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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들만 남았다
송경원 2015-07-14

한국영화 표절 검증 시스템의 부재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흥행작들의 귀환이 이어지고 있다. 23년 만에 돌아온 <쥬라기 월드>는 2015년 상반기 최고의 흥행을 거뒀고 조지 밀러 감독이 10년 넘게 매달린 프로젝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평단의 찬사가 쏟아졌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2009)으로 사실상 시리즈의 사형선고를 받았던 ‘터미네이터’마저 “I’ll be back”을 또다시 읊조리며 스크린 위에 섰다. 그 시절 두근거림을 떠올리면 내심 반갑지만 한편으론 선뜻 환영하긴 어렵다. 흥행작들의 속편이나 프랜차이즈에 치우친 기획은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의 이야기 기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산업적 측면을 고려할 때 오리지널 스토리보다 프랜차이즈와 시리즈에 매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스튜디오들은 학습된 관객이 일정 정도의 흥행을 보장해준다는 통계상의 믿음을 바탕으로 곳간이 바닥을 보일 때마다 속편들을 쏟아냈다. 이러한 속편의 연쇄가 소위 장르, 시리즈, 프랜차이즈라는 이름의 영화산업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엔 그도 모자라 리부트, 리메이크, 프리퀄, 시퀄 등 이미 자리에 누운 이야기 앞에 ‘Re’의 인장을 찍어 끊임없이 무덤에서 꺼내어 되살리는 중이다. 종횡으로 이어진 프랜차이즈의 세계관과 리부트라는 이름으로 귀환한 흥행작들은 역설적으로 영화적 상상력의 빈곤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표절, 의혹은 넘치는데 결론은 없다

굳이 최근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의 이야기 가뭄을 언급한 것은 흥행작을 중심으로 한 반복과 변주, 조립이 상업영화-영화산업의 기초적인 속성이란 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영화에서의 표절을 여타 매체와 다른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 이후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표절에 대한 혐오와 고발은 영화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개봉 당시 이미 <포레스트 검프>(1994)와의 유사성을 지적받았던 <국제시장>(2014)은 이번엔 기획창작 아카데미 수강생의 졸업 작품을 도용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현재 이 사안은 콘텐츠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 신청 중이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이하 <해적>)의 표절 의혹도 있다. 구광렬 작가가 SNS상에서 자신의 소설 <반구대>의 인물, 설정 등 상당 부분을 무단으로 차용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국제시장>의 제작사 JK필름, <해적>의 제작사 하라마오 픽쳐스 모두 재고의 여지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저작권 위반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국제시장>과 <해적>의 표절 의혹을 최근 사회적 공분을 등에 업은 나 몰라라식 문제제기로 볼것인지, 아니면 그간 표절 문제를 외면해왔던 영화계의 곪았던 관행이 다시금 터진 것으로 봐야할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최근 표절에 대한 민감한 반응들을 보며 그간 숱하게 묻혀왔던 의혹들을 새삼 상기할 필요를 느꼈다. 개별영화의 표절 여부를 증명하는 건 이 글의 목적도아니고 짧은 글에서 가능하지도 않다. 표절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고의성 여부, 유사성의 정도 등적지 않은 검증과 절차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그 검증과 절차의 과정이 그간 암묵적 동조 내지 과정의 어려움을 핑계로 얼마나 간과되었는지, 그 결과 한국영화의 독창성에 관한 신뢰가 얼마나 상실된 상태인지에 대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한국영화에서 표절에 대한 구분과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전문가 집단은 전무하다. 정확히 그와 관련한 담론의 장을 마련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 영화계의 표절 문제는 소설이나 기타 영역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덜하지 않다. 영화의 역사, 좁게 한국영화의 역사는 가히 표절의 역사라 할 만하다. 물론 표절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표절과 인용을 가르는 기준은 일종의 관습에 가깝다. 예를 들어 창조적 모방에 대한 터부가 크지 않았던 초기영화의 경우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저작권의 개념이 분명해지며 표절의 구분과 적용은 좀 더 엄격해졌다. 문제는 기준은 바뀌었지만 관습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변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와 공론화 과정이 필요한데 한국영화의 표절 논쟁은 그같은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니, 의혹은 있어도 논쟁은 없었다.

