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밤 10시, 광화문의 술집-반전의 조건
안티郞: 도대체 어떤 게 효과적인 반전이라는 거야? 관객이 치열하게 예측했는데도 빗나가게 만드는 거야, 아니면 아예 반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후려치는 거야?
슬퍼Man: 난 뒤쪽이라고 생각해. ‘식스 센스’를 생각해봐. 사실 마지막 반전은 없어도 충분히 얘기가 되는 거였다구. 그런데도 그 마지막 반전은 이제껏 봤던 내용 전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잖아? ‘존재론적 반전’에서 브루스 윌리스 머릿속으로 플래시백이 주마등처럼 짧게 스쳐갈 때 관객들은 그 영화의 의미를 처음부터 되짚어보게 되지. 반전이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오는 훌륭한 반전은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지.
무섭君: ‘최고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라는 몽테뉴의 말이 떠오르는군. 반전이 서스펜스의 완성이면서 서스펜스의 죽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말이야.
껨Boy: 수많은 관객들이 머리를 굴리는 상황의 절정에서도 모두를 놀라게 할 수 있다면 그게 더 감탄스러운 거 아냐? 사실 숨어서 따라가다가 느닷없이 벽돌로 치고 지갑을 훔쳐가는 ‘퍽치기’보다는 내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놓고 대비하는데도 어느새 양복 안주머니를 따고 지갑을 슬쩍하는 ‘소매치기’ 실력이 더 윗질이지. 스릴러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은데, 이 장르의 특징을 밀고당기는 게임으로 파악하면 <오션스 일레븐>처럼 일견 가벼워보이는 반전의 연쇄가 얼마나 상큼하고 효과적인지 알게 될 걸?
무섭君: 반전에도 참 다양한 종류가 있는 것 같아. <메멘토>같은 영화는 시간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혹성탈출>은 공간의 반전이지. <디 아더스>는 시점의 반전이야. <유주얼 서스펙트>는 구조를 반전시키는 경우랄까. 이제껏 쌓아온 것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순간에 반전이 솟아있다니, 참 특이해. 이제껏 모든 게 꿈이었다고 말하는 이명세의 <개그맨>도 비슷한 맥락에 있어. 그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경우는 초현실주의적 반전이라고 볼 수 있을 거야. 치밀한 논리와 계산을 토대로 한 대부분의 영화들의 반전들과는 서있는 자리가 완전히 달라. 반전이 일어난 상황에서 반전된 게 뒷부분인지 앞부분인지조차 확언할 수 없으니까.
겨뤄보者: <유주얼 서스펙트>의 반전은 이제까지의 서술을 무화(無化)시키면서 성립해. 케빈 스페이시가 그때껏 한 말이 전부 다 둘러댄 거짓말이라는 거 아냐. 사실 모든 반전은 부정의 테제야. 영화라는 문장에서 반전은 부정어 ‘not’의 구실을 한다고. 그건 감춰진 걸 드러내고 드러난 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선언하는 거지. “나는 입 밖으로 말을 뱉어내면서 그것을 덧없이 만든다”고 했던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가 <유주얼 서스펙트>를 봤다면 틀림없이 좋아했을 거야. 나는 훌륭한 반전은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라고 믿어. 반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복선을 규칙의 형태로 촘촘히 깔아놓은 뒤 그 규칙들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연산의 형태로 최대한 충격을 도출해내는 거지. 막상 수학엔 반전이 없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무섭君: 과격한 반전을 위해서 반칙을 하는 건 인정할 수 없어.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 <신혼여행> 등, 앞에 복선을 충분히 깔아놓지 않거나 스스로 가정한 규칙을 어기는 반칙투성이 반전들이 얼마나 많은데.
슬퍼Man: 효과적 반전을 일궈내려면, 관객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반전 자체는 최소한으로 보여주고 그 이전 복선들을 은밀한 형태로 최대한 깔아놓아야 할 것 같아. 그래서 관객이 반전까지 보고나면 이전에 지나쳤던 묘사들도 다 복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래야 그 복선까지 반전의 에너지에 가세해 거대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는 법이지. 내가 자꾸 반전에 관한 한 ‘식스 센스’가 최고라 하는 게 바로 그런 이유야.
무섭君: 사실 알고보면 결정적인 것을 관객이 처음 접했을 때는 사소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면 더 멋지겠지. “악마가 사용하는 최고의 속임수는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 보들레르의 말도 있잖아? 반칙이 아닌 단서를 제공하되 관객이 그 단서를 잘못 해석해 스스로 헷갈리게 해야겠지. 국민체조할 때 팔다리운동에서 심장운동으로 서서히 진행하듯 가급적 에둘러가면 더 좋을 거고.
안티郞: 그렇담 결국 반전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거야. 반전이 가능한 건 결국 감독이 이야기를 다 해주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어? 핵심적이되 은폐되어 있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슬쩍 던져준 뒤 진실을 가리는 함정더미들까지 놓아두는 것은 암수(暗數)에 지나지 않잖아. 반전은 과포화용액이 담긴 비이커의 벽을 유리막대로 긁어 침전이 생기게 하는 것 같은 거잖아. 침전이 생기려면 미리 용질을 충분히 녹였어야 하는 건데, 정보로서의 용질을 이야기 속에 그렇게 충분히 녹여 전해주는 작품이 몇이나 되냔 말야. 범죄소설의 대가인 레이먼드 챈들러는 “가장 훌륭한 미스터리 규칙은 모든 단서들을 다 펼쳐놓아 독자들이 범인을 추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자기 작품의 절반에서 이를 어겼다고 고백했잖아? 주인공이 모르는 내용을 관객이 알도록 해서 재미를 더해주는 서스펜스의 겸손함에 비하면, 관객을 바보로 만들면서까지 감독이 혼자 모든 정보를 챙겨두는 반전은 너무 오만한 것 아니냐고.
