로 카프리 시퀀스가 열린다. <경멸>의 카프리에서, 바다 위의 영화 현장만큼 비중 있게 찍힌 것이 제작자의 아름다운 빌라다. 이곳에서 제작자는 작가의 아내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고, 작가는 그런 불편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한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의 당당하지 못한 태도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처음엔 거부하던 제작자의 접근을 점점 더 용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삼각관계가 진행되는 제작자의 별장은, 그 관계처럼 삼각형 비슷하게 생긴 ‘말라파르테 빌라’(Villa Malaparte)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포스터에 소개된 바로 그 빌라로, 계단이 테라스 형식의 지붕까지 연결된 특이한 건물이다. 포스터에선 작가로 출연한 미셸 피콜리가 계단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고 있다.
<일 포스티노>의 우편배달부인 마시모 트로이지(왼쪽)와 시인 역의 필립 누아레.
고다르, 카프리, 말라파르테
사람을 흥분시키는 푸르고 투명한 바다와 동화 같은 빌라가 등장하지만, <경멸> 속 카프리 시퀀스는 마치 건조한 사막처럼 찍혔다. 감독과 배우들 사이의 냉랭한 관계가 스크린 속에 그대로 새겨져 있는 셈이다. 바르도는 감정이 죽은 인형 같고, 팰런스의 표정에는 싫은 역을 억지로 하는 지겨움 같은 것도 느껴진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고다르의 계획이 성공한 셈이다. <경멸>은 스토리를 강조한 전통적인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속성을 천착한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경멸>은 ‘자기 반영성’ 테마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자기 반영성의 특징인 영화 만들기 과정이 드러남으로써 당시 배우들이 어떤 감정 상태로 현장에 적응하는지를 상상할 수 있는 장면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경멸>의 카프리는 절경의 섬이기보다는 관계의 파괴에서 느껴지는 고립과 단절의 외로운 공간으로 강하게 남아 있다.
투명한 바다, 푸른 언덕, 그리고 그 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하얀집’(카사 비앙카)들로 유명한 카프리는 로마시대부터 사랑받은 섬이다. 특히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황제가 이곳에 사원과 별장, 그리고 정원들을 건설하면서 카프리 섬은 귀족들의 대표적인 휴양지가 된다. 지금도 그런 성격은 계승 돼 유럽의 부호들, 유명인들의 여름 방문지로 명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조그만 섬 안에 세계의 명품점들이 많이 들어와 있고, 물가도 높은 편이다. 섬 곳곳에 아름다운 집들, 역사적으로 유명한 저택들이 있어, 그런 건축물들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다보면 몽롱한 기분마저 든다. 그만큼 자연풍광뿐 아니라, 집들, 골목길들이 모두 예술품처럼 아름답다.
<경멸> 속의 ‘말라파르테 빌라’는 이탈리아의 20세기 소설가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의 별장이었다. 밀란 쿤데라가 예술비평 에세이집인 <만남>(2009)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한 작가다. 말라파르테는 원래 기자 출신의 리얼리즘 계열 작가였는데, 파시즘 시절 세상의 부조리를 풍자한 <망가진 세계>(1944) 같은 작품으로 명성을 떨친다. 지옥 같은 세상을 묘사한 그의 스타일에서 쿤데라는 카프카의 악몽을, 또 마르케스의 환상을 읽고, 그래서 말라파르테를 20세기 모더니즘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꼽는다. 스토리 전달을 우선시하는 전통적인 소설이 아니라, 관습 파괴의 형식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말라파르테는 고다르의 미학과도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말라파르테는 1957년 죽었고, <경멸>을 찍을 때 빌라는 훼손된 채 거의 방치돼 있었다. 고다르가 이곳을 촬영지로 잡은 데는 작가에 대한 사적인 흠모가 작동했을 것이다. <경멸> 덕분에 버려져 있던 ‘말라파르테 빌라’는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모더니스트 말라파르테가 재조명되는 데도 고다르의 <경멸>이 한몫했을 것이다.
<태양은 가득히> 이스키아 섬 주변의 바다. 알랭 들롱.
<일 포스티노>, 프로치다 섬의 순수와 야만
2차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네오리얼리즘이 나왔을 때, 문학에선 일찍이 이 열풍이 시작됐었다. 네오리얼리즘 문학의 대표 작가가 <경멸>의 알베르토 모라비아이다. <경멸>뿐 아니라 비토리오 데시카의 <두 여인>(1960),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1970) 등 유난히 영화로 각색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는 방증일 테다. 그의 아내인 엘사 모란테도 소설가인데, 모라비아 못지않은 명성과 사랑을 누렸다. 어찌 보면 남편은 전후 이탈리아 문학사의 주인공이었고, 모란테는 독자들의 주인공일 것 같다. 모라비아는 공적인 면에서, 모란테는 사적인 면에서 더욱 사랑받은 작가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멕시코의 화가 부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같다. 많은 사람들이 ‘멕시코 벽화운동’의 선구자인 리베라의 미술사적 업적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로의 그림에 더 끌리는 현상과 비슷해서다.
