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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영화 보기, 영화의 진화
정지혜 사진 백종헌 2016-01-0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자신의 회고전에 참석한 필립 가렐 감독

장 뤽 고다르 이후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를 대표하는 필립 가렐 감독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11월25일부터 내년 2월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되는 필립 가렐 회고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1964년부터 활동해온 필립 가렐의 작품 중 <비밀의 아이>를 비롯한 16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세편의 흑백영화 <폭로자> <처절한 고독>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가 설치미술의 형태로 재구성돼 <필립 가렐-찬란한 절망>이라는 이름의 전시로도 소개된다. 16살 때 첫 영화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1964)을 만들어 유럽영화계를 놀라게 한 이후 그는 줄곧 자신의 영화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다. 1970년대까지는 서사를 배제한 채 이미지를 활용한 실험영화를 제작했고 그 후에는 영화 안에 서사성을 끌어와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변화를 계속해왔다. 관습을 뛰어넘는 시도들로 ‘영화계의 랭보’라고 불리는 필립 가렐을 만났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시네마(cinema)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미술관 안으로 들어온 영화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영화적 스승인 장 뤽 고다르, 영화적 동지인 샹탈 애커만 등에 비해 당신의 작품이 전시의 형태로 재구성된 경우는 많지 않았던 걸로 안다. 처음 이 전시를 제안받았을 때 어떤 기대와 걱정이 있었는지부터 묻고 싶다.

=10년 전쯤 퐁피두센터에서 <폭로자>(1968)를 전시 형태로 선보인 적은 있다. 당시 8살 정도 된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서 <폭로자>를 보고 있었다. 굉장히 흥미롭더라. 이러한 형태의 전시를 좋아한다. 샹탈 애커만이 ‘미술 계통이 영화판보다 덜 폭력적’이라는 유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동의한다. 영화는 자본의 영향을 크게 받는 매체이다보니 폭력적인 구석이 많다. 하지만 내게는 전시 그 자체보다 스크린을 통해 이미지가 상영되고 그걸 사람들이 보는 것, 영화의 상영이 더 중요하다.

-영화의 이미지가 영사기로 상영될 때 비로소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간의 작용이 활발히 일어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상영되는’ 영화에 대한 강조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굉장히 친했던 동료 장 외스타슈 감독이 1981년에 자살했다. 그가 자신의 초기 영화들을 VHS 테이프로 틀어서 봤는데 영화가 너무 안 좋았다는 얘기를 했다. VHS로는 영화의 ‘마술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감독과 관객의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순간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카메라나 배우보다도 더 중요한 게 영화가 영사기로 상영되는 일이다.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스크린으로 영화를 볼 때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동시에 말을 거는 울림(echo)이라는 게 생긴다. 그가 개인적으로 힘든 삶을 산 것도 있지만 더이상 자기 영화 안에 울림이 없다는 걸 인식한 게 그의 죽음의 큰 이유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실제 그의 영화는 훌륭했음에도 말이다. 영화에는 영화관이 포함되며 영화관 없이는 영화가 아니다. 나도 DVD로 내 영화를 보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 만들어놨구나’ 싶다. DVD나 TV로 보는 영화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것 그 이상을 주지 못한다.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은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으로서의 기능까지 수행해오고 있다. 갤러리에도 스크린과 영사기는 존재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상영, 즉 러닝타임 동안 출입이 제한된 영화관에서 집단적으로 영화를 보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가 영화 매체의 성격 변화로도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박물관에서 영화 보기는 (러닝타임이라는) 강요된 시간을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내가 어릴 땐 학교에서 영화를 보여주며 ‘영화 끝날 때까지 일어나면 안 돼’라고 강요했다. 이젠 미술관에서 들락날락하며 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의 진화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세대의 감독들 중에 오직 영화만 한 사람은 없다. 고다르는 젊은 시절에 소설을 쓰고 싶어 했고 모리스 피알라도 그림을 그렸다. 나는 13살에 그림을 그리고 8mm 영화를 찍었으니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동시대 감독들의 불안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회화나 문학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에 반해 영화의 역사는 너무도 짧다. 다른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아야만 영화가 주는 불안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내가 틈만 나면 루브르박물관에 가는 이유다. 그래야만 영화가 ‘자연스러운 예술’(natural art)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술관 속 영화 상영은 적어도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함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79년 <비밀의 아이>를 전후로 당신의 영화 세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 이미지의 실험에 치중했다면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극 안에 내러티브를 끌어왔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언더그라운드 영화’라는 움직임이 있었다.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도 서사가 없는 영화들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처럼 영화가 정식 개봉을 하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영화를 봤다. <처녀의 침대>(1971) 상영 때도 알음알음 사람이 모이더니 상영관을 꽉 채웠다. (영화적 동지였다가 1979년 결별한) 앤디 워홀이 만든 잡지 <인터뷰>에 개봉하지 않은 <처절한 고독>(1974)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다 1979년 전후로 이러한 방식의 영화 상영의 움직임이 아예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배가 침몰했다’고 표현한다. 이후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라도 서사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일반 관객은 스토리가 없으면 영화라고 생각지 않으니까. 시나리오를 가지고 찍은 두 번째 영화 <밤에는 자유>(1983)로 처음으로 스탭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줬다.

