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마의 단도가 항상 부정한 여인에게 향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체리폴스>에선 순결서약을 지키려는 10대 여학생들이 주검으로 변하니까. 영화에서 체리폴스라는 지명이 은근한 속뜻을 드러낼 때, 급기야 10대들이 벌이는 광란의 섹스파티는 목숨부지를 위한 필사의 구원식이 된다. <체리폴스>는 “살기 위해선 끝까지 처녀로 남을 것”을 신신당부하는 공포영화의 고전적인 계율들을 일단 뒤집는 설정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맛이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체리폴스>의 설정은 당의정에 불과하다. 영화의 전반부는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을 철저하게 모사한다. 할리우드의 호러영화 도식들을 깔끔하게 요약정리한 <스크림>의 위력을 무시할 순 없는지라, 신선한 공포의 발원지를 개척한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체리폴스>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살인마까지 모셔온다. 빠른 속도로 시신들이 뒹굴지만 남는 혈흔만큼 공포감이 흥건하지 않고 누구나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조장하지도 못한다.
<메탈 스킨> 등 세편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연출한 뒤 할리우드에 입성한 조프리 라이트 감독은 후반부를 살해동기와 연관있는 과거 사건을 파헤치는 스릴러로 채색한다. 내친 김에 도덕적인 윤리로 아이들을 묶어두었던 이 조그만 마을의 위선적인 과거도 함께 비추려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개연성 부여에 몰두한 탓에 이번엔 오싹한 공포감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도 고전”이라는 생각에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참고했지만, 광기어린 노먼의 독백을 따라잡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베일이 벗겨진 살인마는 신비가 자신의 최대 무기인 것을 모른 채 각본에 쓰인 대로 자신의 무의식에 묻힌 유년기를 구구절절 읊어대니까. ‘<싸이코>에서 <스크림>까지’ 196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공포영화 장르의 진열대에서 고전과 해체를 대표하는 칼날을 꺼내들었지만, <체리폴스>는 뇌세포를 자극하기에 무뎌보인다.
이영진 기자 ant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