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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스의 TV 정복
주성철 2015-01-08

<애로우>와 <에이전트 오브 쉴드>를 지나 <고담>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드라마 지각변동 일으키는 코믹스-드라마

<다크 나이트>

코믹스 미드 전성시대다. 이미 스크린을 장악한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들이 재빠르게 TV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는 것. 지난해 마블 코믹스는 <어벤져스>(2012)에서 모티브를 따와 TV 드라마로 만든 <에이전트 오브 쉴드>로 톡톡하게 재미를 봤고, 그보다 앞서 DC 코믹스는 악당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날리는 또 다른 ‘다크 나이트’ 히어로 <애로우>를 선보이며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배트맨>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미드 <고담>은 DC 코믹스의 독주체제를 굳건히 했다. <고담>을 중심으로 스크린에 이어 TV 정복까지 나선 코믹스 슈퍼히어로들의 신세계를 살펴본다. 옛날 옛적 고담에서 무슨 일이?

<고담>은 <배트맨2>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였던 '펭귄맨' 오스왈드 코블팟의 과거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펭귄이라 부르지 마!” 다시 봐도 걸작인 팀 버튼의 <배트맨2>(1992)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역시 대니 드비토가 연기한 ‘펭귄맨’(본명 오스왈드 코블팟)이었다. 귀족 집안 출신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런 괴상한 모습이었던 펭귄맨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하수도의 펭귄들에게 길러졌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만 외모에 대한 열등감과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는 그를 고담시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악당 중 하나로 만들었다. 현재 <FOX>를 통해 11회까지 방송된(애초 16부작으로 기획됐다가 인기에 힘입어 22부로 늘었다), 한국에서는 OCN을 통해 3회까지 방송된 <고담>은 지금껏 팀 버튼, 조엘 슈마허, 크리스토퍼 놀란을 거쳐 영화화된 그 모든 <배트맨> 시리즈의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고담’이다.

현재까지 가장 큰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인물은 바로 고담 정복을 꿈꾸는 여자 보스 피쉬 무니(제이다 핀켓 스미스)를 위해 일하고 있는 오스왈드 코블팟(로빈 로드 테일러)이다. 자신의 우스꽝스런 외모와 걸음거리를 두고 펭귄이라 놀리는 사람들을 향해 서슴없이 총구를 겨냥하는 그 광기 어린 모습은, 이후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지만, 바야흐로 <고담>을 기점으로 미드 또한 DC와 마블 슈퍼히어로들의 무대가 된 것 같다. 배우들의 출연료와 특수효과 등 갈수록 미드들의 회당 제작비가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회당 제작비가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보다 높은 30억원을 돌파한 지는 꽤 됐고, <고담>의 경우 회당 제작비가 40억원 이상이다) DC와 마블 코믹스의 TV 정복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애로우>

<스몰빌>에서 시작해 <애로우>까지

슈퍼히어로 미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2001년 시작되어 2011년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시즌10을 방송한, 배우의 성장과 함께한 기간으로만 보면 ‘슈퍼맨 <보이후드>’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스몰빌>이다. 현재 <CW>의 전신인 <WB>를 통해 스몰빌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영화 <슈퍼맨> 시리즈로 친숙한 클락 켄트(톰 웰링)의 스몰빌 ‘고딩’ 시절부터 30대의 초반 시절까지 재구성했다. 리처드 로너의 <슈퍼맨>(1978)에서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어느 날 뚝 떨어진 아이의 과거와, 세월이 흘러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로 살아가는 현재의 클락 켄트(크리스토퍼 리브) 사이의 지워진 시간을 메우고, 영화에서는 대사 한마디 없었던 슈퍼맨의 지구인 부모의 일상을 볼 수 있었던 미드였다. 슈퍼히어로와 그를 둘러싼 빌런들의 과거를 재구성했다는 측면에서, <고담> 또한 이같은 전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보다 앞서 1993년부터 1997년까지 <ABC>에서 시즌4까지 만들어진 <로이스 앤 클라크>도 있다. <슈퍼맨> 시리즈에서 로이스(테리 해처)와 클락(딘 케인)의 관계에 보다 집중하며 로맨스를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최근 코믹스 미드 붐을 일으킨 것은 역시 <CW>의 <애로우>다. 국내에는 덜 알려진 슈퍼히어로지만 DVD와 블루레이로도 출시돼 있다. 2012년 시작되어 현재 북미 지역에서 시즌3가 방영되고 있는 <애로우>는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그린 애로우(Green Arrow)를 실사 드라마로 만든 것. 억만장자 플레이보이였던 올리버 퀸(스티브 아멜)은 항해 도중 난파된 후 행방불명되어 지난 5년 동안 사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그가 북중국해의 외딴섬에서 발견되어 다시 스탈링 시티로 돌아온다. 그리고 밤이 되면 후드 복장을 한 활의 명수 그린 애로우가 되어 아버지가 넘겨준 명단에 따라 정의를 위한 ‘제거’ 작업을 시작한다. “넌 도시를 망쳤어!”라는 판결과 함께 정의의 화살을 날리는, 액션 미드로서 <애로우>의 파괴력은 상당하다. 화살을 벽에다 쏘아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공간 이동을 하기도 하고, 첨단 도시에서 총을 든 악당들과 오직 날렵한 화살로만 승부하는 그 원시적인 모습에서 묘한 쾌감이 더해진다. 범죄로 가득한 스탈링 시티를 고담으로 치환하고, 올리버 퀸 또한 어쨌거나 부유한 이중생활을 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애로우>는 여러모로 같은 DC 코믹스의 <배트맨>과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닮았다. 하지만 팬들이라면 결정적인 차이를 알 것이다. 배트맨은 절대 살인을 하지 않지만, 애로우는 마지막 경고를 어긴 이들의 가슴팍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화살을 쏜다.

