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면이 <씨네21>을 읽고 있었다. 커피가 반쯤 남은 걸로 봐서 못해도 약속 시간 30분 전에 카페에 도착해 있었던 듯하다. <씨네21>을 창간 때부터 구독해왔다는 보기 드문 VIP 독자였다. 그런데 그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언제쯤 나는 <씨네21> 표지 모델이 돼보나, 그런 로망이 배우들은 다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음반을 내니까 인터뷰를 하게 되네요.” 배우 박준면이 지난 5월, 9곡의 자작곡이 담긴 1집 앨범 ≪아무도 없는 방≫을 발매했다. 7월엔 1집 발매 공연을 무사히 치렀고, 9월엔 앙코르 공연을 갖는다. 첫 번째 공연이 끝나고 두 번째 공연이 시작되기 전, ‘가수’ 박준면을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박준면은 “전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예요. 배우인데, 작곡할 수 있는 재주가 있어서 곡을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1집으로 나온 거예요”라며 자신이 배우임을 끝까지 환기시켰다. <삼거리 극장>의 에리사 공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왕곱단, 드라마 <아현동 마님>의 백금녀, <신의 퀴즈> 시리즈의 조영실. 그리고 <그리스> <렌트> <시카고> <밴디트> <올 슉 업> <레미제라블> 등 뮤지컬 무대에서 존재감을 뽐냈던 배우 박준면. 재주 많은 배우 박준면과 일단은 음악을 계기로 마주 앉았다.
-9월12일에 있을 앙코르 공연 준비로 바쁜가. =7월18일에 첫 번째 공연이 끝났고, 동시에 <신의 퀴즈4>도 끝났다. 힐링도 좀 하고 공연 준비하면서 시간 보내고 있다.
-공연 연출도 직접 하나. =연출이랄 게 딱히 없다. 밴드들이 뒤에 앉아 있고, 혼자 노래 부르고. 원래 가수였다면 춤도 출 텐데…. 내가 춤을 진짜 잘 춘다.
-공연 때 댄스곡도 불러보는 건 어떤가. =뮤지컬 공연스럽지 않게 하려다 보니까 이번에도 잔잔하게 갈 것 같다. 커버곡은 지난번 공연보다 조금 더 신나는 곡을 넣을 생각이고.
-지난번엔 레드 제플린의 <No Quater>를 커버곡으로 불렀는데, 이번에도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나. =물론. 마이클 잭슨의 <Bad>를 준비 중이다.
-<Bad>를 안무 없이 조용히 부르겠다는 건가. =마이클 잭슨 노래가 밴드 편성으로 부르기 좋다. 춤은 못 출 것 같고 대신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생각이다.
-배우로서 무대에 오래 섰는데도 첫 공연 때 엄청 떨었다고 들었다. =느낌이 다르다. 연기는 유리가면을 쓰고 나를 보여주는 거고 공연 때는 박준면의 모습을 완전히 까발려야 한다. 사람들이 진짜 박준면의 모습을 어떻게 볼지 떨리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지난 5월에 1집 앨범이 나왔다. 9곡의 수록곡을 직접 작사/작곡했다. 대단한 작곡 실력을 그간 감추고 있었더라. =어렸을 때부터 곡을 쓸 줄 알았던 것 같다. 가사가 있으면 바로바로 멜로디 붙여 곧잘 노래를 만들어 불렀으니까. 그런데 작곡을 일로서 접근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 2012년에 강산에 오빠가 술자리에서 “너, 곡이나 한번 써서 가져와봐” 하고 작곡을 권유하더라. ‘그럼 그럴까?’ 해서 처음 쓴 곡이 <낮술>이었다. 휴대폰에 녹음해서 강산에 오빠한테 들려줬더니 계속 곡을 쓰라고 하더라.
-그럼 이 9곡은 앨범으로 만들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만든 곡들인가. =곡을 쓰는 과정이 재밌었다. 그때 <신의 퀴즈3>와 <그대를 사랑합니다> 두편의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힘들고 피곤했지만 술먹고 퍼지는 대신 작업실에서 꾸준히 곡을 썼다. 곡을 쓰니까 스트레스도 풀리고 치유도 되더라. 곡이 좀 모이자 지인들이 싱글앨범이라도 내보라고 했고, “싱글? 내려면 정규로 내야지” 해서 9곡을 담았다.
-작곡이 일이 아니라 놀이의 개념이었던 거네. =놀이는 무슨. 놀이는 천재들이나 하는 거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곡을 썼다. 생존의 방편이었다. 곡을 만들면 힘이 났다. 그 힘 가지고 촬영장에서 연기했다. 처음부터 앨범을 내주겠다는 사람도 없었고, 앨범을 낼 생각도 없었다. 홍대에서 자주 어울려 술 마시는 친한 동생들이 알고보니 다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었고, 그렇게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녹음까지 하게 됐다.
-당시 배우로서의 삶에 많이 지쳐 있었나. =그랬던 것 같다. 사실 20살 때부터 노역(老役)을 했다. 한정된 이미지에 크게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주연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밤 꼴딱 새고 아침 7∼8시에 눈물 연기를 하는데, 이건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증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해왔던 일에 공허함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뮤지컬 배우 박준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없는 방≫에서 시원한 가창력을 기대할 텐데, 그랬다간 낭패보기 십상인 앨범이다. =덩치가 크고, 캐릭터가 센 조연을 주로 해와서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조연들은 긴 테마곡이 없으니까 짧고 굵게 치고 빠진다. 그러다보니 폭발적인 가창력을 지녔다고 말씀해주시는데, 나는 그 정도로 가창력이 좋은 뮤지컬 배우는 아니다.
