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선배님의 눈두덩을 좋아합니다. (웃음)” 이정호 감독이 말했다. <방황하는 칼날>에 이성민을 캐스팅한 이유를 묻자, 그런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배우의 눈두덩이 영화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싶겠지만, <방황하는 칼날>을 보면 알게 될 거다. 이 작품이 이성민의 눈매에 많은 걸 빚지고 있다는 것을. 성폭행당한 뒤 잔혹하게 살해된 딸의 복수를 위해 강원도 일대를 헤매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쫓는 형사 억관을 연기하는 이성민의 눈 밑 그늘은 영화를 보는 내내 단 한순간도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때로는 사회의 온갖 추악한 일들을 경험한 자의 얼굴에만 나타날 법한 표식이 되기도 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늘 ‘참으라’고 말해왔던 17년차 강력계 형사의 응어리진 마음을 에둘러 느낄 수 있게도 해준다. 그러니 두툼하게 내려앉은 그의 눈두덩을, 세월의 무게가 만들어낸 깊은 주름을, 가벼이 지나쳐선 안 될 것이다. 이성민의 눈매가, 곧 억관이란 인물의 실마리이므로.
<도망자>의 토미 리 존스처럼 노련한 추격의 달인. 이성민은 <방황하는 칼날>의 억관이 시나리오상으로는 그런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전문가 티가 팍팍 나는 형사였다. 에너지가 넘치고, 굉장히 능력 있는.” 그러나 그렇게 사회성이 뛰어나고 현실감각 넘치는 인물이 영화 속 억관처럼 어떤 사건에 대해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수 있겠냐는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형사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원래 형사라는 직업이 저렇게 버라이어티한 모습인가? 실제로는 오히려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형사를 맡게 된다면 좀더 보통 사람에 가까운 모습으로 연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결과적으로 <방황하는 칼날>의 억관은 이성민의 해석에 가까운 모습이 됐다. 경찰서에서 바지를 걷고 빨래를 돌리며 “집에 좀 들어가라”는 동료 형사들의 타박도 받는, 후줄근한 옷차림의 ‘아저씨 형사’가 바로 억관이다. 그러나 이 동네 아저씨 같던 남자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고, 단숨에 상대방을 몰아붙여 결국 감추고 있던 말을 쏟아내게 만드는 순간이 부조리로 가득한 <방황하는 칼날>의 세계에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한다.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피로한 육신에 감춰진 억관의 날카로움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 속 형사나 일본영화 <방황하는 칼날>의 미남 형사 다케노우치 유타카에게서 볼 수 없는, 한국 버전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억관이 형사 생활을 하며 쌓였던 가슴속 응어리가 그의 행동을 통해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답답한데, 그걸 풀 데가 없으니 가만히 있다가도 후배 앞에서 밥 숟가락을 던지고, 아이를 취조할 때도 매섭게 다그치는 거지.”
어떤 역할을 맡든 “그가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는 믿음이 이성민에게는 중요하다. “드라마 <골든타임>의 최인혁 교수를 연기했을 때 의사들이 그러더라. 수술 장면이 정말 리얼하다고. 내가 도리어 물었다. 의사들은 수술을 이렇게 하냐고. 촬영을 준비하며 응급실 가서 CPR(심폐소생술)하는 것밖에 본 것이 없다. 외과 수술은 지켜본 적도 없었다. 단지 내 상식으로는 급하면 서두를 것이고, 상처가 깊으면 몸을 숙일 것이고. 그런 생각이었거든. 형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떤 직업이든 특이한 버릇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민의 연기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건 특별한 극적 상황 속에서 그가 예리하게 건져내는 보통 사람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당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어떤 이의 모습. 얼굴에 칼자국이 난 도적떼의 우두머리(<군도: 민란의 시대>)로 분한다 해도, 잔혹한 게임에 연루된 격투기 코치(<빅매치>)로 등장한다 해도, 그 원칙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