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좀’이란 말이 있다. ‘좌익좀비’의 줄임말이다. 반대말로는 수꼴이 있다. 좌좀의 어원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권 1년차 이명박은 4대강 사업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바로 쇠고기 파동이다. 다들 기억하겠지만,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막기 위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꽉 찰 정도로 몰린 시민들은 군사정권 이래 최대 인파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이명박을 지지하는 이른바 우익쪽에선 그 시위대들이 달갑지 않았는데, 보수성향 온라인 사이트- 디시인사이드 혹은 노노데모- 에서 처음으로 시위대들을 좌좀이라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감에서 알 수 있듯이, 좌좀은 시위대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시위대들의 운집한 형상을 떼지어다니는 좀비의 모습에 빗댄 것인데, 실은 게임이나 영화 속 좀비처럼 “단세포/무뇌아” 혹은 “척결대상”으로 바라보는 무시무시한 우익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조지 로메로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좀비영화들
2008년 좌좀이란 신조어를 들은 영화애호가는, 만약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면, 단 하나의 감독과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바로 조지 로메로 감독의 ‘시체 3부작’이다. 좀비 트릴로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살아 있는 시체들의 새벽> <살아 있는 시체들의 날>은 영화 역사상, 아니, 좀비가 나오는 모든 문학 역사상 최초로 좀비-노동자(시위대) 알레고리를 구축한 작품이다. 1968년작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선 좀비들에게 포위된 인간 군상의 계급갈등과 인종갈등을 보여주며 좌좀 알레고리 첫선을 보이더니, 속편에선 아예 백화점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아포칼립스를, 3편에선 군인에 의해 재생산(reproduction)되는 좀비를 묘사하며 미군국주의(Pax-Americana)를 맹비난하기도 했다(마지막에 재생산 좀비가 거수경례를 할 때의 오그라듦이란. 내 유년을 지배하던 시네마적 오그라듦 중 하나). 좀비라는 장르적 요소와 군중이라는 정치성을 결합시킨 것만도 위대한데,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그 상징성이라니. 브라보.
그리고 이 위대한 알레고리는 시리즈를 넘어서 이후에 제작되는 거의 모든 좀비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 파장력은 좀비영화의 명작 몇개만 거론해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스튜어트 고든의 <좀비오>, 댄 오배넌의 <바탈리언>, 대니 보일의 <28일후…>, (‘시체 3부작’의 속편을 리메이크한) 잭 스나이더의 <새벽의 저주> 등은 모두 좌좀 알레고리의 자장 안에서 설정과 플롯만 변주되는 조지 로메로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장르가 바뀌어도 좀비만 나오면 좌좀 알레고리는 얼마든지 작동한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블랙코미디류의 영화들, 이를테면 <좀비랜드> <새벽의 황당한 저주> <웜바디스>까지, 좀비가 나오는 모든 장르는 좌좀 알레고리의 하위장르라 할 수 있겠다. 좀비라는 하위장르가 좌좀 알레고리를 내세워서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를 자신의 하위장르로 포섭시키다니. 조지 로메로의 생명력은 아무리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좀비처럼 끈덕지다.
어쨌든 신기하지 않은가? 1968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알레고리가 정확히 40년 뒤 대한민국에서 언어화되어 나타났다는 것이? 조지 로메로의 천재성보다 대한민국 누리꾼들의 위트가 더 위대해 보일 정도다(이런 단어를 나오게끔 해주신 이명박 대통령의 공헌도 잊지 말자. 좌좀과 수꼴을 양산해낸 쇠고기 파동이라니. 휴우). 그렇다면 이런 언어감각을 지닌 대한민국은 좌좀 알레고리를 어떻게 영화화했을까? 한국의 좀비영화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80년작 <괴시>라는 작품이 있고, 최근 들어서야 <이웃집 좀비> <좀비스쿨> <인류멸망보고서> <무서운 이야기> 등에서 좀비가 이리저리 변주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조지 로메로의 자장을 피해갈 순 없었다. 심지어 <무서운 이야기>에 포함된 좀비 단편 <앰뷸런스>에서는 좀비들을 “쥐새끼”라고 칭하며 이명박 사태를 좌좀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실제로 쥐는 번식력이 대단한 동물인데, 2008년 쥐들이 청와대의 쥐를 공격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아 참, 단편영화 <불한당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배경으로 이주노동자를 공격하는 붉은 악마 좀비를 전복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조지 로메로가 박수칠 만한 훌륭한 좌좀 적용 사례라고나 할까.