<에이전트 오브 쉴드>

<애로우>의 재미는 여러모로 또 다른 레전드 미드 <로스트>를 떠올리게도 한다. 올리버 퀸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지난 5년 동안 외딴섬에서 어떻게 지냈나, 하는 궁금증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한다. 하나둘 악당들을 제거해나가는 애로우의 활약상의 한편에서 섬에서 겪었던 일들이 수시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이상한 기운으로 가득한 의문의 섬이라는 설정, 더 나아가 배가 난파되면서 5년 동안 겪었던 일들의 배후에 뭔가가 있다는 설정은 <로스트>와 흡사하다. 친구 토미(콜린 도넬)도 5년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올리버 퀸에게 지난 세월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로스트>가 끝났어. 주인공들 다 죽었어.” 이같은 DC 코믹스 전성시대에 눈에 띄는 마블 코믹스의 반격은 바로 영화 속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세계를 공유하는 <ABC>의 <에이전트 오브 쉴드>다. 2013년 시작되어 현재 북미지역에서 시즌2가 방영 중인, 한국에서는 채널CGV로 방영되며 팬들 사이에서 ‘에오쉴’이라 불리는 <에이전트 오브 쉴드>는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와 <어벤져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벤져스>의 히어로를 이끈 비밀조직 쉴드(S.H.I.E.L.D)는 어벤져스 군단의 활약 이후 잠시 평화로웠던 세계가 다시 위기에 처하자, 이에 다시 살아온 콜슨 요원(클라크 그레그)을 중심으로 어벤져스를 잇는 보다 젊고 새로운 팀을 꾸린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클라크 그레그가 출연하고 새뮤얼 L. 잭슨이 출연하는 등 <에이전트 오브 쉴드>는 독자적인 노선과 기존 영화와의 교류 사이에서 흥미로운 균형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배트맨> 시리즈의 프리퀄, <고담>

<애로우>를 기존 코믹스 원작과 미드 <로스트>의 결합이라 한다면, <고담>은 <배트맨>과 미드 <소프라노스>의 결합으로 보면 어떨까 싶다. 이야기 자체는 <다크 나이트>(2008)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웨인 기업을 이끄는 토마스 웨인 부부가 아들 브루스 웨인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그 이후 전개 양상은 <소프라노스>처럼 범죄도시 고담을 둘러싼 갱스터들의 세력다툼이다. <HBO>에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시즌6이 방영된 <소프라노스>는 뉴저지 마피아 조직 안에서 부두목으로 살아가는 이탈리아계 토니 소프라노(제임스 갠돌피니)의 이야기였는데, <고담>의 ‘펭귄맨’ 오스왈드 코블팟 또한 이탈리아계로 등장하여 그러한 이탈리아계 마피아들의 이전투구를 강화시켰다. 어린 브루스 웨인(데이비드 마주즈)이 아직 기지개를 켜기 전 고담을 두고 경쟁하는 숙적 팔코네(존 도먼)와 마로니(데이비드 자야스), 팔코네 아래에 있지만 그를 쓰러뜨리려는 피쉬 무니, 그리고 피쉬 무니에게 숙청당하고 마로니 밑에서 재기를 꿈꾸는 오스왈드 코블팟의 이야기가 앞서 전개되고 있다.

