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6부작의 후반에 접어든 tvN 드라마 <시그널>. 장르적 재미를 구축한 김은희 작가의 대본에, 차가운 사건 사이사이, 인간적 온기를 놓치지 않는 김원석 PD의 연출력이 더해지면서 <시그널>은 매회 시청률 10%를 넘나들며 사랑받고 있다. 이제훈은 무전기 하나로 과거 강력계 형사 이재한(조진웅)과 공조수사를 펼치며 미제사건을 파헤치는 프로파일러 박해영을 연기한다. 매 순간 상대 배우와 조우하고 있지만, 촬영장에서는 철저히 혼자 캐릭터를 구축해나가야 하는, 더없이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기다. 이 도전의 시간에 매진해온 배우 이제훈을 만났다. <시그널>의 마지막 촬영을 앞둔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작품에 대한 애정과 만족감으로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시그널>의 반응이 상당하다.
=드라마에 출연한 게 세 번째인데 밖에 나가면 그전과는 반응이 정말 다르다는 걸 많이 느낀다. 사람들이 잘 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니, 사랑받는구나 하고 즉각 느끼게 된다. 16부로는 너무 아쉽고 한 20부까지 했으면 좋겠다. (웃음)
-무전으로만 교신하다 보니 연기할 때는 상대 배우와 합 없이 1인 연기를 전개해야 한다. 욕심나면서도 어렵기도 한 역할이었을 것 같다.
=선배님들이 합류하기 전인 지난해 10월 초부터 먼저 촬영을 시작해 미리 8부까지 내 분량을 찍어두었다. 진웅이 형이 본인 촬영 때 고맙다고, 네가 찍은 거 보면서 했다고 하더라. (웃음) 나는 감독님이 모니터 앞에서 무전기를 들고 진웅이 형 역할을 대신 해주고 그랬다. 판타지가 바탕이 되다보니 시청자가 이걸 믿어줄까 걱정했는데, 많이들 공감해주셔서 감사하다. 연출, 작가, 촬영, 스탭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나온 작품이고 이런 작품을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벅차다. 이번 작품은 굉장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내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분명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대사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데다 말투도 생소하다. 그런 이유로 방영 초반에 ‘이제훈 연기의 어색함, 연기력 논란’이 대두되기도 했다. 연기로 늘 호평 받는 배우였는데, 그 반응 때문에 다소 힘들었을 것 같다.
=프로파일러라는 직업 자체가 정확한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하고, 공조수사가 아니라 혼자 사건을 해결하려다보니 독단적인 측면도 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오버하지, 혼자 날뛰며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지, 그런 부분이 좀 불편하게 다가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또 첫회 방송 시간이 70분이 넘었다. 목표 시간 60분보다 보여줄게 많으니 템포를 타이트하게 조정해야 했고, 내 대사 부분이 후시녹음으로 처리됐다. 다른 배우들과 연기를 하는 부분에 비해서 좀 뜰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그 부분이 아쉽다. 하지만 시청자가 볼 때 분명히 불편하게 느낄 만한 지점이었고, 만족스럽게 보여드리지 못한 점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감독님과도 우리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앞서나갔는지 고민했다.
-드라마는 <패션왕>(2012)이나 <비밀의 문>(2014) 이후 세 번째다. 전작들이 기대보다 아쉬운 결과였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다른 호응을 체감하겠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분명 각본이 우선순위지만, 그보다 우선인 것도 있다. 같이 하는 배우, 감독도 중요한 요소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시놉시스나 4부 정도의 대본을 보고 출연 결정을 하니, 이들을 믿고 가야 한다.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칠 때는 내가 작품을 보는 안목이 이만큼인가 싶기도 하고, 역할을 잘 소화하지 못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차기작 선택 때 조심성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시그널>은 그런 경험 때문에 오히려 확신이 생긴 경우였다.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거쳐왔는데, 또다시 모험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이 작품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김은희 작가님에 대한 신뢰가 컸다. 김원석 감독님도 물론이고.
-김원석 PD와의 인연은 이미 <미생>(2014) 출연 제안 때부터 이어져왔다.
=군대 있을 때 작품 제안이 많이 들어왔었다. 영화는 곧 개봉할 조성희 감독님의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을 선택했고, 드라마 복귀작도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는 두 작품을 두고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한 게 아니라, 당시 제작되는 작품들 거의 모두에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김원석 감독님과 같이 하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못한 거였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때의 선택으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지금 또 감독님과 <시그널>을 할 기회가 주어진 거라고 생각한다.
-결과를 놓고 당시에는 그 선택에 대해 아쉬워하는 시선도 많았다. 작품에 매진하는 배우로서는 그런 주변의 평가로부터 자신을 컨트롤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겠다.
=물론 타이밍 때문에 못한 작품이 잘된 적도 있다. 남들과 비교되는 일도 다반사다. 그건 배우로서 숙명적으로 가져가야 할 부분이다.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매 작품을 선택할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묻고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흥망성쇠에 대해서 심적으로 기복이 심하다면 이 일을 하기 힘들 것 같다.
