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걸었다. 마치 극장에서 전화를 받는 듯, 혹은 회의 중에 전화를 받는 듯, 배우 윤동환은 귓속말하듯 속삭였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갑상선암이에요.” 인터뷰 얘기를 꺼내고는 있었지만 그가 인터뷰에 응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장 만나는 게 좋겠다며, 오토바이 타고 금방 갈 수 있으니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한다. 그렇게 만났다. 지난해 출간하고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인회를 가졌던 영화비평집 <윤동환의 다르게 영화보기>, 최근 다녀온 스페인 카미노 순례길 이야기, 전자개표기와 켐트레일(항공기가 화학물질 등을 공중에서 살포해 생기는 비행운을 닮은 구름) 음모론, 교육의 현실과 각종 정치•사회 현안들이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최근에는 영화 연출자로서의 꿈도 이뤘다. 윤동환과의 길고 긴 대화 중 그 일부를 전한다.
-갑상선암 판정을 받은 건 언제인가.
=1년 됐다. 건강 상태는,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오는 정도? 수술은 받지 않았다. 대체의학과 자연치유요법을 알아보고 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배우로서 큰 타격 아닌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한편으로 질병에 걸렸다는 건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신호다. 생활습관이 잘못됐다거나 화를 많이 냈다거나. 그 문제를 바꾸는 게 곧 질병에 대처하는 거다. 게을렀다면 부지런해지면 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면 스트레스를 줄이면 되고. 그런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지난 1년은 어떻게 보냈나.
=여행 다녔다. 발리에서 3개월, 스페인 카미노에서 3개월.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실천 중이다.
-지난해엔 평론집에 가까운 영화에세이 <윤동환의 다르게 영화보기>도 내놓았다. 책을 내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예전에 연기 강의했던 내용들과, 서울대 종교학과에 재학 중일 때 ‘신화학’ 수업시간에 발표했던 내용들이 책의 바탕이 됐다. 현대의 신화는 영화라고 하잖나. 거기에 착안해 영화를 분석했다. 종교의 핵심은 구원이다. 기독교의 구원이 불교에선 열반과 해탈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자주 했고 종교적인 것, 구원에 관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 신화에는 종교적인 메시지가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현대의 신화라고 하는 영화에서 그 종교적 메시지와 담론을 찾아보고자 했다.
-책의 구성 역시 불교의 사성제 ‘고집멸도’를 따르고 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현실(고), 고통을 야기하는 욕망에 대한 인식(집), 욕망을 제거하는 탈출의 과정(멸), 구원의 길(도), 이렇게 네개의 구성으로 영화를 묶어보았다. <빠삐용>(1973), <쇼생크 탈출>(1994)처럼 탈출 자체가 주제인 영화들이 있는데, 종교적 차원에서 보자면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탈출과 구원의 구도를 취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평행우주 이론, 잠재성 이론을 빌려서 해석한 홍상수 영화와 김기덕 영화는 현실의 고통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파트에 실었다.
-혹 나만의 베스트 영화가 있나.
=프랑스 폴 발레리 대학에서 석사과정 공부할 때 쓴 논문 ‘불교의 틀로 영화 보기’를 책에 부록으로 실었다. 논문에서 다루는 영화가 <매트릭스>(1999), <바닐라 스카이>(2001), <트루먼 쇼>(1998)인데, 1년 동안 그 영화들을 붙잡고 글을 써서인지 누가 어떤 영화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습관적으로 그 세 영화를 얘기하곤 한다. (웃음)
-최근엔 전규환 감독의 <불륜의 시대>(2011), 남기웅 감독의 <미조>(2013) 등 파격적 화법을 구사하는 영화들에 자주 출연했다.
=전규환 감독과는, 그의 데뷔작 <모차르트 타운>(2008) 때 출연 제의가 있었지만 마스터베이션 신이 있어서 거절했다. 그런데 결국 성기를 노출하는 영화(<불륜의 시대>)를 찍게 됐잖나. (웃음) 예전엔 분별심 같은 게 있어서 작품을 가리기도 하고 거절도 했지만, 이제는 꺼림이 없다. 이해득실 가리며 머리 굴려 사는 게 좋을 것이 없더라. 그래서 웬만하면 같이 작업하자고 하면 다 한다. 돈 받지 않고 학생들의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고.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배우라는 타이틀을 업고, 1992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어렵지 않게 주연 자리에 올라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작품 활동이 뜸해졌고 지금은 독립영화에 주로 얼굴을 비추고 있다.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된 계기가 있었나.
