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Report > obituary
[obituary] 인종, 종교, 문화를 초월한 별 지다

오마 샤리프 1932~2015

<메시어 이브라임>

오마 샤리프가 지난 7월10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세상을 떴다. 사인은 심장마비. 고인은 몇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으며 오래전에 치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샤리프의 아들 타렉이 5월에 아버지의 질환을 공개하면서 최근 몇년 동안 화제가 되었던 샤리프의 이해 불가능한 폭력적인 행동들이 설명되었다. 말년의 그는 자신이 유명한 배우였다는 사실을 간신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느 영화에 출연했는지도 기억하기 힘든 상태였다. 1월에 그의 전처인 파텐 하마마가 세상을 떴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도 슬퍼하다가 곧 그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미셸 데미트리 샬훕은 1932년 4월10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레바논 출신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재상인이었고 어머니는 혁명 이전 왕가와도 친밀한 관계였던 사교계 인사였다. 카이로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잠시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런던의 왕립연극학교에서 수학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는다. 오마 샤리프라는 예명을 택한 그는 1954년, 파샤의 딸과 사랑에 빠진 농부의 아들로 나온 <불타는 태양>에서 당시 대스타였던 파텐 하마마와 공연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1955년, 그는 촬영장에서 사랑에 빠진 파텐 하마마와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까지는 아랍어권 밖의 관객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시기이다. 샤리프가 활동했던 1950~60년대는 이집트영화의 황금기였다. 나세르 정권 당시의 이집트영화계는 정치와 종교를 많이 건드리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를 누렸고, 당시 영화들을 보면 그 세속적인 태도와 로맨스의 묘사가 당시 서구 영화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평화의 땅> <고하> <사랑의 강> 등 20여편의 화려한 멜로드라마를 찍으며 아내 파텐 하마마와 함께 이집트영화계의 슈퍼스타로 활동한다.

아랍인이기 전에 오마 샤리프

하지만 우리가 아는 오마 샤리프는 1962년 데이비드 린이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셰리프 알리 역으로 그를 캐스팅하면서 태어났다. 원래 셰리프 알리 역은 프랑스 배우 모리스 로네에게 돌아갈 예정이었고 린은 보다 작은 역을 위해 영어가 가능한 아랍 배우를 캐스팅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오마 샤리프가 이집트에서 스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린은 그의 인상적인 외모에 매료되었다. 오마 샤리프의 연기를 본 린은 그가 셰리프 알리를 연기한다면 그의 크고 검은 눈이 로렌스 역의 피터 오툴의 파란 눈과 멋진 조화를 이룰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후 샤리프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콧수염을 기르라고 명령한 것도 데이비드 린이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영화상 가장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으로 알려진 등장 장면부터 오마 샤리프의 강렬한 존재감은 전세계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으로 그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다. 그 뒤로부터 오마 샤리프의 독특한 경력이 시작된다. 우리나라 올드팬들에게 오마 샤리프는 주로 <닥터 지바고>(1965)와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배우로 알려져 있다. 그와 줄리 크리스티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 그리고 모리스 자르가 작곡한 <라라의 테마>가 겹쳐지면 올드팬들의 회상은 완벽해진다. 하지만 영화 스타 오마 샤리프의 이 익숙한 존재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그들은 그가 얼마나 이상한 존재였는지 알아차리고 종종 깜짝 놀란다. 그는 20세기에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일급 스타로 활동한 거의 유일한 아랍 배우이며 이슬람교도이다. 이런 사람이 관객에게 아무런 저항감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몇 십년 동안 무비 스타와 섹스 심벌로 활동했던 것이다.

샤리프가 서구에서 맡은 역할들은 기괴할 정도로 다양했다. <창백한 말을 보라>에서 그는 스페인 신부였다. <노란 롤스로이스>(1964)에서 그는 유고슬라비아 레지스탕스였다. <닥터 지바고>에서 그는 스탈린 시대 소련의 시인이자 의사였다. <장군들의 밤>에서 그는 나치 장교였다. <마이얼링>에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였다. 그는 체 게바라였고, 칭기즈칸이었다. 심지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공연한 <화니 걸>(1968)과 <화니 레이디>(1975)에서 그는 유대인 도박사이기도 했다.

그의 이 독특한 위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가능했다. 첫째, 샤리프는 아랍어, 영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이를 통해 그는 어느 언어로건 능숙하게 옮길 수 있는 독특한 억양을 개발했다(그는 자신이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지만 어느 것도 완벽하게 할 줄은 모른다고 자조한 적 있다). 할리우드가 이국적인 외국인 주인공을 필요로 할 때 그는 경쟁력이 높은 배우였다. 둘째, 그는 편견이 적은 코즈모폴리턴으로 종교나 문화가 그의 경력을 가로막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세속적인 시대였지만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60년대에 이집트 배우가 유대인 캐릭터를 연기하고 심지어 같이 공연한 유대인 배우와 스캔들까지 일으키는 건 대담한 일이었다. 세 번째로, 그는 누가 봐도 선이 굵은 아랍계 얼굴을 가진 배우였으면서도 민족이나 인종보다는 배우 자신의 개성이 먼저 보일 정도로 스타성이 강했다. 그는 이집트인이나 아랍인이기 전에 오마 샤리프였다.

그의 영화 경력은 70년대부터 서서히 흐려졌다. 출국 문제로 나세르 정부와 잦은 충돌을 일으킨 그는 유럽에서 반강제적인 망명 생활을 했고 이에 잦은 여성 편력까지 겹치자 결국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불가능해질 걸 깨달았고, 결국 아내가 재혼할 수 있도록 이혼하고 만다. 이 무렵부터 도박벽이 심해진 그는 종종 카지노에서 잃은 거액을 메우기 위해 별 의미 없는 이류영화에 나와 의욕 없는 연기를 보여주곤 했다. 이후로 그는 영화배우보다 브리지 게임 선수로 더 활발하게 활약하며 관련 도서를 집필하거나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그는 전성기 때 겪은 온갖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토크쇼 호스트로서 더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영화배우로서 그의 경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ZAZ 사단(짐 에이브럼스와 주커 형제)의 1984년작 <특급비밀!>에서 보여준 시치미 뚝 뗀 코미디 연기는 인상적이었고 그가 세자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2003년 프랑스영화 <무슈 이브라임과 코란의 꽃>은 조건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오마 샤리프의 스타성과 매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해준 영화였다. 알츠하이머가 발병한 이후로도 활동을 완전히 접은 적이 없던 그의 마지막 작품은 단편애니메이션 <1001 Inventions and the World of Ibn Al-Haytham>(2015)에서의 목소리 연기라고 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