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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게 보여주기보다 제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6-04-21

<시간이탈자> 곽재용 감독

한국영화로는 <무림여대생>(2008) 이후 8년 만의 귀환이다. <시간이탈자>는 곽재용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그동안 일본, 중국을 오가며 해외 프로덕션에 몸담아왔던 그가 선보이는 오랜만의 한국영화다. 순수하고 맑은 인물들과 운명론적인 테마, 즉 ‘곽재용 월드’의 인장 같은 특징들은 여전하지만,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와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최근 한국영화 관객의 눈높이에 맞는 트렌디한 스릴러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야심도 엿보인다. “누구든지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게 최근의 한국영화계”라고 말하는 그는 이 치열한 전장으로의 복귀를 준비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번 작품이 ‘세 번째 데뷔’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했다. 어떤 마음에서 그런 말을 한 건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우선 한국에서 오랜만에 영화를 하는 거잖나. 제작 시스템부터 스탭, 배우들까지 모든 것들이 변해 있더라. 마치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현장을 처음 경험했던 때의 느낌이었다. 가끔 식당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식당은 좋은 레시피 하나를 만들어놓아도 잘될 수 있는데, 영화감독은 영화마다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야 하니 참 고된 것 같다고. 이번 영화를 세 번째 데뷔처럼 생각한다는 말에는 다시 한번 좋은 레시피를 만들어보겠다는 각오의 의미도 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수렴하려 했다. 내가 직접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 다른 작가의 이야기를 각색했다는 점도 새롭다.

-주변에서는 어떤 조언을 많이 하던가.

=아무래도 영화가 올드해질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유명했던 선배 감독이 오랜만에 연출한 신작을 보고 나도 ‘예전의 감성과 변화가 없네. 너무 올드하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우려들을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며 하고 있다는 거다. <엽기적인 그녀>만 해도 15년 전 영화이고, 신파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니 그런 우려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탈자>가 완전히 새로운 곽재용의 영화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유지하면서 최근 영화 트렌드의 재미를 담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한마디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할까. (웃음)

-<시간이탈자>는 1983년의 과거와 2015년의 현재 시점을 오가며 진행되는 영화다. 1983년이라는 연도에 혹시 특별한 의미가 있나.

=처음 시나리오에서는 1986년이 배경이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해였는데,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1983년이 특정 연도를 알려줄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이 일어난 해라고 봤기 때문에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1983년으로 바꿨다.

-실제로 1983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군대에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가족들이 면회를 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군대에서 복귀하라고 난리가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미그기 사건(북한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사건)이었다. 지환(조정석)이 윤정(임수정)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건 그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거다.

-당신의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는 종종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과거에 못다 이룬 인연은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과 같이 현재에 이르러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시간이탈자>도 마찬가지다. 운명론과 윤회의 테마는 곽재용 월드의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운명이 혹시 정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던 사건들이 굉장히 많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날 목욕시키려고 하는데, 어쩐지 그날 따라 다른 곳에서 씻기고 싶었다더라. 그런데 그날 목욕탕 위쪽 지붕이 무너졌다. 정말 기적적인 확률로 살아난 건데, 그런 걸 보면 운명이란 게 있긴 한 것 같다. 내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설정이 자주 등장하는 건 과거에 이루지 못한 것을 현재에서 바꿀 수 있지 않나 하는 희망 때문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재다. 현재를 잘 풀면 과거를 극복할 수 있고, 미래 또한 지금의 현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하는 말이 ‘지금 고생하라’는 거다. 지금의 고생이 나중에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운명론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엽기적인 그녀> <기억이 들린다> 등에 나왔던 타임캡슐이 이번 영화에도 등장하더라. 무언가를 일정 시간 동안 봉인해놓는다는 행위에 매혹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어떤 것을 과거형으로 뒀다가 미래에 다시 꺼내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여기가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던 과거를 발견하는 것 같은 느낌을 타임캡슐이라는 소재가 주는 것 같다. 누군가는 너무 소년적이고 유아적인 생각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차원을 믿는다는 건 사는 데 굉장히 행복감을 준다. 내가 물리학과를 나와서 그런가. (웃음) 어떻게 보면 다른 차원과 시간에 대한 관심은 내세와 윤회가 있다고 믿는 내 종교관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연인이 잔혹하게 살해된다거나 차에 사정없이 치이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동안 곽재용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센’ 이미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스릴러영화이고,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건우(이진욱)와 소은(임수정)의 감정을 쌓아나갈 만한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할수록 안타까움의 감정과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이 더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세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환과 윤정, 건우와 소은의 관계는 당신의 이전 멜로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여전히 순수하고 맑다. 최근 개봉하는 멜로영화들과의 온도차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은 과감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본다. 요즘 다른 로맨스영화들을 보면 ‘밀당’을 즐기는 과정을 재밌게 풀어놓은 작품들이 많더라. 나는 그것보다 사랑 이후에 오는, 둘 사이의 관계에서 극복해나가야 할 여러 가지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 연인을 만나게 되기까지의 과정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부딪혀야 하는 다양한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게 내 영화의 주된 관심사인 것 같다.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의 중요한 의문점들을 일일이 대사로 설명한다는 점은 아쉽다. 굳이 말로 풀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교차편집되고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영화이다보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미스터리적인 재미가 큰 만큼 어쩔 수 없이 설명해줘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봤다. 나름대로는 인물의 감정선을 살리기 위해 내레이션을 마지막 순간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어느덧 충무로의 ‘대’선배 감독이 됐다. 비슷한 시기 활동하던 수많은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고민과 책임감을 느끼나.

=지금의 내 상황이 백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겉에서 보면 잘나가는 감독일지 몰라도, 사실 수면 밑으로는 엄청나게 발질을 하며 영화감독으로서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 영화를 하는 세대가 바뀌고 시스템이 바뀐 지금의 한국영화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인 것 같다. 선배 감독이라고 쉽게 말을 꺼내거나 조언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만 해도 귀를 많이 열고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이든 감독이라고 해서 자기 고집대로만 할 거라는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재능이 여전한데 쉬고 있는 감독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나 역시 ‘네 번째 데뷔작’을 만들려면 치열하게 준비를 해야겠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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