=글쎄. 돌아보면 무명 시절 없이 어렵지 않게 주연을 맡아 연기했다. 그게 귀한 기회였는데 그때는 그 기회의 가치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저 답답해서 외국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아웃사이더처럼 살고 있다. 그런데 어찌보면 이 모든 게 내 선택과 의지를 벗어난 일인 것도 같다. 나는 내가 연예인이고 배우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고 산다. 서울대 학력? 정말 의미 없다. 학력이란 것, 연예인의 인기란 건 사실 허상에 기반해 있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다. 세속적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고, 그것을 좇으며 살려 했던 것 같다.
-답답해서 해외로 나돌았다고 했지만, 뉴욕 뉴스쿨, LA의 리 스트라스버그 연기학교, 프랑스 폴 발레리 대학 등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나보다.
=어찌보면 역마살이고 어찌보면 탐구심이 많은 거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 같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뷰 장소에 먼저 도착해 라틴어책을 펴놓고 공부하고 있던데, 지금은 라틴어를 배우는 중인가.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어를 배웠으니까 이제 라틴어 차례다.
-언어는 호기심으로 시작한 건가,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 배우기 시작한 건가.
=필요를 느껴 공부를 시작했다. 언어학에 관심을 갖고 언어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하니 개별 언어들을 섭렵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 간다. 가서 잡히는 대로 책을 본다. 공부는 평생 하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진짜 공부다. 작금의 교육 시스템은 공부를 재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2010년 시의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건가.
=그때 4대강 사업 추진으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정치인들이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뭔가 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다니고 있었고, 시의회의원 후보자가 돼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같은 선거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결국 추진력이 약하다는 나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큐멘터리는 완성하지 못했다. 당선도 되지 못했고. (웃음) 어쨌든 출마해보니, 선거가 정말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연극과 영화 연출의 꿈도 이뤘다.
=연출에 대한 관심은 배우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싹텄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만들어보자 하고 완성했는데, 다시 보니 창피해서 덮어버리려고도 했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작이 될 수 있으니 발표는 하기로 했다. 딸을 강간한 아버지, 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의 이야기를 그린 <개아빠>라는 영화를 최근 완성했다. 극장 개봉은 하지 않고 IPTV에서 곧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2011년엔 손턴 와일더 원작의 연극 <우리 마을>을 연출했다. 대학 시절 이 연극을 보고 정말 많이 울었었다. 꼭 한번 연출해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아직 실현하지 못한 버킷 리스트의 항목들도 궁금하다.
=타이 코팡안이란 섬에서 3개월 있는 것, 남미에서 1~2년 있는 것…. 가보고 싶은 곳들이 많다.
-배우나 연출자로서의 계획은 없나.
=지금은 수행자의 마인드로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최근에 다녀온 스페인 카미노 순례길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을 보냈다. 돈도 없어 노숙하며 지냈다. 눈뜨면 걷고, 요가하고, 걷고, 자고, 먹고, 또 걷고…. 그곳에서 만난 친구가 화순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는데, 나도 화순에서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살까 한다. 식량의 무기화가 미래의 일이 아닌 만큼, 농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좋은 공기, 맑은 물, 건강한 노동, 식물과의 교류 등 농사를 지으면 건강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지 않겠나.
<윤동환의 다르게 영화보기>
영화를 신화적으로 분석한 영화에세이이자 영화평론집.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윤동환은 “현대의 신화인 영화”를 불교의 근본원리인 사성제 즉 고집멸도의 틀을 빌려 바라본다. 전체주의와 계급의 문제를 다룬 <헝거게임>, 전쟁과 폭력이 만연한 현실을 반영한 <호텔 르완다> <노맨스 랜드>, 욕망의 시스템에 관한 <이창> <현기증> <클로저>, 현재를 잡으라 말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자기 삶의 영웅이 됨으로써 구원에 다가갈 수 있다 말하는 <아바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고전부터 현대까지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영화 이야기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