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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스튜어트]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장영엽 2014-12-16

크리스틴 스튜어트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어느 톱 여배우에게 고용된 한 젊은 어시스턴트의 숙명을 생각해본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뿔테 안경.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여러 대의 휴대폰을 돌려가며 받을 때에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수많은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도 일이지만, 그녀의 가장 우선순위 업무는 저 멀리서 언제 자신을 호출할지 모르는 스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의 한 장면이고, 그 역할을 연기하는 여배우가 평소 수많은 스탭들을 대동하고 화려한 행사 장소에 나타나는 실제 톱스타라면 이야기는 더 흥미로워진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톱 여배우의 어시스턴트 발렌틴을 연기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래서 재미있다. 사례 하나. 극중에서 발렌틴이 ‘모시는’ 톱스타 마리아 앤더스(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의 상대 배역으로 캐스팅된 젊은 할리우드 여배우 조앤(크로 모레츠)이 영 신경 쓰인다. 그런 그녀에게 던지는 발렌틴의 한마디란 이렇다. “검색해보셨어요? 더 깊이 파보세요. 얼마 안 가 나체 사진들과 최근에 친 사고가 뜰걸요. (중략)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워서 앤드류가 조앤을 찼는데, 조앤이 총 들고 앤드류 집에 가서 난동 부리다 쫓겨났어요.”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피사체이자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걷잡을 수 없는 스캔들로 번져나가는 세계.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조앤이 몸담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생리는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함께 출연한 로버트 패틴슨과의 연애, 그리고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의 연출자였던 루퍼트 샌더스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수년 전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스튜어트의 삶은 영락없이 조앤의 그것과 닮아 있다. 하지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조앤이 아니라 발렌틴이다. 치열한 스타 산업의 중심부에서 한 발짝 비껴나, 인기와 성취에 전전긍긍하는 ’별’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인물. 이미 전세계적인 팬덤을 거느린 톱스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마치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떠오르는 스타의 숙명에 대해 또 다른 톱스타에게 얘기하는 순간을 볼 수 있다는 건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다.

할리우드라는 전쟁터에서 벗어나, 유럽 아트하우스영화의 품에서 한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걸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출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선택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발렌틴을 연기할 여배우를 고심하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에게,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최초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유럽의 거장들이 사랑했던 왕년의 여배우를 위협하는, 젊고 아름답고 야심만만한 미국의 라이징 스타.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처음 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맡기고자 했던 역할은 극중에서 크로 모레츠가 연기하는 조앤 앨리스였다. 그러나 이 역할을 거부한 건 스튜어트 자신이었다. “그건 이미 내가 잘 알고 있는 삶이었다. 내가 살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고. (중략) 나는 내가 가까이서 지켜봐왔으나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연기하고 싶었다.”

스튜어트가 발렌틴을 연기한다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가 짐작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겠다고 생각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발렌틴을 맡고 싶다는 스튜어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영화를 보다 흥미롭게 만들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로부터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 건, 비로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히로인의 그림자를 벗은 어느 여배우의 다층적인 모습이다. 여기에는 감정기복이 심한 톱스타의 기질을 특유의 심드렁한 응대 방식으로 돌파하는, 꽤 수완좋은 어시스턴트의 모습이 있고, 톱스타의 대본 연습을 돕는 과정에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반추하게 하는 야심찬 청춘이 있으며, 점차 대본 속 인물의 강렬한 감정에 몰입하며 자신이 소모되는 것을 느끼는 불안한 여자의 초상이 있다. “마리아 앤더스는 줄리엣 비노쉬도 아니고, 나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인물도 아니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와 같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길 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제들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알 수 있게 해줄 열쇠를 찾으려 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하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주인공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발렌틴을 연기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영화 속 발렌틴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이기도 하고, 앞으로 더 성장하고 싶은 청춘이기도 하며, 이미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어느 톱스타의 과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누구도 아닌 인물이자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인물이 되어봤다는 건 올리비에 아사야스와의 첫 협업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이룬 가장 큰 성취 중 하나일 것이다. 원래 배우의 숙명이 그런 것 아니겠냐고? 이름이 채 불리기도 전에 이름보다 더 거대한 수식어와 꼬리표가 따라붙는 스타 시스템 안에서 자라온 할리우드 키드에게 그건 이루기 쉽지 않은 성취다. 영화 속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보며 톱스타 크리스틴 스튜어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는 영화는, 아마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가 처음이지 싶다.

