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작품으로 일약 스타가 되는 배우들도 많은 충무로에서,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스타덤을 향한 지난한 코스를 밟아온 배우가 있다. 이범수가 그렇다. 1990년, 대학 3학년일 때 영화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그는 12년이 지난 서른셋에야 처음으로 주연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포스터에 새겼다.
20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통한 뒤 30대 중반에 이르는 시간. 성실하고 착실하게 영화에 몸담았던 그에게 12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각종 인터뷰에서 “영화에 단역, 조역, 주연이 따로 있냐”는 말을 유난히 많이 하던 배우. 그런 그라, 주연이 된 것에 대해 담담할 법도 하건만, 웬걸. 이제사 밝히는 바, 그는 처음부터 주연을 향한 욕망에 몸사래쳤었다. 쉬 드러내지 않았을 뿐.
자꾸만 지연되곤 하는 욕망이 있었기에, 더욱 길었던 12년. 그 시간들은 이범수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해낸 훈련과정”이라거나 “오너가 되기 전 수위나 경리로 일해본 실무경험의 시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들보다 더 진솔하게 들리는 건, “혼자서 이만큼 왔으면 잘한 것 아니냐”하는 읊조림 같은 한 문장이다.
육사의 꿈을 접고 연극영화과로
연극영화과 출신의 배우들이 대부분 거쳐온, 배우를 꿈꾸던 유년기, 혹은 사춘기가 이범수에게는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이범수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꿈은 육군사관학도였다. 형제없이 외동아들로 태어난 이범수는, ‘남자다움’을 선망하던 소년이었다. 부모님이 출생신고도 몇달 기다렸다 할 만큼 허약한 상태로 태어났지만, 크면서 그는 어릴 적의 골골함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튼튼해졌고, 초등학교 때는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 겨울마다 얼음장을 지치기 바빴다. 공부도 곧잘 해서 중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을 많이 했다. 하지만 ‘범생’과는 아니었고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안 하면 가만 놔두지 않는” 터프한 리더격이었다. 리더십에다 유머감각이 가미된 성격으로 또래집단을 쥐락펴락하던 그는 성격을 살려 육사를 가려 했다. 그러나 몸에 흉터가 있으면 입학이 안 된다는 입학규정이 그의 진로를 수정했다. 남들의 시선을 잘 이끄는 성격을 살리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평범한 회사원이 되기란 너무나 싫었다. 고민하다가 배우라는 직업을 생각해냈다.
1988년,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연극연기 전공학생으로 입학했다. 훤칠한 키와 미끈한 얼굴없이, 그는 오로지 연기력으로 학교의 동료들과 선생님들 사이에 인정을 받아나갔다. 2학년 때 4학년들의 작품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 역을 맡았을 정도로, 그는 연기에서만큼은 ‘톱’이었다. 동기들은 스키장으로, 해외로 놀러다닐 때도 그래서 더욱 연극에 몰두하던 학창 시절. 그는 마치 유명배우처럼 빡빡한 스케줄 따라 4년 내내 연극을 했고, 그렇게 한 23편의 작품들은 지금의 그에게 든든한 실험자료가 되어준다. 부조리극, 서사극, 코미디, 비극, 뮤지컬. 거의 모든 장르의 연극을 직접 해보면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나 스스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서 내가 톱이었는데, 내가 햄릿이었는데…” 하는 자의식은 지금까지도 이범수를 따라다닌다. 심지어 그는 단역만 하던 시절, “미적분까지 잘하는 나더러 덧셈 뺄셈만 하라고 하다니…”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어쩌면 학교 울타리 바깥, 사회와의 첫대면이었던 첫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에서의 배역부터가 그에게는 너무 작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1학년 때부터 방송계며 영화계를 기웃거리던 동기들과 스스로를 구분하던 그는, 3학년 때 ‘나도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무작정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주인공을 시켜달라”고. 그런 행동이 얼마나 황당한 짓으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캐스팅이 이미 다 끝난 상태에 듣도 보도 못한 한 대학생이 찾아와 주연자리를 내놓으라니.
그냥 돌아가는 그의 발길을 잡은 건, 스탭 중 과 선배들이었다.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긴 선배들은 그에게 ‘주인공 친구 종구’ 자리를 제안했고, 그 역으로 그는 영화데뷔를 하게 됐다. 이듬해 <열일곱살의 쿠데타>는 연락이 와서 출연한 경우. 그나마 스케이트 타는 학생 역이,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였던 그의 경력이 소문나 들어온 것이었다.