좌좀이란 말이 탄생한 나라답게, 대한민국은 어찌 보면 좀비영화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국가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과 정치인들의 담합, 그리고 걸핏하면 터지는 대형사고와 그때마다 운집하는 시위대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좀비 장르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하위의, 하위의, 하위의, 하위장르다. 하긴 정치좀비의 탄생국가인 미국에서도 조지 로메로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월드워Z> 같은 메이저 좀비영화가 만들어졌으니, 배우 송강호와 유해진의 썩어들어간 좀비 얼굴 포스터를 CGV 메인 간판에서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일 수 있다(송강호, 유해진씨, 죄송합니다. 신라면 광고를 보고 좀비 블랙코미디영화에 더블 캐스팅하면 잘 어울리겠다는 못된 상상을 했습니다. 신라면은 당연히 인육으로 바꿔서…). 게다가 공포영화들도 가뭄에 콩나듯 들쭉날쭉 만들어지는 장르영화의 황무지가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CJ 투자 200억원 제작비의 좀비영화, 말도 안 되는 건가.
좀비를 되살린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 <당신의 모든 순간>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좀비가 살아나듯, 대한민국에도 아주 가끔 좀비가 인기 있을 때가 있다. 아니, 인기 있을 곳이 있다고 말해야겠다. 바로 웹툰이다. 지금 웹툰은 영화 제작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큼 상상력 공장이 되어버렸는데, 하위장르들이 미친 듯이 버무려져서 관객의 입맛을 당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떨어뜨리기도 하며 하위문화를 선도/외도하고 있다(마치 70~80년대 할리우드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들의 변주과정을 온라인으로 확인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좀비도 웹툰에선 인기 있는 소재다. 그중 언급하고 싶은 건 주동근의 <지금 우리 학교는>과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이다. 둘의 공통점이 뭐냐고? 둘 다 영화화가 진행됐었고, 곡사와 관련 있다. 더이상은 노코멘트. 오히려 둘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하나는 학원물이고, 하나는 순정물이다. 하나는 좀비를 대상화하는 슬래셔물이고, 하나는 좀비를 주체화하는 로맨스물이다. 공통점은커녕 정반대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양극단은 대한민국이 좀비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시선이다.
대한민국은 좀비들의 나라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보면 꾸벅꾸벅 조는 좀비, 술이 덜 깬 좀비, 핸드폰 게임하는 좀비, 화장하는 좀비 등 지옥철이 아니라 좀비철이라 할 만큼 좀비들이 즐비하다. 경제 침체 이후 더 늘어났다. 하루 종일 칩거하는 백수좀비,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고시원좀비, 일인시위하는 비정규직좀비 등. 하지만 그들의 울분 중에 매일 학원에서 살아야 하는 학생좀비만큼 한국적 상황을 요약하는 좀비가 또 있을까.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선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에 가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고, 공부를 잘하려면 과외를 해야 하고, 과외를 하려면 부모가 돈이 많아야 하는 한국적인 너무나도 한국적인 좌좀적 상황. 이러한 <여고괴담>의 울분을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의 공포로 치환함으로써 주동근 작가는 좌좀을 학좀으로 한국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실제로 학좀이 나오는 좀비물은 전세계를 통틀어 일본의 <배틀로얄> 같은 미친 학원물 말고는 이 작품이 유일하지 않을까).
하지만 <파업전야>와 <카트>로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울분은 또 어쩔 거냐. 대한민국은 슬픈 노동자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만 그릴 수 없나보다. 워낙 한이 많아서. 그리하여 강풀 작가가 영민하게 조명한 것은 좀비의 기억이다.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 좀비들은 마지막 기억에서만 살고 있다. 세상이 너무 각박하여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싶어서. 하지만 이 기억이라는 소재는 웹툰을 감동적으로, 감성적으로 감개무량하게 만들었지만, 영화화를 가장 더디게 하는 비영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기억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반응할 수도 없는 비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한국의 좀비들은 원한을 품은 채 공격해오거나, 아니면 그 원한을 용서하고 칩거한다. 이 두 모습은 묘하게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일어난 모든 집단적 울분의 두 모습이다. 분노하거나 용서하거나. 두 모습은 확연히 다르지만 어떤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를 따지기 전에, 왜 두 모습이 공존하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영화인들이 할 일은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묘사하는 것이다. 웹툰에서 급진적으로 해내고 있는 걸 영화인들이 재깍재깍 따라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을 조지 로메로님께 보여드리고 어서 영화화하자. 로메로님 천당 가기 전에. 아니, 지옥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