겨뤄보者: 글쎄, 결국 무엇을 위한 속임수냐는 거겠지. 모두 다 재밌자고 하는 게임의 속임수 아니겠어? 반전을 유도하는 속임수는 배구의 페인트 모션 같은 것이지 축구의 진로방해 같은 건 아니라는 거야.
안티郞: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반전이 있을 법도 한데도 넣지 않음으로써 더 훌륭해진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키스 미 데들리>는 반전 한번 없이 서스펜스를 막다른 골목으로까지 몰아가고도 열린 결말을 채택해 신비스럽기까지 하잖아?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해피엔드를 위해 억지로 두 남녀간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커플로 맺어주고 마는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적 반전을 거부하고, 그냥 남자를 다른 여자 품으로 떠나보내게 함으로써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 됐지. <빅 나이트>는 끝내 유명 재즈가수가 레스토랑 파티에 오지 않게 하는 결말로 주제를 웅변했고, <퍼니 게임>은 무고한 시민이 마침내 범인을 격퇴하는 반전 장면을 리모컨으로 장난스럽게 되돌림으로써 폭력의 문제를 충격적으로 되씹게 만들었어. 최근엔 ‘정치적 올바름’에서 ‘장르 비틀기’까지를 멋지게 체현해낸 <슈렉>의 ‘무반전 클라이맥스’도 있었고… 관습적으로 쥐어짠 반전에 비하면 얼마나 멋진 사례들이야.
겨뤄보者: 맞아. 하지만 네가 장황하게 열거한 그 영화들의 멋진 점은 전부 다 반전의 효과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걸? 반전이란 것의 대단한 위력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소위 ‘관습화된 반전’이란 걸 거부해 생겨나는 장점도 없었을 테니까.
#4.새벽 3시, 청진동 해장국집-왜 하필 영화인가
무섭君: 반전이 영화라는 매체에서 유독 각광받는 건 반전을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 영화 속에서 가장 다양하기 때문이 아닐까? <노 웨이 아웃>처럼 러시아 대사를 잠깐 집어넣어도 되고, <식스 센스>처럼 이제껏 복선이 됐던 장면들을 짧게 플래시백으로 이어붙일 수도 있잖아? <유주얼 서스펙트> 마지막 장면처럼 절름거리며 걷던 케빈 스페이시를 똑바로 걷게 만들어 암시할 수도 있고 말야.
껨Boy: 영화의 단위 정보량이 다른 매체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기도 할 거야. 소품 색깔에서 인물 표정, 공간 분위기에서 직접적 대사까지, 소설의 한 문장에 비할 때 영화의 한 쇼트가 전달하는 정보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그래서 짧은 순간 전광석화처럼 재빠르면서도 묵직하게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게 가능한 걸 거야.
슬퍼Man: 반전은 상업적으로 볼 때도 영화에 훨씬 더 적합해. <식스 센스>가 미국에서만 3억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반복관람 때문이었지. 그런데 설혹 소설에서 그런 막강한 반전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새로 책을 살 필요 없이 그냥 앞페이지들을 다시 넘겨보기만 하면 되잖아?
안티郞: 반전이 결정적인 영화의 경우, 그 자체론 반전이 수입 증대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체 영화시장의 확대에는 큰 기여를 하지 못할 거야. 할리우드의 주수입원인 시리즈영화는 관객이 궁금해하는 모든 질문에 해답을 주지 않고 뭔가 찔끔찔끔 남겨 속편으로 이어가잖아? 반전으로 한큐에 해결하는 스타일의 스릴러는 속편을 만들 수가 없지.
겨뤄보者: 그간 스릴러는 한국에서 백안시되어온 장르였지만, 사실 반전은 앞으로 한국관객에게 더 호소력을 가질 수도 있다고 봐. 왜냐하면 우리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한국어 문장이 서구 언어의 문장에 비해 반전에 더 가까우니까. 무슨 말이냐면,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어는 부정어가 맨 뒤에 있잖아. 반전은 결국 맨 뒤에 가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뒤집는 것이라구. 그러니 반전을 구사하고 받아들이기에 훨씬 더 적합한 사고체계를 한국인들이 갖고 있다고 봐.
무섭君: 근데, 요즘 관객들이나 언론들은 자신이 본 영화의 반전내용을 철저히 함구해야 한다는 데 일종의 공모의식 같은 게 확실히 있는 것 같더라.
겨뤄보者: 예전 서울극장 앞에서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려고 줄 서있던 관객들 곁을 지나던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외쳐 몇년째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있잖냐. <식스 센스> 보고나서 통신에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이란 제목으로 글 올린 사람도 비슷한 꼴을 당했지.
껨Boy: 사실 그런 공모의식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닌 것 같아. 얼마전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50년대 스릴러 <디아볼릭>을 봤는데, ‘영화의 반전을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달라’는 제작진의 당부의 말을 아예 자막으로 붙였더라니까.
겨뤄보者: 오이디푸스 신화를 생각해봐.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맞춰버리니까 문제 낸 스핑크스가 창피해서 그냥 죽어버리잖아. 반전의 비밀이 지닌 무게는 그 정도야.
무섭君: 근데, 우린 오늘 반전의 내용들을 다 말했는데 어떡하지?
안티郞: 우리끼린데 뭐 어떠냐? 만에 하나, 우리끼리 나눈 얘기를 <씨네21> 같은 데서 싣는다면 뭐, 그곳에서 책임져 주겠지. 그리고 너, 내가 반전에만 집착하지 않으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고 누누이 말하는 거 못 들었어?이동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djlee@chosun.com ◀ 이전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