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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을 환기하라 소통을 위해 노력하라
송경원 2015-09-08

아시아 영화인들이 꼽은 ‘아시아영화 100’ 아시아 영화사를 정리하는 초석이 되다

<엉클 분미>

숫자에는 마력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도 숫자로 설명하면 왠지 명확해지는 것 같고 어지럽게 흩어진 대상도 숫자로 정리하면 순식간에 정리된다. 필요에 따라 사물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호가 되기도 하고, 합리적인 답을 도출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숫자는 그만큼 단순하지만 강력한 기호 체계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행간을 생략해버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매긴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영화가 세상에 다양한 목적으로 선보인 지 어느덧 120년이 지난 지금, 영화사에도 수많은 숫자가 활용되었다. 세간의 평판과 세월은 고전이라는 이름하에 챙겨봐야 할 영화들의 목록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고, 숱한 영화들의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올해의 베스트,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위대한 영화, 고전 명작 100선 등 다양한 리스트들이 영화에 목마른 관객에게 각자의 기준으로 가이드를 제시한다. 관객은 취향과 기준에 맞게 리스트로 정리된 영화들을 살펴보고 골라보면 된다. 실로 편리하다.

올해로 2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도 아시아영화의 자취를 돌아볼 리스트를 준비했다. ‘아시아영화 100’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이번 프로젝트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영화의 전당이 함께 기획, 준비한 선물이다. 세계영화사에 무수한 리스트가 이미 존재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리스트로 아시아영화를 정리한다는 게 구태의연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기획 전반을 진행한 부산국제영화제 김영우 프로그래머는 “아시아영화 중에서도 세계영화 베스트에 들어간 영화들이 있긴 하지만 온전히 아시아 영화인들의 의사가 반영된 맥락은 아니었다. 부산국제영화제 20주년을 기념해 아시아 영화인들의 시선을 읽을 수 있는 리스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프로젝트의 의도를 설명했다.

분명 그동안의 영화사는 서구와 유럽 중심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다. 별처럼 흩어진 영화 리스트들도 마찬가지다. 서구영화계의 잣대와 판단으로 선정된 우수한 영화들이 역으로 우리에게 소개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대표적인 것이 50년대 일본영화, 80년대 이후 중국영화를 비롯한 동아시아영화들이다. 칸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 집행위원장인 샤를 테송은 2011년 부산영화포럼에서 “칸, 베니스 등 국제영화제를 통해 알려진 아시아영화, 특히 일본영화는 60년대 누벨바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아시아영화는 미지에의 탐험과도 같았다”고 평한 적 있다. 실제로 70년대 이후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상당 부분은 유럽 이외 국가의 영화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 힘을 쏟는다.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스테판 들로름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는 아시아영화에 대한 탐험과 함께했다. 역동성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일본,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까지 각 지역의 영화와 영화사를 탐닉했다” 고 증언한다.

권위 있는 국제영화제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세계영화의 변방으로 인식되어온 아시아영화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차원에서 아시아영화들을 뽑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이른바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은 유럽을 비롯한 해외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은 후에야 국내에서 재조명되곤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부산국제영화제가 준비한 이번 프로젝트는 차라리 신선하고 참신한 시도처럼 느껴진다. 아시아 영화인들이 아시아 영화인들의 기준에서 새롭게 정리한, 사실상 거의 최초의 리스트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세계 권위 있는 영화평론가들과 아시아영화 전문가들도 참여했지만, 아시아 영화감독과 평론가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라쇼몽>

아시아 영화인에 의한 아시아영화 리스트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다들 동의했지만 사실 누가 시작하는가도 문제고, 진행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점에서 아시아영화의 허브를 자처하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번 일은 맡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선정을 부탁한 영화인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런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뻤다”는 김영우 프로그래머의 답변에서 아시아영화의 중심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위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첫걸음인 만큼 순위 선정 과정은 단순하고 명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기준을 세우기엔 아시아 각국의 영화와 영화사에 대한 정보가 아직 모자랐기 때문이다. 73명의 심사단으로부터 각자의 아시아영화 10편과 감독 10명을 추천받아 최종 100위에 오른 113편의 작품과 106명의 감독(공동순위 포함)을 선정했다. 김영우 프로그래머는 이번 작업을 “기초를 다지고 밑그림을 그린 단계”로 봐주길 당부했다.

