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이력에서 일종의 전환점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 <사이클리스트>(1989)의 주인공 나심은 이란에 와 있는 아프간 난민이다. 그에게는 중병에 걸린 아내가 있는데 그의 가난한 처지로는 도저히 아내의 치료비를 댈 형편이 못된다. 돈이 될 일이라면 그 어떤 것에도 손을 대야 할 판에 놓인 그에게 적지 않은 돈을 만질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광장에서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내내 자전거를 탄다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비록 노쇠했지만 왕년에는 자전거 경주 챔피언이기도 했던 나심은 오로지 아내를 머릿속에 그리고는 자전거에 오를 결심을 한다. 그런 그에게 일주일 후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자전거에서 내려오는 것은 스스로 아내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게 된다.
<칸다하르>의 주인공 나파스는 <사이클리스트>에 등장하는 이 사내의 연장선에 서 있는 인물이다. 아내를 살리겠다는 일념에 밤낮으로 쉬지 않고 광장의 좁은 원을 맴돌아야 했던(그럼으로써 아프간 난민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던) 나심과, 20세기의 마지막 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말겠다는 동생을 구해보려고 그 비극적인 일이 생길 날 전까지 칸다하르에 닿으려 애태우는 나파스는 같은 피를 나눈, 그리고 유사한 운명에 처한 동포임에 분명해 보인다. 나심과 나파스 사이에 놓여진 10여년이 그 사람들에게 무언가 진척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져다준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주행 반경 주위를 조심스레 도는 나파스의 맴돎이거나 쉽게 당도하기 어려워 보이는 곳을 향해 가는 나파스의 걸음걸이나 모두 영 불안해 보이는 데다가 그렇다고 무턱대고 ‘희망’을 약속해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나심과 나파스는 그렇게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고통을 보여주는 매개자적인 인물들인데, 이 둘 가운데에서 그들 고국의 고난을 좀더 직접적으로(은유적으로가 아니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아무래도 나파스쪽일 듯싶다. 이건, 쉽게 이야기해 나파스의 움직임, 즉 직접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향하는 그녀의 행보, 또는 행로 자체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보면 된다. <칸다하르>는 나파스의 움직임을 뒤쫓는 일종의 로드 무비이다.
당연히 그녀는 목적지까지의 힘든 여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만나는 그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이란 사회의 현실을 단편적이나마 보여주는 역할을 맡게 된다. 코란 학교에서 쫓겨남으로써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수중에 돈을 쥐어야만 하게 된 소년 칵, 성전(聖戰)에 참여했다가 지금은 마을에서 의사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계 흑인 사히브, 곳곳에 산재해 있는 지뢰 때문에 팔과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부르카를 입고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감추며 살아야 하는 여성들 등 나파스가 보고 만나는 인물들이 아프가니스탄의 비참한 현실을 가시적으로 구성해주는 것이다. 나파스의 이 여정은 아프가니스탄이란 현재 세계적으로 거의 잊혀진 나라의 상(像)을 만들어주는 구성의 여정이면서 또한 그 비극적인 상을 세계인들에게 알려주려는 인지의 여정이다.
잊혀진 땅을 찾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최신작인 <ABC 아프리카>도 마흐말바프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로드무비라 부름직한 영화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발걸음을 옮겨가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을 지켜보고 또 그들을 만나는, 여정의 에이전트는 바로 키아로스타미 감독 자신이다. 우간다의 어린이들을 염려하는 여행자-관찰자인 키아로스타미는 그의 이전 영화에서 이미 등장했던 한 영화감독, 즉 이란의 한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에 출연했던 아이들의 생사가 걱정되어 그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염려 섞인 여행에 기꺼이 몸을 실었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의 (실제와 허구 속 양쪽 모두의) 영화감독의 모습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 여행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국인 이란을 벗어나서 여전히 아이들을 걱정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우간다의 고통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여행기/ 관찰기를 작성해왔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ABC 아프리카>이다.
이것을 찍으러 키아로스타미가 다녀온 우간다라는 지역도 <칸다하르>의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인지 작용을 할 만한 어떤 데이터가 거의 없는 나라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런 미지의 나라에 대한 상을 만들어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려 한다는 점에서 <ABC 아프리카>는 <칸다하르>와 만나는 영화임이 드러난다.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라는 현재 이란 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시네아스트의 ‘만남’이, <클로즈업>(1990)에서의 둘의 미묘한 만남 이후 직접적이진 않지만 꽤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클로즈업>은 이란의 한 실직자가 부유한 집안을 상대로 ‘유명 영화 감독’ 마흐말바프 행세를 했었던 실화를 픽션과 실제가 뒤섞인 방식으로 그려낸 키아로스타미의 걸작이다).