<다크 나이트>에서 게리 올드먼이 연기한 제임스 고든 형사의 젊은 시절도 관심을 끈다. 그는 어린 브루스 웨인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고담>이 영화화된 <배트맨> 시리즈의 프리퀄이라는 사실이다. <고담>은 펭귄맨은 물론 ‘배트맨’ 브루스 웨인과 ‘캣우먼’ 셀리나 카일의 어린 시절,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나이 든 제임스 고든 경찰청장(게리 올드먼)의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을 보여준다.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에서 그저 나이 든 경찰,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는 브루스 웨인과의 오랜 비밀을 간직한 경찰로 등장했던 제임스 고든이 베테랑 선배 형사 하비 불록(도널드 로그)과 함께 버디무비의 주인공처럼 사건을 해결해나가며, 어린 셀리나 카일(캄렌 비콘도바)은 브루스 웨인 부모가 살해당하던 현장의 숨은 목격자로 등장한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 관록의 배우 마이클 케인이 연기했던, 언제나 브루스 웨인의 곁을 지키는 든든한 집사 알프레드(숀 퍼트위)의 ‘중년’ 시절 또한 볼 수 있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1995)에서 인간의 뇌파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기계를 발명했던, 하지만 브루스 웨인(발 킬머)으로부터 자금 요청을 거절당해 앙심을 품었던 박사이자 악당 니그마(짐 캐리)의 흥미로운 옛 모습도 나온다. 모든 사건에 호기심 가득한 <고담>의 니그마(코리 마이클 스미스)는 ‘아직까지는’ 경찰서에서 과학수사를 맡고 있는 경찰이다.

'캣우먼' 셀리나 카일의 '비행 청소년' 시절도 흥미롭긴 마찬가지

더 재밌는 점은 <고담>이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 중간쯤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반부터 맹활약하고 있는 오스왈드 코블팟은 팀 버튼의 세계에서 온 것이며, 제임스 고든 경찰과 브루스 웨인의 필연적인 만남(사건 현장에서 어린 브루스 웨인과 만난 제임스 고든은 ‘강해져야 한다’고 충고한다)과 더불어 알프레드의 존재감은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게 한다. 배트맨만큼이나 여러 배우가 연기했던 캣우먼의 어린 시절이 <배트맨2>의 ‘원조 캣우먼’이었던 미셸 파이퍼를 닮았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볼거리다. 물론 점점 더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는 니그마의 이후 활약 여하에 따라 조엘 슈마허의 지분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직은 ‘떡밥’투성이지만 이 야심적인 미드가 어떻게 전개될지 사뭇 흥미롭다. 사건현장을 떠나는 어린 브루스 웨인에게 알프레드는 “고개 들고, 뒤돌아보지 말고, 힘 있게 걸으세요, 도련님”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브루스 웨인은 앞으로 점점 더 성장해 나갈 것이다.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전통의 절대 강자가 역시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면 <고담>이 <스몰빌>의 성공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지 그 미래가 궁금하다. 팬들이라면 당연히 <배트맨>의 메인 빌런인 라스 알굴 또한 드라마로도 만나고 싶을 테니.

<플래시>

<플래시>와 <콘스탄틴> 그리고 <데어데블>

“내가 얘기하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불가능을 믿는 것이다.” 마치 모든 슈퍼히어로물들을 관통하는 것 같은 야심만만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미드 <플래시>는 지난 10월 미국 <CW>에서 방영됐으며(한국에서는 드라마 전문채널 스카이드라마를 통해 방영 중), 첫회를 기준으로 <CW>가 지난 5년간 방송한 시리즈물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경신했다. 역시 DC 코믹스에 기반을 둔 <플래시>는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고 초스피드로 달리는 능력을 얻게 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다. 또 다른 미드 <글리>로 인기를 얻은 꽃미남 배우 그랜트 거스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로 사랑받은 웬트워스 밀러가 악당으로 출연해 관심을 모은다. 더구나 역시 <CW> <애로우>의 스핀 오프이기도 하여 1회부터 애로우가 등장해 플래시에게 조언을 건넸다. 자신의 신체적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는 플래시에게 “네가 번개를 맞은 게 아니라 번개가 너를 선택한 것”이라며 운명적 기운을 불어넣고 “너는 내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물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자기처럼 마스크를 쓰라는 실용적인 충고도 더했다. 빌딩과 빌딩 사이를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애로우를 보면서 플래시가 부러워하고,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플래시를 보면서 애로우가 부러워하는 위트 있는 장면을 보면서, DC 코믹스 버전의 <어벤져스>라고 할 수 있는 ‘저스티스 리그’로의 확장도 기대해볼 만하다.

비슷한 시기 방송을 시작한 <NBC>의 <콘스탄틴> 또한 관심을 모은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 영화 <콘스탄틴>(2005)으로 먼저 선보인 이 작품은 역시 DC 코믹스 원작을 바탕으로, 악마 사냥꾼이자 흑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닌 존 콘스탄틴(맷 라이언)의 오컬트 드라마를 펼쳐 보인다. 앞으로 제작에 들어갈 미드로는 마블 코믹스의 대표적인 슈퍼히어로 <데어데블>이 가장 눈에 띈다. 내년 넷플릭스에서 방영 예정인 <데어데블>은 낮에는 시각장애인 변호사 맷 머독으로, 밤에는 붉은색 옷을 입고 악당들과 싸우는 히어로 ‘데어데블’로 이중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벤 애플렉 주연으로 2003년 먼저 영화화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평단의 혹평과 더불어 골든라즈베리 최악의 남자배우상을 수상하는 등 벤 애플렉으로서는 잊고 싶은 ‘흑역사’로 기록됐다. <데어데블>이 과연 드라마로서는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