-블루스와 재즈에 잘 어울리는 예쁘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지녔다. 녹음하면서 스스로의 목소리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지점들이 있나. =원래의 내 목소리를 보여준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요즘은 뮤지컬이란 단어가 싫다. 뮤지컬판이 거품도 심하고 많이 오염됐다. 스무살에 뮤지컬로 데뷔했는데 그땐 연극 정신이란 게 있었다.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춰도 베이스는 연극이었다. 요즘은 티켓파워 있는 스타들이 바로 주연을 해버리니까 그 뒤에서 조연하기가 싫다. 그래서 살기가 궁핍해졌다. (웃음) 하여튼 내가 뮤지컬했다는 티를 이번 음반에선 절대 내기 싫었다. 제작비가 넉넉해서 뮤직비디오를 찍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저 귀에 정확히 감기는 음반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건반 연주자 고경천씨가 음반 프로듀싱을 맡았다. 음악적 방향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들을 나눴나. =데모테이프를 들은 고경천씨는 앨범 컨셉을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처럼 갔으면 했다. 좀더 일렉트로닉하게. 경천씨가 베테랑 뮤지션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심플하게 어쿠스틱한 느낌으로 가고 싶었다. 작곡도 나는 영창피아노로 한다. 키보드 이런 거 없다. 거칠지만 따뜻한 느낌이 살았으면 했고 그래서 초반엔 의견 충돌이 있었다. 물론 경천씨는 내게 좋은 음악 선생님이지만.
-떠난 사랑에 대한 그리움, 홀로 남은 이의 쓸쓸함과 같은 정서가 가사 전반에 깔려 있다. 힘들었던 당시의 심리상태가 반영돼서 그런가. =그때 연애도 힘들었다. 오랫동안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싸우고 나서 길을 걷는데 소나기가 내렸다. 우산은 하나고…. 그래서 만든 곡이 <우산은 하나>. (웃음) 찰나의 순간들을 자주 기록하는 편인데, 그 메모들이 가사 쓰는 데 도움이 됐다.
-1994년에 연극 <노부인의 방문>으로 데뷔했으니 20년간 연기를 해온 셈이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실감나나. =그냥 숫자다. 고3 때 데뷔해서 일이 들어오면 안 가리고 했다. 그러다보니 20년이 됐다. 적어도 30대 때까지는 연기에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연기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그게 숙제지만. 정말 답도 없고 어려워 죽겠다. 음반을 내긴 했지만 여전히 난 배우다. 그런데 배우로서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배우는 늘 선택받는 사람인데, 선택되면 뭐든 열심히 할 거다.
-영화는 <러브픽션>에 잠깐 나온 게 마지막이다. =전계수 감독님이 도와달라고 해서 출연했다. 그 뒤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1년 동안 했고, 그러다보니 영화(섭외)가 끊겼다.
-<레미제라블>의 떼나르디에 부인 역으로 지난해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신인배우도 아니고 첫 수상도 아닌데 시상식장에서 펑펑 울었다. =행사 전 시상식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후보에 올랐으니 꼭 참석해달라는. 상 줄 것도 아닌데, 안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모든 후보자가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는 거다. 툴툴거리면서 알겠다고 했다. 후보도 쟁쟁했다. 옥주현이 조연 후보였으니까. 그리고 <레미제라블>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면 판틴이 받아야지 왜 떼나르디에 부인이 받나. 어쨌든 울며 겨자 먹기로 시상식장에 갔는데 갑자기 “박준면!” 이러니까 너무 놀랐다. ‘이게 뭐야? 왜 나를 불러?’ 당황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레미제라블> 오디션 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던 것으로 안다. =뮤지컬하는 사람, 성악하는 사람, 연극하는 사람. 연기 좀 한다는 사람들이 <레미제라블>에 다 뛰어들었다. 정말 공정한 오디션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카메론 매킨토시가 캐스팅에 일일이 관여하는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떨어져도 후회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했고, 3차까지 오디션을 본 끝에 합격했다. 그런데 계약조건이 1년 동안 원캐스팅을 해야 하는 거라서 속으로 ‘이건 합격해도 걱정이군’ 싶었다. (웃음) 방송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연기 얘기를 하니까 눈가가 촉촉해졌다. 배우로서 욕심이 없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없다, 절대 없다. 그런데 배우를 하기에 성격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사교성이 너무 없다. 입에 발린 소리도 못하고, 포커페이스도 안 되고. 배우로서 영악하지 못한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초이스하게끔 못하는 거지. 그나마 제일 막역한 감독님이 전계수 감독님인데, 전계수 감독님도 4년에 한편씩 영화 만드시니…. (웃음)
-그럴 때 음악이 힘이 되어주었나. =정말 웃긴 게, 배우할 때는 찾아주지 않더니 음반 내니까 여기저기서 관심을 가져주더라. 음악은 정말 음악으로 얘기하면 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아직은 음악쪽이 더 순수한 것 같다. 혹은 정의롭다고나 할까.
-일단 9월 공연에 영화인들을 많이 초대하면 어떨까. =그래야겠다.
박준면 1집 ≪아무도 없는 방≫
블루스에 기반한 9곡의 음악이 ≪아무도 없는 방≫을 꽉 채우고 있다. 살짝 허스키한 박준면의 목소리는 블루스, 재즈, 포크, 발라드 그 어디에도 잘 어울린다. 고경천(건반), 민재현(베이스), 이기태(드럼), 김홍갑(기타) 등 음반에 참여한 세션진의 연주도 든든하다. 9곡 중 박준면이 개인적으로 애착하는 노래는 단출한 코드와 가사로 이루어진 <아무도 없잖아>. 타이틀곡 <우산은 하나>를 비롯해 <낮술> <오던지 말던지> <취한 밤> 등 회화적이면서 시적인 가사도 인상적이다. 9곡 모두 박준면이 곡과 가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