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김도훈 편집장과 대학 시절 같은 영화동아리였다. ‘영화탄생 100주년’이라는 표현이 뭔가 거대한 역사의 중심에 선 것처럼 울컥하게 만들었던 90년대. 마음이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팠던 때였다. 그렇게 한손에는 시티폰, 허리에는 삐삐 차고, 옆구리에는 굳이 <키노>와 <씨네21>을 쌍으로 끼고 다니면서 디아스포라와 시뮬라크르에 밑줄 좍.
당시 ‘구본승 머리’를 고수했던, 하지만 구등신도 팔등신도 아니기에 어림잡아 육본승이라 불렸던 동아리의 브레인 김도훈은 강의시간이 빌 때면 종종 비디오를 빌려와 작은 감상회를 열었다. 하지만 동아리방 벽에 <레옹>과 <라이온 킹>,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 포스터 등을 붙였다는 이유로 일부 열혈 선배들로부터 ‘미제의 앞잡이’ 취급을 받던 그였기에 그 선정작들 또한 하나같이 ‘미제’들이 많았다. 그가 애정해 마지않는 웨스 크레이븐의 <영혼의 목걸이>(1989)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문제는 제목이었다. <영혼의 목걸이>의 원제는 <The Shoker>로 악마와 계약한 살인범 ‘핑기’가 전기의자의 충격으로 오히려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남의 몸을 들락거리면서 살인행각을 일삼는 과정을 그린다(이번호 특집 참조). <사랑과 영혼>(1990)을 의식해 한국 비디오업자가 마음대로 갖다 붙인 제목만 듣고서, <영혼의 목걸이>가 가슴 찡한 멜로드라마라 생각하고 산속 깊숙한 동아리방까지 힘든 걸음을 했던 학우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핑기가 나카다 히데오의 <링>(1998)처럼 TV에서 나올 때(그렇다, <링>의 사다코보다 핑기가 한참 먼저다!) 드디어 분노는 폭발했다. “뭐꼬, 꺼라 꺼.” 물론 그때 나는 이미 편안히 숙면 중이었기에 자세한 경과는 더 알지 못한다.
특집에서 조원희 감독이 상세하게 쓴 것처럼, 데뷔작 <왼편 마지막 집>(1972)이 잉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1960)을 자기 스타일대로 각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웨스 크레이븐의 영화적 뿌리는 바로 유럽 예술영화들이었다. 어쩌면 데뷔작을 통해 자신의 길이 거의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알게 모르게 그도 어떤 갈증을 느끼며 살았을지 모른다. 미국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감독이 되는 게 꿈이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도 결국 원했던 작품이 아닌 <대부>(1972) 프로젝트를 받아들였을 때, ‘내가 어쩌다 마피아영화를 만들게 됐을까요’라고 탄식하며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훔치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해 옴니버스영화 <사랑해, 파리>(2006)에 포함된 그의 단편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 또한 새로운 면모를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영화 속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묘를 찾은 아내(에밀리 모티머)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루퍼스 스웰)의 냉랭한 관계를 풀어준 것이 바로, 남편이 근사한 화술을 구사하게끔 도와준 오스카 와일드의 유령이었다. ‘웨스 크레이븐이 묘지에서 찍은 단편’이라는 사전 정보가 무색한, 전혀 예상치 못한 근사한 작품이었다. 그처럼 잉마르 베리만과 오스카 와일드 사이의 웨스 크레이븐을 떠올리며 뒤늦게 여러 상념이 교차한다. 예술가로서 그는 과연 마지막까지 어떤 갈증을 품고 살다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