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1) 미간을 찡그리고 입을 약간 벌린 채 “이 지랄맞은 미스터리는 뭐죠?” (표정2) 양 눈썹을 한껏 위로 치켜세운 후 가식적일 만큼 크게 웃으며 “예스, 아이 두!” 내가 기억하는 배우 로라 던의 표정은 이 두 사이를 오간다. <블루 벨벳>에서 <인랜드 엠파이어>까지 데이비드 린치 작품에서의 표정이 첫 번째라면, <아이 엠 샘>을 거쳐 <안녕, 헤이즐>과 <와일드>에 이르는 강인한 엄마 역할의 로라 던은 두 번째 표정으로 대변된다. 이 두 사이의 간극이 큰 만큼 로라 던이라는 배우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의 편차도 크다. 기이하게도 로라 던이라는 배우에게는 불온함과 건강함, 수수께끼와 생의 예찬, 피상성과 은밀함이 공존하고 있다.
178cm의 깡마르고 흐느적거리는 큰 신장, 금발의 긴 얼굴형에 울상에 가까운 입매.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밋밋하고 매혹적이라 보기에는 볼륨이 적다. <광란의 사랑>과 같은 폭주하는 영화도 있었지만 젊은 시절 그녀의 이미지는 타오르는 듯한 섹시함과 거리가 있는 기묘하고 나른한 섹시함에 가까웠다. 그 시절 로라 던은 <블루 벨벳>에서처럼 좀더 매력적인 여성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마는 불운한 여인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 안젤리나 졸리에게 약혼자 빌리 밥 손튼을 빼앗긴 사건은 1990년대 후반의 뜨거운 루머 중 하나였는데, 가십난에서조차 그녀는 안젤리나 졸리의 유명세에 완패하고 말았다(레니 할린, 제프 골드블룸, 빌리 밥 손튼 등 비교적 장신의 영화계 인물을 거친 로라 던은 가수 벤 하퍼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활동했지만 로라 던은 인공적인 웃음, 금발머리, 선량한 인상 등에서 1980년대식 미인(슈퍼모델이 아니라 미스아메리카에 가깝다고 생각해보라)의 전형성을 띠고 있었다. 그녀 특유의 조숙하고도 시대착오적 이미지가 쉽게 질려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오산이 될 듯하다. 더이상 그녀는 미스터리에 심취한 금발의 백인 여고생(<블루 벨벳>)도 검은 가죽 브래지어 차림으로 오픈카에 올라탄 섹시 걸(<광란의 사랑>)도 아니다. 간혹 그녀는 의외의 영화에 나타나 관객을 놀라게 했다. <쥬라기 공원>(1993)에서는 지적이고 유능한 에이미 박사로, <아이 엠 샘>(2001)에서는 인정 많은 양모로 등장하며 배역의 폭을 넓혔다. 보다 최근의 <마스터>(2013)에서는 ‘코즈’ 조직을 이끄는 마스터 랭카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후원자로, <안녕, 헤이즐>(2014)과 <와일드>(2014)에서는 긍정적인 엄마 역할로 등장해 인상을 남겼다. 지금 그녀는 비슷한 연배의 여배우들과 행보를 달리하며 여배우이자 제작자, 작가로서 다방면에서 왕성히 활동 중이다.
