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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를 사이코패스라 불렀는가

연쇄살인범 소재의 위험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

“영화제작자만큼이나 관객도 장르를 만들어낸다”는 그레이엄 터너의 말을 전제로 한다면, ‘연쇄살인범’을 소재로 하는 일련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일종의 ‘(소)장르화’되어가는 것은, ‘사회와 영화의 상호 영향 관계’를 잘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쇄살인범을 다룬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 왜 이런 (끔직한)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흔히 그런 일이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런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첫째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많은 관객/대중이 왜 그런 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일까? ‘고어영화’ 같은 끔찍한 이미지를 수반하는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양들의 침묵> 같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대개 ‘비주류 장르’에 속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해명이 필요한 문제이자 동시에 쉽고 단순하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정 정도는 자연스러운 관객/대중의 영화적 취향의 다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무언가 무섭고 끔직한 대상을 보며 ‘매혹과 공포(또는 불안)’를 느끼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일 수 있지만, 굳이 그런 느낌을 재현하는 영화를 찾아 보면서 이상한(또는 죄책감을 동반하는) ‘쾌락’의 체험을 반복하는 영화적 취향은 그 정도로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급 적용된 사이코패스 판정

내 생각에는 <추격자>가 (좁은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연쇄살인범을 다룬 영화의 시초(일종의 장르화)가 된 영화다. 이 영화가 평소에 그런 영화적 취향을 갖고 있지 않았던 관객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의 실제 모델이 현실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대중은 현실에서 발생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특정 사건과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의 감정을, 그것을 재현한 영화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전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그런 영화를 찾아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장르화 과정에서 영화와 대중이 공유하는 어떤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연쇄살인범=사이코패스’라는 신화일 것이다. <추격자>의 모델이 된 유영철은 실제로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은 연쇄살인범 중 하나다. 대중은 영화에서 재현된 연쇄살인범의 모습을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일상어가 되다시피 했지만 동시에 모호하고 문제적이기도 했던 ‘사이코패스’라는 용어의 구체적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동시에 현실의 유영철이 저지른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행위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을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으로 정리(또는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모든 ‘연쇄살인범=사이코패스’라는 이상한 믿음이 만들어졌고, 과거의 모든 연쇄살인범(가령 <살인의 추억>의 모델이 된 미지의 연쇄살인범, <악마를 보았다>의 연쇄살인범 장경철이라는 인물의 모티브 중의 하나가 된 1994년의 ‘지존파’ 등)이 소급적으로 ‘사이코패스’로 ‘이해’되기도 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모든 사이코패스(로 판정받은 사람들)가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도 아니고, 거꾸로 모든 연쇄살인범이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로 판정받은 유영철의 체포 이후의 태도와 그런 테스트를 받을 기회조차 없이 사형에 처해진 지존파의 그것은 대조적일 만큼 다른 것이기도 했다(지존파의 모습에 대해서는 곧 개봉할 <논픽션 다이이리>라는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연쇄살인범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과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악마성’은, 우리 모두의 ‘심연’에 존재하는 충동과 사회적 환경 속의 갈등과 모순의 식별 불가능한 혼재의 산물일 것이다. 쉬운 해답을 통해 정리할 문제라기보다는, 깊이 있게 질문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일련의 연쇄살인범을 소재로 한 영화를 통해 영화와 사회(대중)이 공유하는 ‘연쇄살인범=사이코패스’라는 등식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질문을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장르적 자극과 쾌감에 집중

<악마를 보았다>는 이런 위험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된 남자’의 이야기라는 ‘새로운 복수극’의 설정을 통해 연쇄살인범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질문해볼 수 있는 기본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은 영화지만, 고어영화적인 장르적 자극과 쾌감에 더 집중함으로써 그 의미 있는 출발점을 소진하고 만 영화다. 영화 안팎에서 장경철이라는 인물은 여러 가지 이름(미친 놈, 악마, 괴물 등)으로 불리는데, 그중 하나가 사이코패스다. <악마를 보았다>는 펜션 시퀀스에서 장경철의 악마적 행위의 출발이 1994년의 지존파였음을 넌지시 드러내는데, 지존파는 ‘사이코패스’라는 말로 쉽게 단정/해소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보기에 장경철은 지존파 이후 나타난 여러 유형의 연쇄살인범들과 그들에 대한 영화적 재현 과정에서 조각들을 모아서 모자이크한 ‘잡종적’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장르적인 기능을 위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그냥 ‘잡놈’일 뿐이다.

‘윤리적 딜레마’의 부재

“이유 없이 죽임을 하는 자와 이유 있는 죽임을 추구하는 자와의 어떤 충돌을, (어떤 에너지를 바탕으로 해서) 얘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악마를 보았다> 시사 뒤 기자회견장에서 김지운 감독이 한 말이다. 사족에 가까운 꼬투리 잡기일 수도 있지만, 그가 장경철(최민식)과 박수현(이병헌)의 차이를, 살인을 하는 이유(아마도 ‘정당한’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어야 할 이유)의 존재 유무로 쉽게 구별하는 것에는 정말이지 동의하기 힘들다. 이 말은 <악마를 보았다>가 왜 실패했는지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장경철이라는 인물(그 모티브가 된 지존파)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따라서 박수현이라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윤리적 딜레마’를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 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곧 개봉할 정윤석 감독의 <논픽션 다이어리>는 바로 그 지존파라는 악마의 심연을 제대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영화적 시도의 산물이다. <악마를 보았다>를 제대로 감상하고 평가하고 싶다면, 반드시 <논픽션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함께 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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