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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앤 뉴, 조화는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의 ‘추억팔이’를 편하게 즐기라

‘복고’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전의 좋은 것이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것보다는 과거의 것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쪽 이미지 모두를 상황에 맞게 조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지겨울 정도로 복고가 많았기 때문일까. 복고에 대한 이미지는 후자로 기울어지는 것 같다. 문화계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능력을 잃고 자꾸만 과거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복고 경향이 현재와 과거의 생산적인 만남이 아닌 단순 ‘추억팔이’ 성향이 짙다는 것도 이 인식을 부추기는 것 같다. 아무리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 보태야 예술이고 창작이랄 수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서랍장에서 사진 꺼내서 보듯 추억만 추구하는 현재의 한국 문화계를 과연 ‘창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곳곳에서 진단이 나오고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이하 <토토가>)는 아마도 이런 비판에 기름을 끼얹는 기획일 것이다. 여기엔 ‘재현’ 이상의 그 어떤 새로움도 없다. 예전 가수들을 그대로 섭외했고 그들의 히트곡을 예전과 ‘똑같이’ 들려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토토가>는 추억을 소환하는 기획이었지 1990년대 음악계를 재평가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열광했던 사람들도 대부분은 추억과 그리움에 젖어 방송을 지켜봤다. 다들 뻔히 아는 노래인데도 SNS가 눈물과 감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은 아마도 음악의 힘보다는 추억의 힘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이냐면, 이런 비판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추억에 초점을 맞춘 복고 경향이 음악계, 나아가 문화계를 정체되게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내 생각엔 결코 그렇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억과 새로운 것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우린 이 둘을 놓고 굳이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다. 가끔은 추억도 즐기고, 그러다가 새로운 것도 즐기고, 그렇게 둘을 조화롭게 아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복고 트렌드 속 대중음악의 굵직한 변화들

객관적인 팩트부터 검증해보자. 가요계에서 복고 트렌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0년대 초반 등장한 ‘7080 열풍’부터다. 그 이후로 끝없이 복고가 이어져왔다. 7080, 8090, 리메이크 앨범의 유행, ‘밤과 음악 사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커버곡 열풍까지.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서부터 <당신만이>까지, 지난 10년은 복고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10년 넘는 세월 동안 과연 가요계에 아무런 새로움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훗날 가요사에서 비중 있게 기록될 굵직한 사건과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일단 아이돌 트렌드가 시작됐다. 이건 변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지각 변동이었다. 가요계의 판이 뒤흔들렸고 나아가 연예계 전체의 톤이 달라졌다. 심지어 아이돌은 한류의 범위를 아시아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확대했다. 한국 가수가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나와 퍼포먼스를 선보인다는 건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소녀시대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싸이는 어떤가. 빌보드 싱글 차트 2위를 기록하며 가요의 역사를 다시 썼다.

가요계의 고질병으로 지적돼오던 지상파 권력의 문제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면서 지상파를 거치지 않고도 인기를 얻는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크레용팝이 대표적인 예다. SNS상의 ‘밈’ 열풍을 타고 음원 차트 맨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엑스아이디(EXID)의 <위아래> 역시 마찬가지다. 멤버 하니를 찍은 직캠(직접 찍은 동영상)이 화제가 되며 음원에 이어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서까지 1위를 거머쥐었다. 힙합 신의 디스전은 또 어떤가. 포털 사이트상에서의 화제와 SNS상의 음원 공유만으로 힙합의 대중화라는 거대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당시 이센스의 래핑은 현재 가요계의 가사 트렌드에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에픽하이의 <Born Hater>가 이토록 인기를 끄는 데에는 디스전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한 공연 붐과 페스티벌 문화도 예가 될 수 있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동시대 스타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투어 일정을 짤 때 한국을 포함하는 것이 예삿일이 됐다. 아시아 지역이, 그중에서도 한국이 전세계 공연계의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한 공연 일정에 매달 해외 슈퍼스타들이 하나둘 포진해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이젠 꽤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도 여전히 이곳이 한국인가 싶다. 페스티벌 문화도 새롭긴 마찬가지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이렇게 많은 음악 축제를 즐긴 세대는 우리가 유일하다. 비록 포화 상태라는 비판은 있지만 잘만 성숙된다면 지금 세대야말로 새로움을 만들어낸 첨병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경험을 되돌아봐도 과거와 새로움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일단 나는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음악평론가로, 20대 초반엔 현재 음악보다도 고전들을 더 많이 들었다. 내가 충분히 만족할 정도로 옛 음악에 대한 지식이 쌓이기 전까진 현재 음악은 듣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진 적도 있었다(시간이 부족해서였다). 하지만 신기한 건 그럴수록 현재 음악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이 강해지기보다는 새로운 걸 자꾸 듣고 싶어진다는 것이었다. ‘혹시 내가 뒤처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기도 했고, 옛날 사운드의 아날로그 질감에 질려 쩌렁쩌렁하고 자극적인 일렉트로닉 기계음을 일부러 찾아듣기도 했다. 아마도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균형’을 찾아가려는 성향이 갖춰져 있는 것 같고 나 역시 그랬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돌풍을 일으키는 와중에 샤이니 종현의 신곡이 단박에 차트 정상을 차지한 것도 비슷한 예가 아닐까. 큰 시선에서 보면 음악계의 신구 균형은 어느 시점에서나 적절히 맞춰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깐의 추억과 새로움에 대한 열망

29살에 20대의 마지막 여행을 갔을 때도 떠오른다. 10살 단위가 바뀌는 시점이어서 그랬는지 여행을 다니는 내내 옛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고 그래선지 어렸을 때 듣던 음악을 정말 많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좋아해본 팝송인 블러의 <Girls and Boys>를 시작으로 중학생 시절 내 방의 핀업 걸이었던 그웬 스테파니의 음악, 대학생 때 방황하며 들었던 이적의 노래들까지, 수도 없이 많은 예전 곡들이 내 추억팔이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그 순간들이 내가 새로운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했거나 익숙한 것으로만 돌아가게 만들었느냐. 결코 아니었다. 추억은 잠깐이었고 그 기분이 사라지자 언제였냐는 듯이 다시 신곡을 찾아들었다. 나는 둘을 대립 관계로 놓고 살아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어떨 때는 과거에 빠졌고, 어떨 때는 다시 자연스럽게 신곡으로 이동했다. 여러 예들을 거칠게 훑느라 조금 두서가 없었던 것 같지만,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새로운 것이 무조건 선이 아닌 것처럼, 과거, 심지어 추억팔이마저도 무조건 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요즘의 비판이 무조건 옛것이 나쁘다고 매도하는 논조가 아님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진부해질 정도로 계속된 복고 열풍 와중에도 새로운 것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고 우리는 현명하게도 신구의 균형을 잘 맞춰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토토가>를 그냥 즐겼으면 좋겠다. ‘밤사’도 가고, 옛날 음악도 맘껏 듣자. 그리고 그게 질릴 즈음, 다시 새로운 음악에 관심을 갖자. 이게 꼭 선후 관계가 아니어도 좋다. 엄정화의 <초대>를 듣다가 다음 곡으로 노을의 <목소리>를 들어도 좋다. 어쩌면 우리는 늘 그렇게 해왔는데, 괜한 비판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신구는 적이 아니다. 함께하고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