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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날씨] 뭐할라꼬 부산에 사는교?
김영하(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영(일러스트레이션) 2013-12-12

<친구>와 <응답하라> 시리즈의 부산말

2000년 가을, 아내와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멈추고 식당으로 향하다가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영화 PD와 마주쳤다. 그동안 잘 지냈냐, 어디 가는 길이냐, 같은 대화가 오갔다. PD와 헤어져 차로 돌아오니 아내가 물었다.

“누구야?” “응, 영화 PD. 새로 시작하는 영화가 있는데 고사 지내러 부산 간대. 촬영도 거기서 시작할 건가봐.” “주연이 누구래?” “유오성이고 조연은 장동건이래. 저기 버스 보이지? 저거 타고 가나봐.” “근데 유오성이 누구야?” “나도 잘 몰라.” “감독은?” “들었는데 까먹었어. 처음 듣는 이름이야. 곽 뭐라던데.”

당시로서는 도저히 성공하기 어려워 보이는 패키지였다. 유일한 스타는 장동건인데 그때까지 흥행시킨 영화가 없었다.

“제목은?” “제목도 좀 무성의해. ‘친구’래. 제목이 ‘친구’가 뭐냐? 관심 가질 필요 없어. 망할 것 같아.”

그러나 영화는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역사적 흥행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 배우의 연기 하나하나가 모두 화제가 되었다.

원래 나는 흥행 예상에는 젬병인 걸로 유명했다. 1997년에는 아는 사람이 자기 선배가 쓰는 시나리오를 좀 읽고 의견을 달라기에 받아서 읽었다. 소설만 읽고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 시나리오는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비계만 설치된 공사현장처럼 보인다. 시나리오의 빈 곳을 영상이나 연기로 채워넣으며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시나리오를 읽은 내 독후감은 늘 시큰둥했다. 1997년의 그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 의견이랍시고 보낸 것도 그 시큰둥한 심사를 객관적인 의견처럼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흥행도 안 될 것 같으니 영화로 안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썼다. 사랑의 아픔을 가진 남녀가 PC통신을 통해 만나 마침내 사랑을 이룬다는 이 시나리오는 이후 한석규, 전도연을 캐스팅하여 <접속>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 그대로다. 그해 겨울 서울의 거리는 <접속>의 삽입곡인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이 접수했다. 마치 내 뒤떨어진 흥행 감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시 어디에서나 그 곡이 울려퍼졌다.

그 이듬해 추석에는 집으로 난데없이 호두 한 상자가 날아왔다. 한때 잠깐 알고 지냈던 한 영화사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열어보니 사연을 적은 카드가 동봉돼 있었다. 충북 영동에서 영화를 찍는데 출연 중인 할머니가 자꾸만 호두를 따러 가야 한다며 촬영에 협조를 안 해서 하는 수 없이 영화 스탭들이 모두 출동해 호두를 따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이번에는 이 호두 공동 수매에 참가해야 한다고 해서 영화사에서 아예 그 호두를 추석 선물용으로 다 사버렸다는 것이다. 호두를 본 아내가 어떤 영화냐고 묻길래 아역 배우하고 웬 할머니가 나오는 <전원일기> 스타일 영화인 것 같은데 이런 영화를 누가 보겠어? 그래도 할머니 올해 호두농사는 잘 지으셨네. 일꾼들 일당도 안 들었으니 영화가 아니라 할머니가 대박이다, 야. 아무도 안 볼 것 같던 그 영화가 지금보다 스크린이 훨씬 적었던 2002년에 무려 400만명을 동원했고 아역 배우 유승호군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로 아내는 내 흥행 예측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휴게소에서 마주친 PD와의 인연으로 아내와 함께 중앙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다. 부산말 네이티브 스피커인 아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리얼한 부산말로 일관한 이 영화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반면 나는 1/3가량의 대사를 못 알아들어서 영화가 끝난 뒤에 아내의 번역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은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야기 짜임새가 다소 엉성해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의 다양한 추측을 양산하기도 했지만 <친구>에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세계가 있었다. 그게 리얼한 부산말의 힘이었는지, 이야기의 엉성함 때문이었는지, 그 모든 것을 의도한 감독의 놀라운 연출력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부산에 내려와 살고 있다. 단골 목욕탕에서 등에 용문신을 한 형님들과 나란히 앉아 때를 밀고, 무람없이 말을 걸어오는 시장의 아주머니들에게도 익숙해져가고 있다. 부산은 낮의 풍경과 밤의 풍경이 극단적으로 다른 도시여서 밤에는 요란하고 휘황하게 빛나지만 낮에는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분위기로 꽤나 고즈넉하다. 특히 내 또래의 남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치과의사 한분이 이유를 말해주었다.

“부산에는 직업이 서울만큼 다양하지가 않아요. 특히 프리랜서들이 없어요. 그래서 낮에 주택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을 보면 부산 사람들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빌딩임대업자 아니면 건달.”

서울 사람들은 내가 부산에 살고 있다고 하면 ‘왜’ 부산에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는 ‘왜 서울에 사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것은 이유를 간단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쓰는 ‘왜’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을 때 쓰는 바로 그 ‘왜’다. 그때마다 이리저리 둘러대고 마는데 아마도 내 자신이 진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말 나는 왜 부산에 사는 것일까?

아내가 부산 출신이어서 그런 것 아닌가 넘겨짚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아내는 부산행을 반대했었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그렇다면 혹시 특정 영화나 부산영화제 때 받은 어떤 인상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부산에 살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것도 부산영화제에 내려와서였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친구>에서 묘사된 ‘날것’의 세계에 대한 환상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부산에서 촬영하는 영화를 지원하고 영화제를 유치하는 부산시의 노력도 지자체 인구 증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헛된 노력만은 아닐 것이다.

부산에서 발원해 전국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들이 몇 가지 있다고 한다. <부산은 넓다>라는 책에 따르면 최초의 노래방 기계는 부산 동아대 앞 로얄전자오락실에서 등장했다고 한다. 한달 뒤 광안리의 한 업소가 이 기계를 방마다 설치하고 ‘노래연습장’이라는 간판을 달아 영업을 시작한 게 노래방의 효시란다. 찜질방과 이태리타월도 부산에서 탄생했고 전국 해수욕장의 시작도 1913년의 송도해수욕장이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부마항쟁이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켰다. 서울에서 가장 먼 도시에서 벌어진 격렬한 항쟁이 계엄령과 위수령을 거쳐 궁정동에서의 독재자 암살로 이어지는 데는 불과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산과 관련한 최근의 가장 강력한 열풍을 꼽는다면, <친구>의 속편인 <친구2>가 아니라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의 리얼한 부산말은 <응답하라 1997>에서 완벽하게 되살아났다. <친구>가 부산말로 이루어진 마초들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응답하라 1997>은 부산말로 가능한 멜로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부산말‘로도’ 가능한 멜로의 세계가 아니라 부산말‘로만’ 가능한 멜로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놀림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변방의 언어가 서울공화국의 중심으로 진격해 들어온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표준어 멜로의 종말인가, 억압된 것들의 귀환일까. 건달의 영혼과 빌딩임대업자의 육체를 가진 소설가가 곰곰이 생각하는 요즈음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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