-<질투>(2013)에 이어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인 더 섀도 오브 우먼>(2015)은 비평계와 대중의 지지를 고르게 받았다. 영화가 전작들에 비해 밝아졌다는 평도 있다.

=내 영화의 ‘B급 시리즈’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두편 모두 유럽발 경제 위기가 터진 2011년 11월 이후에 찍었다. <질투> 이전에 쓰던 시나리오가 있었다. 40회차 정도의 영화로 로마에서 촬영하고 이탈리아 극장에서 상영할 계획이었는데 그때 경제 위기가 터진 거다. 바로 엎어버렸다. 전체 예산을 절반으로 줄이고 주요 인물 세명만 나오는 20회차 정도의 영화를 찍는 게 최선이었다. 그게 <질투>다. 2010년 이전에 찍은 영화에 들어간 예산의 절반으로 찍었다. 예산을 훨씬 많이 쓴 <밤에 부는 바람>(1999), <뜨거운 여름>(2011)보다도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 찍은 영화들이 돈을 벌게 해줬다. <인 더 섀도 오브 우먼>은 내 영화 중 가장 수익이 좋다. 내게 영화는 열정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예술영화에 투자가 안 되는 상황이라 이런 식으로 계속 찍을 생각이다. 배우들과 사전 리허설도 많이 해야 하고 예산도 더 꼼꼼히 짜야겠지만.

-아들이자 배우인 루이 가렐과 함께 <질투>, <뜨거운 여름>, <평범한 연인들>(2005) 등을 작업했다. 감독으로서, 아버지로서 본 루이 가렐이 궁금하다.

=감독들 중에는 배우를 겸하는 이들도 있는데 나는 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연출만 해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대학에서 연기 강의를 했다. 그때 18살이던 아들 루이가 내 제자가 됐다. 68혁명을 다룬 <평범한 연인들>에 아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 어떨까 싶더라. 1968년에 내가 20살이었는데 마침 그 영화를 찍을 때 루이가 20살이었다. 그 영화에는 내 아버지이자 배우인 모리스 가렐도 함께 출연한다(<밤에는 자유>, <기억 속의 마리>(1967), <유령의 마음>(1996) 등에도 출연했다). <질투>에서 루이가 맡은 역할에 서른 즈음의 내 아버지를 투영했다. 극중 루이의 딸로 나오는 꼬마가 나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루이를 통해 보여준 셈이다. 예술이 자본주의의 중요한 상품이 됐다는 생각에 나는 종종 내가 하는 일에 비판적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촬영현장이 감옥 같다. 그때 아들이라는 내 진짜 삶이 현장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긴장하고 있던 나를 풀어준다. 인위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찍게 될 때가 있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해주는 게 가족이다.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

-내년에 시작한다는 차기작에 대해서 약간의 힌트를 준다면.

=<질투>에도 나온 딸 에스더 가렐이 나온다. 나의 아이들이 내 작품으로 데뷔하게 하지 않겠다는 게 교육의 원칙이었다. 그래야 아이들도 숨이 막히지 않을 거다. 이번에도 75분가량의 흑백영화로 세명 정도의 주요 인물이 나올 것 같다.

-전후 세대이자 68혁명의 중심에서 혁명의 좌절을 목격하며 예술활동에 대한 좌절감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당신 세대의 몇몇 감독들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은퇴하기도 했지만 당신은 현재까지도 영화현장을 지키고 있다. 영화와 예술을 통한 당신의 궁극적인 지향은 무엇인가.

=1966, 67년에 ‘예술이 죽었다’는 말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예술이 죽어가고 있기도 했고 상상의 세계로서의 예술의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예술의 신비화가 죽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 그리고 예술이라는 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게끔 하는 것이며 삶에 대한 충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다르의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아, 살아야겠다!’고 느꼈던 것처럼. 죽음의 충동을 막고 삶을 살아가게끔 용기를 주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덕이다. 내가 요즘도 잉마르 베리만, 난니 모레티,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들을 찾아보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의 영화를 통해 나 자신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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