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은 가장 강한 모습과 가장 약한 모습이 공존하는 배우예요.” 조성희 감독이 말했다. 강약, 선악, 희비. 이제훈은 이 모든 상반된 것들을 한몸에 품고 있는 배우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현실의 이제훈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너무 평범해서 심심하다는 말을 곧잘 듣는 이제훈에게 첫인사로 변한 게 하나 없다는 말을 건넸다. 그는 다행이라며 웃었다. 다행인 건 우린데. 풋풋한 외모, 바른 청년의 분위기, 진지한 태도가 신인 때나 지금이나, 군대 가기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다. 딱 하나 변했다고 느낀 것은 말이 길어졌다는 것. 내뱉는 말에 더 많은 생각과 더 깊은 고민을 싣다보니 그럴 수밖에. 본인은 “그래서 제가 재미가 없어요”라며, 재미없는 자신의 모습이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또래의 그 누구보다도 다작 레이스를 펼쳐온 이제훈이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7월24일 제대한 이제훈은 복귀작으로 드라마 <비밀의 문>(9월22일 첫 방송)을 택했다. <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과도 <명탐정 홍길동>(가제)을 함께하기로 했다. 이선(사도세자)으로 살아가느라 바쁜 이제훈에게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청했다. “연기를 할 때의 마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달라진 게 없어요”라는 이제훈의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살이 좀 빠졌다. =작품에 집중하다보면 살이 좀 빠지는 편이다. 게다가 사극을 찍고 있으니. 한복이 몸을 완전히 덮는다. 연기하는데 한복 안에서 열이 나는 걸 느낄 수 있다. ‘아, 내가 집중하며 에너지를 쏟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 지금 64~65kg 정도 나간다.
-<비밀의 문>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제대 이틀 뒤에 대본 리딩을 했고, 일주일쯤 뒤에 첫 촬영에 들어갔다.
-제대 즈음 <명탐정 홍길동>과 <비밀의 문> 캐스팅 소식이 들려왔다. 군대 가기 전에도 쉬지 않고 달리더니 제대하자마자 시동을 거는구나 싶더라. =지나고 생각해보니 4~5일 정도 더 쉬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들었다.
-고작 4~5일? =그래도 촬영은 해야 하니까. (제대 뒤) 공백기간 없이 시청자를 만날 수 있어 행운이라 생각한다. 확신을 갖고 참여한 작품이라 쉬는 시간은 부족해도 즐겁다.
-제대 뒤 첫 작품을 사극 드라마로 택했다. =사극이라는 장르 속에서 연기하는 내 모습이 궁금했고, 시청자와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기를 바랐다. <패션왕>이라는 미니시리즈를 했지만, 다시 한번 드라마를 하게 된다면 그때의 아쉬움,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밀의 문>에서 영조의 아들 이선을 연기한다. 우리에겐 사도세자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인데, 세자 이선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도세자의 모습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해석은 역사서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이선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세자다. 이득을 취하기보다 백성의 삶과 미래를 걱정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그 마음과 생각이 미처 꽃을 피우기 전에 안타깝게 삶을 마감했는데, 그 정신이 아들 정조를 통해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도세자를 비극적 삶을 살다간 인물로만 기억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에는 희로애락이 있다고 본다. 그중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 삶을 조명하는가에 따라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드라마는 20살의 이선에서 시작해 삶을 마감하는 20대 후반까지의 이선을 그린다. 이선이 왜 비극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지, 태어났을 때부터 길이 정해진 사람이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가 흥미롭게 그려질 예정이다.
-공교롭게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현재 영화로도 제작 중이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는 <사도>에선 송강호가 영조를, 유아인이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유아인과는 <패션왕>에서 함께 연기한 적이 있다. 재밌는 인연이다. =캐스팅되고 유아인씨와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건 없는데, 같은 인물을 연기하게 됐다는 건 알고 있지 않을까.
-한석규와는 군 입대 전 마지막 작품 <파파로티>를 함께 찍었고 군 제대 뒤 첫 작품인 <비밀의 문>으로 다시 만났다. =인연이라는 것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닌데, 인연은 인연인 것 같다.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뵐 줄은 몰랐다. 사제지간에서 부자지간으로, 녹록지 않은 관계로 다시 만났다. 이전에 선배님과 연기하면서 쌓은 신뢰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 스타일이나 촬영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지켜봤기 때문인지 이번 작품에선 액션과 리액션을 함에 있어 전혀 어색함이 없다. 참 편하다.