-연이어 5월엔 바로 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개봉도 앞두고 있다. <파파로티>(2013) 이후의 영화 작품이자, 스크린으로 선보이는 제대 후 첫 작품이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은 조성희 감독님이 지난 작품 <늑대소년>(2012)보다 앞서 만든 <남매의 집>(2009)과 <짐승의 끝>(2010)의 보다 대중적인 지점에 있는 영화다. 감독님이 구현하려는 색깔이 신선해 함께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도전이었다. 비호감 홍길동인데 캐릭터로 보자면 일종의 안티히어로적인 요소가 있다. 활빈당 조직을 이끌어가는 탐정으로, 남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는 인물이 아니다. 정의감에 불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 못되고 친절하지 않고, 소통에 관심도 없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비열하고 야비한 인물이다. 그런 캐릭터가 다른 사람들과 융화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상당히 흥미롭다. 상업영화에서 이런 인물이 주인공인 게 이상한 일이지 않나. 이런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잡는 과정인데, 낯설지만 신선한, 아마 듣도 보도 못한 영화가 나올 것 같다.
-<파수꾼>(2010)을 함께한 윤성현 감독과의 작업도 기대된다. 다른 작품들을 선택하는 기준과는 조금 다른 선상에서 고려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객관적으로 작품을 판단해야 하는데, 윤성현 감독님과는 확실히 그런 객관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웃음) 워낙 가까운 사람이니 사심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감독님 작품은 그만큼 빈틈이나 부족함이 없고 그 부분에 대한 존경이 있다. 늘 같이 하기를 벼르고 있고, 관객에게 우리가 만든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은 바람도 크다. 올해 마침 한 작품을 준비 중이다. 감독님이 아예 ‘너를 두고 썼다’고 하시더라. (웃음) <파수꾼>과 같은 그런 친구들의 이야기인데, 쫓고 쫓기는 액션이 바탕이 된다. 바람으로는, 8∼9월에 촬영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제훈’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파수꾼>을 함께한 윤성현 감독은 그만큼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윤성현 감독님은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배우가 어떤 태도와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처음 정립시켜준 사람, 내겐 정말 소중한 사람이다. 나는 배우로서 늘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한자리에서 계속 같은 걸 하게 되면 퇴보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 새로운 시도들이 재밌기도 하지만 나한테는 두려움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런 고민을 감독님과 이야기하다보면 다음에 어떤 스텝을 밟아야 할지 알게 되고, 그 힘을 받아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스타일도 너무 잘 맞아 자주 만나고 여행도 같이 다닌다. <파수꾼>을 함께한 박정민 배우와도 잘 어울린다. 최근에는 권율과 함께 넷이 모여 축구게임도 하는 등 우리끼리 잘 논다. (웃음)
-<파수꾼>으로 얻은 신성의 자리, <건축학개론>(2012)으로 얻은 대중적 인지도 이후 성공작도 있고, 흥행이나 호응을 얻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플랫폼의 다양화로 제2, 제3의 이제훈이 나오고 있다.
=독립영화를 통해 활동을 하는 배우들이 매우 반갑고 그들과 함께 연기하고 싶다. 알아봐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게 너무 기쁘다. 물론 계속 입증을 해야 한다. 한 작품을 통해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다음 작품만이 그 배우의 현재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아직까지 팬들이 돌아서지는 않았다. (웃음)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고 사랑해줬던 이들이 왜 나를 믿어줄까 생각해봤는데, 내가 비록 작품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긴 하지만 인기를 얻기 위해서 꼼수를 두지 않으니, 계속 지켜봐주시는 게 아닐까 싶다. 작품할 때마다 왜 이 작품이 탄생됐고, 나에게 왔고 왜 영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 항상 고민한다.
-또 어떤 새로운 작품에 도전할 계획인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 또 신중하게 찾아야 한다. 지금은 대중적으로 쉽게 봐주고 재밌어 하는 작품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도 상당히 좋아하는데, 내가 하면 관객이 좋아해줄까 고민이 되기도 한다. <건축학개론>이 나온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풋풋한 첫사랑에 이어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나 진한 멜로에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취향과 휴식 사이
집에서는 스마트폰 대신 이베이를 뒤져 구매한 다이얼식 전화기를 연결해 쓴다. 다이얼식 말고도 버튼식까지 하나, 이렇게 두대나 구비해놓았다. 벽걸이 CD플레이어를 ‘특이하게도’ 화장실에 설치해놓고 음악을 듣는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안 되는 CD들을 찾아서 모으고, CD플레이어에 디스크를 넣고 빼고 하는 그 과정들이 이제훈에게는 행복한 시간이다. 영화 O.S.T는 그중 가장 큰 목록을 차지하는데, 최근에는 <캐롤>(2015)의 음악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 <위플래쉬>(2014)처럼 강한 충격을 준 영화들은 몇번이나 보고 또 보고, 서플먼트까지 놓치지 않고 공부하듯 본다. 지칠 때면 극장에 가서 몸을 파묻고서야 편안함을, 그리고 새로운 자극을 느낀다. 해외 촬영 때는 모두 쉴 때도 시간을 쪼개 갤러리를 찾는다. 홍콩도, 홍콩영화도 워낙 좋아해 홍콩의 옛날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야우마테이의 미도카페에 가서 프렌치토스트와 홍콩식 밀크티를 마시며 영화를 곱씹는다. 한창 신나하며 아날로그적 취향을 말하던 그가 묻는다. “제가 너무 덕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