필모그래피- 경찰2, 웨이터, 공사장 깡패 여기까지가 이범수 필모그래피의 짤막한 인트로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1992년 겨울 육군 현역으로 군대에 들어갔다. 제대한 건 95년 초. 가진 건 학교 때의 화려한 기억과 선후배들의 인맥뿐. 매니저도 뭣도 없는 초짜 배우 이범수는 몸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글쥬스>의 조민호 감독이 당시 조감독이던 <개같은 날의 오후>가 직업전선에 뛰어든 그의 첫영화였다. 거기서 그는 지금보다 훨씬 통통한 얼굴에 모자까지 눌러써서 알아보기 힘든, ‘경찰2’ 역으로 3신 정도 나온다. 장미아파트에 사는 여자들이 이웃여자의 폭력적인 남편을 때려눕힌 뒤 현장에 달려온 경찰 중 한명. “지금 있는 이 자리에 그대로 계십시오” 하는데 모두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버려 당황하는 그 경찰이다. 다음 작품 <은행나무 침대>에는 딱 한신에 출연. 한석규의 친구로, 심혜진 생일 파티 때 바람잡아주는 연기를 했다. 직접 찾아가서 배역을 따내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의 캐스팅은 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학교 선배이던 강제규 감독의 부름을 받고 간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상만가>(1997)에서 이범수는 대사도 제법 있고 혼자서 나오는 장면도 있는, 조금 큰 단역을 맡았다. 이병헌과 같은 호프집에서 일하는 웨이터. 살이 많이 빠지고 꽁지머리를 한 그의 모습은, 최근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접속>(1997)에서의 퀵서비스 배달원, <퇴마록>(1998)에서의 느끼한 바람둥이 부티, <남자의 향기>(1998)에서의 폼생폼사 공사장 깡패 선글라스. 이후 그가 따낸 역들은 대부분 스쳐지나가는 단역들이었다. 이런 영화들을 그는 개봉관에 가서 보지 않았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배우들 옆에서 양에 안 차게 잠깐씩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을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를 4년이었다.
4년 정도 지속된 단역 시기에 종지부를 찍은 건,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에서 운전사 삼식이 역을 따면서부터였다. 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역이 들어와 기쁘기도 했지만, 예상치 않은 복병이 그의 마음을 후벼팠다. 극중 주인공 임창정의 캐릭터 이름이 ‘범수’였던 것이다. ‘삼식이’는, ‘범수’에 무심할 수 없었다. “원래 이름이 범수인데, 얼마나 내가 하고 싶었겠어요. 감독이 범수 이리와 봐, 그러면 임창정씨랑 저랑 둘이 같이 감독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민망하던지….”
이범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그 스스로 ‘연기인생의 첫번째 획’이라고 말하는 작품, <태양은 없다>(1998)를 통해서였다. <태양은 없다>는 배역을 따는 것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특기인 ‘무작정 찾아가기’부터 ‘삼고초려’, ‘이사람 저사람 앞에 연기력 알리기’ 등 갖가지 전략을 다 썼다. 처음 김성수 감독을 찾아갔을 때, 오디션은 이미 끝나 있었다. 초창기에는 무조건 주연을 요청했지만, 이미 이때쯤은 그런 게 “현실적으로 통할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달”은 이후였다.
그는 감독 앞에서, 영화사 사람 앞에서, 네번인가 거듭 연기테스트를 받은 뒤 겨우 김성수 감독의 지지를 등에 업고 <태양은 없다>에 출연할 수 있었다. 그가 연기테스트를 받던 당시 옆방에선 이미 그 역에 캐스팅된 다른 배우가 대본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배역이 바뀌었다.
[이범수 출연작]
2002 <일단 뛰어!>
2002 <정글쥬스>
2001 <번지점프를 하다>
2000 <하면 된다>
2000 <아나키스트>
1999 <러브>
1999 <신장개업>
1998 <태양은 없다>
1998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8 <남자의 향기>
1998 <퇴마록>
1997 <접속>
1997 <지상만가>
1996 <은행나무 침대>
1995 <개같은 날의 오후>
1991 <열일곱살의 쿠데타>
1990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