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문자답(自問自答)의 과정을 기승전결의 서사로 풀어낸다. 물론 그렇지 않게 보이는 소설과 영화도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일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는 소설이나 플롯과 스토리보다는 비주얼과 무드가 주가 되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라 해도, 처음 수수께끼를 내고서 나중에 문제를 무효로 해버리는 방식 자체는 어쨌든 자문자답이라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시작과 끝은 곧 문제와 답이며, 이것은 작품 안과 밖에서 시간의 지배를 받는 서사 예술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최소한의 형태다.
모든 영화는 어떠한 문제를 푸는 어떠한 연산이다. 낼 수 있는 문제가 다양한 만큼 할 수 있는 답에도 한계가 없다. 문제는 작가 마음대로 낼 수 있지만 그 답은 관객의 마음에 도달해야 한다. 정해진 답을 향해 달려가는 편협한 작위의 영화가 있고, 문제를 풀다보니 도착하는 불가해한 삶 같은 영화가 있다. 이 세계와 마찬가지로 결국 중력의 영향을 받는 영화는, 이기적인 인위의 답이 옳을 때도, 뜻 모를 자연의 결과가 맞을 때도 있다. 쉬운 문제보다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가 좀더 의미가 있지만, 답이 허술하면 영화는 망한다. 같은 문제에서 출발한 같은 결과의 답이라도 중간에 푸는 과정이 다르다면 그 영화는 엄밀히 다른 영화가 된다.
누구나 구체적인 문제를 가졌고 막연히 생각하는 답이 있다. 그러나 풀이는 아무나 못한다. 영화에서 풋내기와 장인을 가르는 건 바로 이 몸통에 해당하는 수학이다. 수학은 어려우니 포기하면 편하지만, 개연성과 핍진성의 지옥훈련 끝에 영화의 육체를 능히 건설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도리어 새로운 문제에 매번 연연할 필요는 없다. 이미 선배가 냈던 문제를 자기 식으로 다시 푸는 것도 괜찮은 영화가 된다. 이건 표절과는 다른, 존경과 도전의 영역이다.
<8미리>로 도달한 자연적인 결과
조엘 슈마허는 <다크 나이트> 이전의 <배트맨> 프랜차이즈를 망친 범인으로 쉽게 인식되지만, 수십년간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든 그의 필모그래피는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목록의 연속이다. 예를 들어 똑같이 존 그리샴의 원작으로 만들었지만 <의뢰인>(1994)과 <타임 투 킬>(1996)은 대중을 얼마나 의식했는지라는 측면에서 연출의 결이 매우 다르다. <파이트 클럽>(1999)이 있기 전에 이미 본질을 폭로했던 현대의 자경단 정서 영화는 <폴링 다운>(1993)이었다. <폰부스>(2002)는 지금 미국에서 만연하는 ‘론 울프 총기 테러’의 섬뜩한 예언처럼 보이는데, 그다음 작품으로 갱단에 사살당한 아일랜드 여기자를 다룬 실화 <베로니카 게린>(2003)을 택한 행보는 흥미롭다. 흥행과 평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의식적인 핑퐁 게임을 해온 그는 매번 쉽지 않은 각본만 집어들었다. 누가 뭐래도 대중영화의 장인이며 위대한 고용감독으로 기억될 그의 영화 중에서도, 서론으로 꺼낸 장광설의 사례로 말해보려는 작품이 바로 <8미리>(8MM, 1999)다.
<세븐>의 작가 앤드루 케빈 워커가 오리지널 각본을 쓴 이 영화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분한 사립탐정 웰즈는 사망한 재벌의 미망인으로부터 남편의 비밀 금고에서 발견된 8mm 스너프필름의 진위와 영상 속 소녀의 생사를 확인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조사를 통해 실종된 소녀의 이름과 어머니를 알게 된 그는 섹스숍 점원 맥스(호아퀸 피닉스)의 도움을 받아 캘리포니아 포르노 업계의 뒷골목을 뒤진 끝에, 소녀의 행적이 멈춘 지점에서 업자 에디와 디노 벨벳, 그리고 ‘머신’이란 이름의 복면 괴한과 맞닥뜨린다. 소녀는 영상 속에서처럼 정말 살해당했던 것이다.