표절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격차를 전제로 한다. 즉 내가 표절했다는 걸 대중이 모를 때 유효하다. 1960년대 충무로에서 불법 밀수한 일본 원작 소설을 베끼는 일이 유행한 건 이 때문이다. 일례로 1962년 신필름의 <아버지 결혼하세요>와 동아흥업의 <5색 무지개>처럼 같은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두 영화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원작자의 승인 따윈 깨끗이 무시해버리는 뻔뻔함을 내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여러 소설을 잘라서 짜깁기하는 ‘스카치테이프식 시나리오 작법’까지 등장했다. 같은 해 1월 시나리오작가 최금동이 <한국일보>에 ‘표절 작가를 고발하라’라는 칼럼을 실어 당시의 분위기를 비판할 정도로 표절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대놓고 표절을 하는 사례는 1990년대 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일부 비판도 제기되었지만 번번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영화가 표절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었던 1960, 70년대의 침묵이 80년대 이후에는 관행처럼 자리잡아 버린 탓이다. 간혹 제기되는 문제도 다수의 침묵과 빠른 사이클 속에 묻히기 바빴다. 흥행한 영화는 흥행을 이유로 논란이 수그러들고, 흥행하지 못한 영화는 인기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관심에서 멀어졌다. 산업의 사이클은 검증을 위한 시간적 여유를 허락지 않았다. 이쯤 되면 개별 영화의 표절 여부보다 표절이라는 지적 사기에 대한 도덕적 둔감이 더 큰일이다.

<국제시장>

심판에 앞서 논의의 장부터

또 하나의 문제는 이 과정에서 옥석을 가릴 수 있는 기회마저 함께 매장당했다는 점이다. 가령 프랑스영화 <아모레 미오>(1986)를 그대로 갖다 쓴 강정수 감독의 <리허설>(1995)과 모리타 요시미쓰의 <하루>(1996)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산 장윤현 감독의 <접속>(1997)의 차이를 대중은 인지하기 어렵다. 그저 둘 다 표절 의혹이 있었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넘어간 영화 정도로 기억된다. 전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후자는 유사성이 대수롭지 않은 정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일은 관행이란 이름으로 반복 학습된다. 결국 이 과정에서 표절과 인용, 재창조가 구분되지 않은 채 ‘의혹’이란 미명하에 도매금으로 묶여버릴 우려가 있다. 다소 억울한 영화들이 생기기도 한다는 말이다. 가령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2012)의 경우, 톰 롭 스미스의 소설 <차일드44>와 일부 장면에 대한 표절 의혹은 꼼꼼한 장면 분석과 검증이 필요한 사안이다. 영화 초반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이 아내를 의심하게 되는 장면의 설정, 인물 구도, 대사에 대한 유사성이 제기됐는데, 실제로 몇몇 장면에서는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다만 유사성만으로 표절을 의심할 수는 없다. 아직 의혹 단계임에도 표절이라는 모호한 낙인이 찍혀 휩쓸릴 수 있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영화는 장르적 클리셰와 차용의 범주가 극적으로 넓은 매체다. “사실과 진실을 떠나 부분적으로 캡처해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건 문제가 있다”라는 당시 류승완 감독의 인터뷰는 이 점을 지적한다.