-<세자매> <패션왕>에 이어 <비밀의 문>이 세 번째 드라마다. 첫 드라마 주연작이었던 <패션왕>에선 재벌2세라는 캐릭터 때문인지 배우 이제훈의 연기가 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앞서 <패션왕>을 하면서 아쉬움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데, <패션왕>은 그것을 경험하게 해준 작품이다. 그땐 그날 연기한 장면이 그날 방송으로 나가고, 작품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오는 게 낯설었다. 작품을 끝내고 나니 다시 한번 드라마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정립되더라. <패션왕>을 경험했기 때문에 <비밀의 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장르에 대한 경험도 다양하게 쌓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작품을 선택하는 폭이 좁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캐릭터를 일찍 경험하려 했다. 나의 선택, 나의 연기가 성공과 실패로 단순하게 규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도 이 작품을 선택하길 잘했다, 못했다에 대한 기준이 있다. 결과야 어떻든 과정을 통해 내게도 경험치가 생겼고, 앞으로는 그것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작품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조성희 감독과의 <명탐정 홍길동>이 기대된다. =조성희 감독님은 <파수꾼> 찍을 때 처음 만났다. 윤성현 감독님과 가까운 사이라 얘기도 많이 들었고. 세월이 지나고 만난 감독님의 모습이 그때와 다르지 않더라. 그래서 좋았다. 조성희 감독님의 <남매의 집> <짐승의 끝>도 무척 좋아하는데, <명탐정 홍길동>이 그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서 기대를 품고 있다.
-2년쯤 전, 신작 준비 중인 조성희 감독을 비단길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땐 가제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어두운 탐정물이라고만 설명했었다. =사설탐정이 주인공이고,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잡는 이야기다. 주인공 홍길동에겐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다. 그런데 20년 동안 그를 찾지 못하고 헤매기만 한다. 그러다 복수의 대상을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 그가 납치당한다. 납치된 그의 두 손녀를 데리고 홍길동이 다시금 복수의 대상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크랭크인은 11월 말쯤으로 보고 있다.
-재밌는 그림을 하나 가져왔다. 2년 전 조성희 감독이 직접 그려준 홍길동 캐릭터다. 비오는 거리, 가로등에 기댄 채 서 있는 중절모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내를 그려주더라(그림을 지면에 실으려 했으나 조성희 감독은 2년 전 그림인 데다 캐릭터의 비주얼이 확정된 상태가 아니어서 잡지에 자신의 스케치는 싣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이런 느낌이 분명 있을 거다. 빛을 활용하는 장면도 많이 있을 거고. 흥미롭게도 이번 영화의 촬영과 조명감독님이 <파수꾼>을 같이 했던 변봉선, 송현석 감독님이다. 그사이 두분이 또 결혼을 했더라. 같이 고생하면서 독립영화를 찍었던 사람들을 다시 (상업영화)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찼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겠지만, <파수꾼>의 기태는 분명 조금더 각별한 인물일 것 같다. =물론이다. 장편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가져가는 주인공을 맡은 게 <파수꾼>이 처음이었다. 윤성현 감독님과는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고, 언제나 지지하고 있는 분이다. 또 상업영화로서 큰 롤을 맡은 것은 <고지전>이 처음이었는데,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작품에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던 작품이다. 신일영이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다. <건축학개론> 역시 처음으로 오디션을 보지 않고 캐스팅된 작품이라 각별하다.
-식지 않는 열정, 지치지 않는 에너지의 근원은 뭔가. =좋은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스스로도 좋은 작품을 보고 싶고, 그 작품을 사람들이 좋아했으면 좋겠고, 순간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 작품이 남았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작품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의 때문에 지금처럼 일할 수 있는 것 같다.
-연기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는 배우들은 많이 봤는데, 제훈씨는 그것을 뛰어넘어 배우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장된 것 같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기 때문에 존재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 내가 좋다고 오래도록 영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나. 그렇기 때문에 받은 만큼, 그 이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멋있다. =결코 거창한 생각이 아니다. 혹시라도 이 마음이 변질된 것 같다 싶으면 바로 비판하고 지적해달라.
-군대에서 보낸 2년이 배우 이제훈에겐 어떤 시간이었나. =눈가리개한 경주마가 앞만 보고 달리듯, 지금까지 정신없이 작품과 캐릭터에만 몰두해서 달려왔다. 정작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는 시기가 적절하게 찾아왔다. 만약 그 시간이 없었다면 계속해서 순간의 결과물을 위해 정신없이 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타이밍이 참 좋았다.
-군대에서 서른을 맞았는데, 30대에 접어든 배우 이제훈의 인생 설계도도 좀 그렸나. =(마치 남 얘기하듯) 다양하게 많이 그리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았겠고. 거기엔 배우라는 타이틀이 배제된 선택은 없는 것 같다. 배우는 작품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배우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선택을 좀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작품을 하겠다는 얘기를 앞서 했는데, 만약 좋은 작품이 없으면? 그러면 나는 작품을 하면 안 된다. ‘지금 상황에선 이 정도가 베스트야’ 그런 선택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기다리지 않을 거다. 좋은 작품이 없는지, 좋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없는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없는지, 앞으로도 계속 찾을 거다.
-영화제작에도 관심이 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혹시 또 모르지, (글을) 쓸 수도 있고, 기획이나 제작을 할 수도 있고.
-몰래 써둔 시나리오가 집에 이만큼 쌓여 있는 거 아닌가. =(미소를 머금으며) 음, 글쎄. ‘써둔 시나리오 있습니다’ 했는데 나중에 머리만 긁적긁적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지금은 그냥 지켜봐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