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서울극장을 설립한 뒤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린 1998년 전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배급/극장업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충무로의 ‘왕회장’. 극장 1번지, 종로의 터줏대감 서울극장 곽정환 회장이 11월8일 숙환으로 별세 했다. 향년 83.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한 그는 소령으로 예편한 뒤 1962년 충무로에 입문했다. 1964년 합동영화사를 차려 <잃어버린 태양>(1964)부터 <7인의 여포로>(1965), <사람의 아들>(1980), <애니깽>(1996)에 이르기까지 30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중 <쥐띠부인>(1972), <야간비행>(1973) 등 여러 편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1978년 종로의 세기극장을 인수해 합동영화(주)서울극장을 설립하면서 제작업에서 배급/극장업으로 눈을 돌렸다. 합동영화사는 서울극장과 함께 부산 아카데미극장, 대영극장, 은아극장, 대구 중앙시네마, 의정부 중앙극장 등 전국 20여개 극장의 공동 배급망을 구축했고, 서울극장은 강력한 배급망을 바탕으로 영화흥행을 쥐락펴락하는 주요 개봉관으로 급성장했다.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여러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지만 그가 “산업의 흐름을 재빨리 읽어내 그에 맞는 수완을 발휘하는 사업가”라는 데 크게 이견은 없는 듯하다. <씨네21>의 한국 영화산업 파워 50에서 9년 연속 상위권에 선정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건재를 과시했다.
서울극장이 종로 극장가의 1번지로 우뚝 서게 된 것은 1988년 할리우드 직배사가 한국에 진출하면서부터다. 그해 1월 정부가 미국 자본의 영화제작 및 배급을 허용하는 영화법을 통과시키자 충무로의 영화인들은 직배사의 한국 시장 진출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곽 회장 역시 그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이십세기 폭스가 태흥영화사를 통해 <다이하드2>를 위장 배급해 단성사에 상영하자 서울극장은 그해 9월13일 직배사 UIP코리아와 배급 계약을 맺고 <사랑과 영혼>을 상영하기로 했다. 서울극장의 이같은 결정에 항의하는 영화인들을 두고 곽 회장은 “<다이하드2> 같은 위장 직배 영화가 서울 도심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마당에 더이상 손해를 보며 참고 견딜 수만은 없다”(<경향신문>, 1988년 9월13일자 중)며 직배사와 손을 잡기로 선언했다. 1989년 단관극장으로는 처음으로 3개관 복합상영관으로 공간을 확장한 것도 달라진 시장 상황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이후 진출한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십세기 폭스, 월트 디즈니 등 할리우드 직배사들은 서울극장의 배급망을 이용했고, 덕분에 곽정환 회장의 영향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영화가 성장하는 것을 본 곽정환 회장은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가 제작/배급하는 한국영화를 위해 연간 50억원과 서울극장 배급망을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 시네마서비스 배급팀이었던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피카디리가 <투캅스>(1993)를, 단성사가 <서편제>(1993)를 상영해 재미를 보자 외화를 주로 틀던 곽 회장님도 한국영화에 눈을 돌리게 됐다. 피카디리의 배급망을 이용했던 강우석 감독 역시 또 다른 확실한 거래처가 필요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곽정환 회장과 강우석 감독이 손을 잡게 된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의 말대로 1990년대 중/후반 시네마서비스가 충무로 토착 자본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서울극장의 배급망 덕분이었다. 2004년 <그놈은 멋있었다>에 제작비 전액을 투자/배급한 것 말고는 부인인 이경희(예명은 고은아. 1960, 70년대 활동했던 여배우) 사장과 아들 곽정남 부사장에게 극장 경영을 물려주고 2선에 물러났지만 최근까지도 극장 일에 신경썼다고 한다.
이제는 서울극장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곽정환 회장의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서울극장 외화 홍보담당으로 영화홍보 일을 시작한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곽 회장님께서는 할리우드 영화사 사장처럼 가죽 소파에 앉아 시가를 피우는 이미지와 어울리는 분”이라며 “항상 고함을 치실 만큼 다혈질의 성격을 가진 동시에 엄청난 유머 감각을 가진 분이셨다”라고 고인을 떠올리면서 “그가 산업의 흐름을 누구보다 재빨리 파악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업가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치와 거리가 멀고 극장 직원보다 일찍 출근해 일할 정도로 성실하셨다”고 덧붙였다. 충무로 시대가 진짜로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