엘사 모란테의 대표작이 카프리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섬, 프로치다(Procida)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아서의 섬>이다(주인공 이름은 ‘아르투로’인데 번역서는 영어식 표기인 ‘아서’를 따랐다). 소년의 성장기 소설이다. 섬에서 고립된 채 자라, 세상에 대해선 거의 무지한 ‘야만의 소년’이 15살에서 16살이 될 때까지의 사랑의 경험을 담았다. 소년은 자기 집에 처음 들어선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데, 하필이면 그녀는 아버지의 새 아내였다. 친모는 소년이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소년은 여성이 없는 집에서 자랐다. 유모도 남자였다(염소젖으로 소년을 키웠다). <아서의 섬>은 이브를 처음 본 아담처럼 순결한 소년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프로치다 섬을 배경으로, 순결한 사랑을 그려 유명한 영화가 바로 <일 포스티노>(감독 마이클 래드퍼드, 1994)이다.
프로치다는 나폴리 바로 앞에 있는 화산섬이고, 그냥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1950년대가 배경인 <일 포스티노>는 마치 휴머니즘의 동화처럼 기억되고 있는데, 사실 이탈리아 문화계 특유의 성격인 공산주의에 대한 아련한 애정이 표현돼 있어, 그냥 만만하게 볼 영화는 결코 아니다. <일 포스티노>는 2차대전 이후 칠레 공산당의 상원의원이자 민중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가 고국에 불어닥친 공산주의자 탄압을 피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도피 생활을 할 때를 배경으로 한 픽션이다. 네루다(필립 누아레)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섬 프로치다로 망명했다. 그곳의 청년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지)는 임시 우편배달부로 고용돼, 시인에게 부쳐진 우편물을 전담하는 임무를 맡는다. 우체국에는 단 한명의 정직원인 우체국장이 있는데, 그도 공산주의자이고, 네루다를 ‘동지’라고 부르며 친근감과 애정을 드러낸다. 마리오도 선거가 있으면 공산당에 투표하는 청년이다.
일기 정도를 끄적거리던 어부의 아들 마리오가 네루다로부터 ‘은유’를 배운 뒤, ‘시’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뜬다. 어떻게 하면 은유를 더 잘 쓸 수 있느냐는 마리오의 질문에 네루다는 프로치다 섬의 해변을 혼자 산책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스크린엔 프로치다의 아름다움이 하나씩 펼쳐지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은 마리오가 고국으로 돌아간 네루다에게 프로치다의 매력을 녹음해서 보내는 장면일 테다. 마리오는 섬의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아버지의 ‘슬픈 그물’ 소리, 교회 종소리, 하늘의 별 소리 등을 녹음한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프로치다 섬이 서정시의 대상이 된 절정의 순간이다.
이곳에서 마치 <아서의 섬>의 소년처럼, 홀아비 아래서 외롭게 성장한 마리오가 베아트리체(마리아 그라치아 쿠치노타)라는 여성을 본 뒤,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네루다와의 우정과 교차되며 강조돼 있다. 마리오는 자신이 베아트리체를 사랑한 단테 같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처럼 영원하고 순결한 사랑을 꿈꾸고 있는 ‘시인’이어서다. 마리오를 연기하는 마시모 트로이지의 눈동자가 어찌나 맑은지, 그가 베아트리체와 있을 때면, 프로치다는 문명에 결코 오염되지 않은 단테의 ‘천국’처럼 보인다. 아마 촬영 중에 트로이지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는 더이상 미래를 염두에 둘 수 없는 배우의 마지막 남은 간절한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오래 심장병을 앓던 트로이지는 당시 나폴리를 대표하는 희극배우이자 감독이었는데, 너무 빠른 죽음(41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죽었다. <일 포스티노>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는 바람에 프로치다는 트로이지의 공간으로 남았다. 그럼으로써 섬의 예술적 주인공은 두명이 됐다. <아서의 섬>의 야만의 소년, 그리고 <일 포스티노>의 순수한 우편배달부가 그들이다. 두 주인공에 의해 ‘숨어 있던 섬’ 프로치다는 오래 기억에 남을 예술적 공간이 됐다.
고다르의 <경멸>에서 말라파르테 빌라의 테라스 지붕. 브리지트 바르도(왼쪽)와 미셸 피콜리.