이번 리스트는 대체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영화들로 채워져 있다. 오즈 야스지의 <동경 이야기>부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샤트야지트 레이의 <아푸 3부작>,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김기영의 <하녀>까지 10위까지는 누구나 제목은 한번 들어봤음직한 고전 명작들이다. 113편 모두 살펴봐도 대체로 이러한 보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엔 ‘아시아영화 100’만의 변별력이 무엇인지 한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김영우 프로그래머 역시 그같은 한계에 대해선 순순히 수긍했다. “현재까진 홍콩, 대만, 중국 등 중화권, 일본과 한국 등 동아시아권 영화에 편중된 것이 사실이다. 이미 알려지고 연구된 국가들의 영화가 다수다.” 아직은 다양한 국가의 영화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연구한 자료가 부족하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국가도 적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특히 중동 지역, 서남아시아 지역의 경우엔 해당 국가의 영화를 소개할 전문성 있는 인력이 많지 않아 리스트에 진입하기 어려웠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영화의 전당은 이후 5년마다 아시아영화 100선을 새롭게 업데이트하기로 했다. 구축된 정보를 바탕으로 리스트를 새로 고칠 때마다 미지의 지역을 발굴하고 소개할 수 있도록 선정 기준과 세부사항들을 차츰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제목을 ‘아시아영화 베스트 100’이 아니라 ‘아시아영화 100’이라고 단순하게 지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번 작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100편의 줄 세우기가 아니라 100이라는 숫자를 채워나가는 발굴인 셈이다. 무엇보다 아시아영화의 미학과 역사 가이드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김영우 프로그래머는 말한다. “이번 리스트는 정전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아시아에 이렇게 좋은 영화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의 환기가 첫 번째 목적이다. 두 번째 목표는 복원이다. 미지의 영화들을 재조명하고 복원하는 과정까지 관심을 두려 한다. 아시아 작가의 발견과 소개, 공유를 통해 지속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지향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영화는 언제나 미지와의 조우였다. 스크린에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환영의 그림자 속에서 기술의 첨단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인생의 조언을 듣는 사람도 있다. 재미있는 건 120년 남짓한 영화의 역사가 사실상 단절의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영화 1편 보기 힘든 것처럼 세계영화계의 주류인 유럽, 영미권 역시 아시아영화에 무지했다. 각국은 각국 나름의 영화사를 켜켜이 쌓아왔고 교류는 대부분 일방적이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불통의 역사는 아시아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한국 관객에게, 그리고 아시아 관객에게 아시아영화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가령 이번 리스트에 김기덕, 홍상수 등 최근 활동 중인 한국 감독들은 있었지만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던 60년대 한국 감독들은 김기영, 이만희 정도였다. 좋은 영화가 없기 때문일까. 그럴 리 없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을 뿐이다. 김영우 프로그래머가 이번 프로젝트 과정에서 “아시아 각국의 영화를 서로가 좀더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작업을 해야겠다”고 느낀 것도 이 때문이다.

‘아시아영화 100’은 영원불멸의 고전이 아니다. 아시아 관객이 자국의 영화, 영화사를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소통의 오솔길이다. 아시아 각국의 미지의 고전 걸작들은 이 위대하고도 소박한 오솔길을 통해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 있다.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라는 은하수에는 수천, 수만개의 별이 있다. 우리 눈이 미처 보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별이 있음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우선은 여기 113편의 영화들을 기억하는 것부터 아시아영화에 대한 사랑을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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