웰즈가 접근한 의도를 알아차린 일당이 범죄의 남은 유일한 증거인 필름을 빼앗고 그의 목숨을 해치려는 위기의 지점에서 러닝타임은 이미 1시간30분, 영화는 얼마든지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도달한 지옥의 한복판에서 웰즈에게 약간의 행운을 아슬하게 쥐어주고, 악당들의 자멸 내지는 권선징악의 심판으로 골치 아픈 문제를 덮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지 않고 30분을 더 들어간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을 심판할 감정적인 비등점이 실은 웰즈에게는 명확히 없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고용된 사람인 웰즈에게 소녀의 참혹한 죽음에 이입할 동기나 감정은, 그에게도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이 있고 소녀의 어머니와 약간의 인간적 교류가 있었다는 것뿐이다. 주류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을 충분하다는 듯 적당히 뭉개고 넘어가거나 아예 신파로 만들기 위해 플래시백 등을 동원해 몰랐던 이유를 더 쌓는다. 놀랍게도 <8미리>에서 작가와 감독은 웰즈에겐 심판의 명분이 없음에 오히려 방점을 찍는다. 웰즈는 에디를 처벌하기 직전에 멈추고선 소녀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에게 숨겼던 모든 진실을 갑작스레 밝히고는 자신이 지금 가족을 대신해 그들을 처단할 수 있게 해달라며 허락을 구한다. 주인공의 비등점을 이런 식으로 올리는 영화는 없다. 굉장히 이상하지만, 분명히 중요한 장면이다.
영화는 죄악의 고객이 이미 자연사한 지점에서 시작했고 어떤 결과로도 소녀는 돌아오지 못한다. 웰즈의 고용인은 모두 잊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고, 죄의 당사자들이 퇴장한 상태에서 진짜 지옥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웰즈 개인의 것이 된다. 영화는 관객의 카타르시스와 타협하고픈 감정에 봉사하지 않는다. 손에 온통 피를 묻히고 돌아온 웰즈는 딸을 안고 오열한다. 그는 앞으로 딸을 볼 때마다 죽은 소녀와 자신이 겪은 지옥을 떠올릴 것이다.
<8미리>는 존 밀리어스가 기획하고 폴 슈레이더가 쓰고 연출한 <금지구역>(Hardcore, 1979)을 보고서 죄의식이 심한 소년이 쓴 처절한 독후감처럼 느껴진다. 독실한 기독교도이자 칼뱅주의(Calvinisme) 교리를 따르는 성공한 사업가 제이크(조지 C. 스콧)는 캘리포니아로 교회 청년 캠프를 떠난 딸이 느닷없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용된 사립탐정 앤디(피터 보일)는 딸의 행방 대신 8mm 필름을 가지고 돌아오고, 제이크는 자신의 딸이 남자 둘과 섹스하는 포르노를 보고 극장 안에서 비명을 지른다. 직접 딸을 찾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향한 그는 포르노 배우이자 매춘부인 니키(시즌 허블리)의 도움으로 조금씩 딸의 현재 위치에 가까워진다.
<금지구역>이라는 인위의 답
<8미리>에서 내린 답이 앤드루 케빈 워커가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몇번이나 길을 잃었을 글 위의 지옥에서 끝내 도달한 자연적인 결과로 보인다면, <금지구역>은 폴 슈레이더가 처음부터 한 가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정해놓은 인위의 답이다. 그것은 제이크 자신의 세계와 니키가 사는 세계에 분명한 선을 그으며 설명했던 ‘신은 구원받지 못할 이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튤립(TULIP) 교리와 결말에서 나타난다. 구원의 은총을 입을 딸은 정해져 있다. 제이크는 자신의 딸을 되찾지만 지금껏 그를 도와준 남의 딸 니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탐정은 비웃으며 ‘순례자’는 그만 당신들 세계로 돌아가라고 말할 뿐이다.
결국 <8미리>와 <금지구역>은 존 포드의 <수색자>(The Searchers, 1956)를 변용한 것이다. <수색자>에서 존 포드가 한 질문과 답은 위대하다. 이 두 영화 역시 같은 문제를 풀어봤지만, 작가 각자와 그들이 속한 시대가 내놓은 답은 참담하며 냉소적이다. 이 둘은 위대한 영화를 만든 선배의 강건한 영혼에 비추어 자신들의 영혼의 파괴됨을 칭얼댄 것일까? 어쩌면 그보단 그때 당신들에겐 존 포드가 있었지만, 지금 우리에겐 없다는 서글픔의 답에 가까울지 모른다. 질문할 필요와 가치를 묻기에 앞서 생산과 소비가 존재하고, 대답할 진실을 추구하려는 의지 역시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는 이 시대의 수색자들은, 실종자의 구원은커녕 자신의 구원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