사실 <칸다하르>와 <ABC 아프리카>는 그 태생부터가 닮은 데가 있는 그런 영화들이다. <칸다하르>의 기원은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 나파스 역을 맡은 닐로우파 파지라가 마흐말바프를 찾아간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망명자인 그녀는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친구가 고국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탄압에 못 견뎌 자살하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영화 속에서 나파스가 동생에게서 그랬듯이). 파지라가 마흐말바프를 찾아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 마흐말바프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현실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ABC 아프리카>도 키아로스타미가 외부로부터의 ‘요청’을 받고 작업에 착수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마흐말바프의 경우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유사하다고는 볼 수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사무실에 팩스가 수신되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거의 200만명에 이르는 우간다의 부모 잃은 아이들에 대해 세계인들의 관심을 환기할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우간다 고아구제여성단체(UWESO)의 요청이 <ABC 아프리카>의 시발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두 거장의 인식론적 겸양
이 외부로부터의 요청이라는 출발점은 두 영화가 견지하는 이방인의 시선에 대해 일정 정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칸다하르>의 여행자-관찰자인 나파스의 경우도 비록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을 빠져나와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다시 찾은 고국에서 이젠 적어도 반쯤은 이방인인 그런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이방인 특유의 머뭇거림 혹은 주저가 알게 모르게 배어있다. <ABC 아프리카>의 시선을 이끌고 있는 키아로스타미의 이방인적 시선에 대해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흐말바프나 키아로스타미나 모두 그 자신들이 자기 영화들이 이 이방인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일례로 <ABC 아프리카>에서는 카메라를 든 키아로스타미의 키 높이 그대로의 각도에서 아이들을 포착하는데 이건 키아로스타미 스스로 자신이 관찰자임을 굳이 숨기지 않겠다는 생각의 소산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둘은 자신들이 세계적인 관심을 환기해야만 할 중차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인식하고 있음에도 자기가 다루는 이슈를 가지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칸다하르>는 아프가니스탄이 처한 복잡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회의 다양한 단면들을 나열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이 배고픔에 신음하고 있고 사람들이 팔 다리가 잘려나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며 또 여성들은 인간 취급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그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ABC 아프리카> 역시 설명에의 과욕을 절대 부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말 그대로 우간다의 아이들, 그것도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고개를 떨구는 아이들이 아니라 여느 세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앞에서 건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길 즐기는, 다시 말해 삶의 약동을 지닌 아이들이다(그래서 <ABC 아프리카>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 가운데 음악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영화로 꼽을 만하다). 키아로스타미는 그들을 담은 필름을 보여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어느 미지의 땅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어깨를 한번 툭툭 쳐줄 수 있는 여유, 혹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다. 인식론적 겸양의 태도라 부름직한 그런 것이 <칸다하르>와 <ABC 아프리카>가 공유하는 기본적인 태도라면 그것으로부터 전자는 비판을, 그리고 후자는 격려를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교차,
그런데 사람들의 눈과 인식을 자극할 만한 마흐말바프의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반면(이를테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의족을 주으러 목발 짚은 사람들이 뛰어가는 인상적인 장면 같은 경우는 얼마 안 있어 아프가니스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노래하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같이 박수를 치는 키아로스타미의 태도는 아직 열띤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유순한 키아로스타미의 태도를, 나쁘게 말하면 방관자의 그것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평론가 조나단 로젠봄이 지적한 대로 <ABC 아프리카>가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그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 못하는 영화인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이지만 실은 키아로스타미의 다른 영화들처럼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신중하게 슬쩍 넘어서고 그럼으로써 우리들을 영화로 개입시킨다는 것이 로젠봄의 지적이다. <ABC 아프리카>는 키아로스타미가 우간다에 도착하는 것과 그곳에서 그가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다큐멘터리이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이 보여주는 것은 키아로스타미가 아니라 흑인 아이와 그를 입양한 오스트리아인 부부이다. 이것을 보면서 이제 우리는 앞으로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한번쯤 자문하게 된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적 형식에서 픽션적 형식으로 이월하고 관찰의 의무는 영화감독에게서 우리들에게로 넘겨진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를 왕복하는 것은 물론 <칸다하르>에서도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 영화는 스토리 구성 면에서 봤을 때는 수난기의 형식을 띤 픽션 같지만 그 안에는 다큐멘터리적인 것으로 들어차 있다. 예컨대 카메라는 그것이 보여주려는 게 결코 픽션만은 아님을 웅변하려는 듯 픽션의 주인공인 나파스보다 한발 앞서 어떤 장소에 도착해서는 현실 자체를 상기시키려는 ‘다큐멘터리’로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곤 한다.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오가면서 여하튼 현실을 끌어들이려는 세심한 고심과 노력에서 <칸다하르>와 <ABC 아프리카>는 최종적으로 만나게 된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