뱀파이어조차 마음을 읽지 못했던, 매혹의 소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많은 사람들이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자신에게서 벨라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한곳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그녀의 말대로, 스튜어트는 순간의 열광에 안주하기보다 재빨리 다음 단계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비욕, 마릴린 맨슨 등의 콘서트 영상과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던 플로리아 시지스몬디 감독의 <런어웨이즈>에선 70년대의 전설적인 여성 로커였던 조앤 제트를 연기했고, <백설공주>를 판타지 액션 장르로 재해석한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에서는 드레스 대신 갑옷과 방패를 입은 ‘여전사’ 버전의 백설공주로 분했으며, 월터 살레스의 로드무비 <온 더 로드>에선 술과 마리화나와 음악을 즐기는 자유롭고 도발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그녀의 도전이 늘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스튜어트의 머뭇거리는 말투와 어색한 표정, 다소 정교하지 않아 보이는 움직임 때문인지 그녀의 연기력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지적은 늘 있어왔고, 급기야 <브레이킹 던 Part2>의 개봉 뒤 열린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는 그해 최악의 연기를 선보인 여배우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배우들이 쉽게 지니지 못하는 중성적인 매력을 가졌고, 본인 스스로도 그러한 이미지로 소비되길 즐기며, 여성팬들이 유독 많아 ‘크리스비언’(오직 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만 열광하는 헤테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단어까지 양산할 정도인 크리스틴 스튜어트 특유의 개성은 앞으로도 배우로서의 행보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그녀에겐 큰 장점이 될 거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통해 연기의 즐거움과 성취에 대한 쾌감을 동시에 얻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당분간 독립•예술영화가 그녀에게 선사하는 자유로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된 죄수와 여군의 복잡미묘한 우정을 다룬 <캠프 X레이>와 벌써부터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스틸 앨리스>가 스튜어트의 차기작이기 때문이다. 조디 포스터의 딸로 출연한 <패닉 룸>을 통해 주목할 만한 아역배우로 인정받았던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통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경험하며 스타로서의 다사다난한 여정을 지속해온 이 청춘배우는 지금 현재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연기를 하며 스스로도 몰랐던, 내가 원하는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놀랍다. 앞으로 그런 경험을 선사하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고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말한 적이 있다. 아역배우 출신의 하이틴 스타에게 으레 기대하게 되는 것들. 그 고루하고 뻔한 기대들을 보기 좋게 배반하겠다고,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스스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메시지를 자신의 행보로 대신 전하는 용감한 여배우가 여기 있다.

<런어웨이즈>

magic hour

무대 위의 록스타

이 할리우드 톱스타에게, 유명세 이상의 뭔가가 더 있으리라고 처음 짐작하게 된 작품은 바로 <런어웨이즈>다. 척 베리처럼 기타를 치고, 수지 콰트로처럼 노래하고 싶은 10대 소녀. 실존하는 유명 여성 로커이기도 한 조앤 제트의 10대를 연기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스크린 속을 활보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습은, 딱 그 나이 또래다운 도발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조앤 제트의 모습을 닮기 위해, 영화에 제작자로 참여한 그녀와 같은 숙소를 사용하며 기타 연주와 퍼포먼스 등을 익혔다는 스튜어트가 가장 빛나는 장면은, 역시 무대 위의 조앤 제트를 연기할 때다. 기타를 비스듬히 메고 몽환적인 표정으로 <Cherry Bomb>를 부르며 소녀들의 위험한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스튜어트의 모습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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