로라 던은 1967년 배우인 브루스 던과 다이앤 래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영화판과 가까웠던 그녀는 7살 때 마틴 스코시즈의 <엘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1974)에 아역으로 출연한 뒤 자잘한 단역을 거쳤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기의 길을 선택한 그녀의 본격적인 데뷔작은 13살 때 촬영한 <레이디스 앤 젠틀맨, 더 페뷸런스 스테인스>(1982)다. 다이앤 레인 주연의 이 영화에서 로라 던은 펑크록 밴드를 결성한 발칙한 10대 소녀 역을 선보였다. 이어 데이비드 린치 감 독의 <블루 벨벳>과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광란의 사랑>(1990)에 출연한 199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로라 던의 황금기였다. 이후 TV드라마 <저공비행>(1992)을 통해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데뷔작 <시티즌 루스>(1996)로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93년 로라 던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블록버스터 <쥬라기 공원>의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로라 던은 특유의 뇌쇄적 백치미를 쇄신하려는 듯 지적이고 가족친화적인 이미지를 선보였다. 그녀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시티즌 루스>라는 미국의 낙태금지를 다룬 풍자극에 등장하여 막무가내 약물중독자이기에 ‘부적격 모성’을 지닌 여성 루스 역할을 태연하게 해냈다. 로버트 알트먼의 <닥터T>(2000)에서는 상류층의 권태에 빠진 여성을 연기하며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양친이 배우이지만 로라 던은 특히 어머니와 함께 출연한 작품이 많다. 1992년 로라 던과 모친 다이앤 래드는 1930년대 미국 중산층 가족과 가정부의 이야기를 다룬 <넝쿨 장미>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됐다. 다이앤 래드는 <광란의 사랑>에서 딸의 연인을 가로채려는 욕망에 반은 미쳐버린 중년의 팜므파탈로 등장해 섬뜩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이후 <대디 앤 뎀>(2001), <인랜드 엠파이어>(2006)에 딸과 함께 등장했던 다이앤 래드는 로라 던이 제작, 주연, 공동각본을 맡은 <HBO> 드라마 <인라이튼드>(2009~2011)에서 여주인공 에이미의 친엄마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여배우 로라 던을 분명히 각인시킨 작업들은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이었다. 성숙한 외모의 여고생 샌디 역의 <블루 벨벳>과 미친 사랑에 빠진 룰라 역의 <광란의 사랑>을 통해 그녀는 불안한 10대에서 일탈적인 20대까지의 필모그래피를 데이비드 린치 감독과 채워나갔다. <블루 벨벳>의 클라이맥스에서 남자친구 제프리(카일 맥라클란)의 사랑을 확인한 후 충만한 기쁨에 빠져 돌아온 샌디가 집 앞에서 나체의 도로시(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만나 그녀가 제프리와 동침했음을 짐작하는 대목에서 보여주는 ‘경악’의 표정은, 로라 던이라는 배우의 그로테스크한 울상을 각인시키는 표정인 동시에 데이비드 린치 영화를 대변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광란의 사랑>의 룰라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기에 어딘가 로라 던의 이미지와 어긋나게 느껴진다. 샌디의 표정은 2006년 데이비드 린치와 작업한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가공할 미스터리에 처하지만 기묘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난해한 의미들을 천천히 수면 아래로 침전시키면 어렴풋이 이 ‘경악’에 가까운 로라 던의 표정만이 남는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로라 던은 TV드라마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인정받기 시작한다. 중요한 계기는 시나리오작가이자 제작자인 마이크 화이트와의 만남이다. <스쿨 오브 락> <나쵸 리브레>의 시나리오작가인 마이크 화이트의 첫 TV드라마 데뷔작인 <이어 오브 더 도그>(2007)에 주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한 로라 던은 <인라이튼드> 시리즈에 이르면 주연 및 공동 시나리오작가로 마이크 화이트와 콤비를 이루게 된다. 로라 던은 이 작품으로 2012년 골든글로브 TV시리즈(코미디와 뮤지컬)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최신작 <와일드>는 주인공 셰릴 역의 리즈 워더스푼뿐 아니라 엄마 역의 로라 던까지 주연상과 조연상 후보로 올려준 영화다. <안녕, 헤이즐>에서 아픈 딸을 꿋꿋하게 지원하는 엄마 역할을 했던 로라 던은 이어 <와일드>에서도 억척스럽게 딸을 키웠지만 불행하게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엄마를 맡았다. 건강한 모성을 표현하는 로라 던의 연기에는 특유의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금발 머리를 질끈 묶고 체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씩씩한 엄마는 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품고 언제나 무언가를 배우는 자세로 삶을 긍정한다.
Magic hour
기이하고 명랑한
많은 사람에게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은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영화로 기억되겠지만, 로라 던이 연기한 샌디는 이후 TV드라마 <트윈픽스>로 이어지는 중요한 여성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파스텔 핑크색 옷을 즐겨 입는 백인 중산층 여고생 샌디에겐 미스터리에 대한 남다른 충동이 있다. 이 충동은 거의 성적 기벽처럼 보일 정도다. 백인 중산층 가정에 모범적인 남자친구도 있지만 내면에는 일탈에 대한 열망을 품고 언제든 기회만 된다면 정숙이나 순결 따위 던져버리고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떠날 준비가 된 조숙한 소녀. 미스터리를 파고들수록 백인 중산층 가정의 모델하우스같이 기괴하고 깔끔한 이미지가 증발되고 그로테스크한 환상의 이면이 드러난다. <블루 벨벳>에서 샌디는 울새가 오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신비주의적 낭만성을 지닌 소녀다. 영화의 결말에서 울새는 징그러운 벌레를 입에 물고 창가로 도래한다. 보고 싶은 만큼만 보기에 소녀에게 세상은 기이하게 긍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