<태양은 가득히>, 이스키아 섬의 허무를 그리다
나폴리 앞의 세 화산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 ‘이스키아’(Ischia)다. 하지만 크기만 컸지, 작은 섬 카프리에 밀려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로버트 시오드막의 할리우드 모험극인 <진홍의 해적>(1952) 덕분이었다. 카리브 해를 배경으로 버트 랭커스터가 해적 두목으로 나오며, 서커스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 더욱 유명한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 비친 아름다운 바다와 중세풍의 마을이 카리브 해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작은 섬이란 사실이 알려지며, 이스키아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스키아를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낙원 같은 장소로 각인시킨 작품은, 신인 알랭 들롱을 스타로 등극시킨 <태양은 가득히>(감독 르네 클레망, 1960)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스릴러 <재능 있는 리플리>(1955)를 각색했다. 소설 속에서 이탈리아에 있는 허구의 장소로 제시된 ‘몬지벨로’(Mongibello)가 영화에선 대부분 이스키아로 표현됐다. 부잣집 아들 그린리프(모리스 로네)를 샌프란시스코의 집으로 데려오면 그의 부친으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리플리(알랭 들롱)는 이스키아에 왔는데, 그 아들을 만난 뒤 그만 변하기 시작하며 영화는 반전을 맞는다. 하층민 출신인 리플리는 그린리프의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에 매료됐고, 허영에 가까운 일상의 낭비에 혼을 잃어버린다. 언제 이런 사치를 즐겨볼 수 있겠는가. 이스키아의 낙원 같은 풍경, 그런 곳에 있는 그린리프의 아름다운 빌라, 그린리프와 그의 애인인 마지(마리 라포레)의 세련된 매너, 화려한 요트, 비싼 옷들까지, 리플리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어쩌면 <태양은 가득히>는 알랭 들롱의 청춘을 새긴 덕분에 오래 남을 작품이 됐다. 그의 외모가 얼마나 빛났던지 그가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관객은 죄가 밝혀지지 않기를 애타게 빌었을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랭 들롱이 ‘태양이 가득한’ 이스키아의 해변에 길게 누워 있을 때, 곧 불행이 닥치겠지만, 그 순간만은 아름다운 ‘청년’ 알랭 들롱과 ‘푸른’ 바다의 이스키아가 더없이 어울려 보였다.
<태양은 가득히>가 발표된 뒤, 외부인들에겐 무명에 가까웠던 이스키아는 졸지에 유명 장소로 거듭났고,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 부각됐다. 현재 6만명이 사는 이 섬이, 1년에 400만명의 여행객이 찾는 특급 관광지가 된 데는 <태양은 가득히>를 리메이크한 <리플리>(감독 앤서니 밍겔라, 1999)의 영향도 컸다. <리플리>의 주요 배경도 이스키아다. 리플리(맷 데이먼)가 ‘몬지벨로’ 라고 소개된 섬에 막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는 장소는 이스키아의 주요 거점인 ‘이스키아 폰테’(Ischia Ponte)라는 곳이다. 버스 정류장 바로 뒤로 보이는 중세풍의 ‘아라곤 성’(Castello Aragonese)은 이 지역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리플리>에서 이스키아가 아닌 곳에서 찍은 유명한 장면은 ‘몬지벨로’의 시내 모습이다. 이 장면은 프로치다 섬에서 찍었고, <일 포스티노>에 대한 오마주로 시내의 경사진 골목길을 거의 비슷한 화면구도로 잡고 있다.
<리플리>에서의 이스키아도 <태양은 가득히>의 그곳처럼 ‘허영의 불꽃’으로 묘사돼 있다. 일상의 숙제는 지워졌고, 퇴폐와 타락의 단맛을 즐길 수 있는 신화의 공간 같은 곳이다. 그런 기대가 현실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이스키아 시퀀스는 허무의 끝을 자극한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투명한 바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재즈 멜로디, 아름다운 보석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이면 사라질 ‘바니타스’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럴 정도로 영화 속 이스키아는 현실 너머의 공간에 존재하는 꿈처럼 그려져 있다. 이렇듯 이스키아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허무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엔 이탈리아의 남쪽 시칠리아 주변의 작은 섬들로 가겠다. ‘난민의 시대’를 맞아, 이탈리아 최남단 섬인 람페두사는 이제 주민보다 난민이 더 많은 곳으로 변했다. 시칠리아 주변의 화산섬들인 ‘에올리에 제도’까지 포함하여 이 지역의 섬들을 여행하겠다. 난니 모레티의 <나의 즐거운 일기>(1993)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고다르 관련 일화는 <Everything Is Cinema: The Working Life of Jean-Luc Godard>(리처드 브로디 지음)에서 따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