표절을 정의하는 건 표절을 증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매체마다 다르고 상황과 시대에 따라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영화 속 표절과 오마주 역시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세부적인 논의가 더해져야 하겠지만 대략 표절과 오마주의 구분은 레퍼런스 차용의 목적과 사실의 적시 여부, 그리고 저작권의 침해 정도에 달렸다. 여기서 핵심은 유사성의 정도가 아닌 그 목적이다. 쉽게 말해 어떤 의도로 해당 내용을 가져왔는지, 차용해왔다는 사실을 적시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창작의 범주에 따라 표절과 도용, 오마주와 차용이 구분된다고 하지만 영화만큼 창작과 인용, 재해석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깝고 구분되지 않는 분야도 드물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 산업적인 이유와 학습의 결과로 여타 다른 문화예술분야에 비해 반복과 변주, 차용과 참조에 관대한 편이다. 이는 (스튜디오 중심의) 영화가 온전히 개인의 창작물이 아닌 집단예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출자에 의해 전체 방향이 설정되고 통제되기는 하지만 수많은 각색과 프로덕션 단계에서 여러 스탭들의 창의성이 공동으로 녹아들어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 경우 최종 창작물이 최초의 아이디어 제공자, 각본가, 감독 중 누구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예술에 순수창작이란 존재하지 않고,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하지만 텍스트의 재축조 자체를 산업 체계 전면에 내세운 매체는 영화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만하다. 설사 논란이 일더라도 창조적 모방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갈 길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무의식의 발로든, 상대를 혹은 자신을 속이는 순간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표절은 상대를 향한 거짓말이지만 레퍼런스가 서로 복잡하게 뒤섞이고 구분이 어려워질수록 스스로를 향한 거짓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적어도 창작자 스스로는 표절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는 믿음은 이제 순진한 판단이 됐다. 진정 심각한 표절은 상업적 이익을 목적으로 시장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다. 도용과 차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창작자의 윤리의식이 마비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시스템의 침묵이 더해지면 표절과 표절 아닌 것의 구분마저 어려워진다. 문득 한국영화가 지금 그 단계를 지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한국 문단이 공공연한 표절 행위를 알면서도 암묵적인 침묵으로 방관하고 있었다면 영화계는 표절 여부를 결정할 공신력 있는 가이드라인마저 전무한 실정이다. 심지어 숏 바이 숏으로 표절 여부를 증명해낸다고 해도 침묵과 망각으로 일관해왔다. 짧은 논란의 기간이 지나면 이미 영화의 수명, 흥행 여부가 판가름나는 산업 시스템은 이같은 무관심, 무대응에 일조했다. 재창조, 인용과 오마주의 허용 폭이 넓은 영화의 특수성 역시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왔다.

현재 터져나오는 표절에 대한 혐오와 거부반응은 그간 검증 없이 표절을 묻어온 현실을 지켜보며 축적해온 반감처럼 보인다. 2011년 <최종병기 활>과 <아포칼립토>(2006),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데이브>(1993), 2013년 <스파이>와 <트루 라이즈>(1994) 등 줄줄이 유사성의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저 의혹과 논란에 그치고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으니 어쩌면 이슈만 있으면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한국영화의 표절 문제는 한을 풀지 못한 원귀처럼 떠돌아다니고, 때때로 되살아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강요된 망각이든 과잉 정보에 의한 망각이든, 시스템이 진실을 묻어버리는 과정과 이를 통한 좌절을 경험한 대중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숨을 한번 고르고 분노한 에너지의 방향이 단순한 한풀이에 그치는 걸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열명의 범인을 놓쳐도 한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건 표절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타인의 창작물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표절은 수치스러운 범죄 행위다.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훔친다는 행위의 원죄를 피할 순 없다. 다만 최근 한국 사회 전반에 드러난 표절에 대한 혐오와 시스템에 대한 실망감으로, 일률적 잣대를 통해 영화계의 표절 사례까지 재단하려는 시도는 무리가 있다. 표절이라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단어 안에 모든 경우의 수를 우겨넣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처벌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준과 레퍼런스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도 몇년간의 표절 의혹이 거론된 영화들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표절인지 아닌지 흑백을 단정짓기 이전에 단순 인용인지, 오마주인지, 패러디인지, 장면 차용인지, 모티브를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확장과 재창조인지 범주와 의미를 가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한국영화가 미뤄온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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