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 공원>의 저자 마이클 크라이튼은 1999년에 쓴 <타임라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100년 전 19세기가 막을 내릴 때, 세계 각지의 과학자들은 이제 물질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흡족해했다. 물리학자 앨러스테어 리의 표현대로 ‘19세기 말까지는 물리적 우주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들이 두루 밝혀진 것 같았다.’ … 그러나 누군가가 만일 1899년의 물리학자에게, 100년 뒤인 1999년에는 하늘에 떠 있는 위성을 통해 전세계의 가정들에 동영상이 전송될 거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 여성들이 투표권과 함께 출산을 조절할 알약을 갖게 될 거라든지, 사람들이 전화선도 없이 전세계 어떤 곳에 있는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느니…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그 물리학자는 그 사람이 미쳤다고 판단할 것이 틀림없다. 1899년에는 이런 종류의 발전들을 대부분 예측할 수 없었다. … 따라서 20세기의 문턱에서 아무리 박식한 과학자라 하더라도 앞으로 닥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00년 전의 사람들이 오늘의 세계를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아니 그때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그 궁금증의 일단을 풀어줄 책이 나왔다.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은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 일어난 일들을 월별로 보여준다. 이해에는 카뮈와 버트 랭커스터가 태어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과 버지니아 울프의 <출항>이 출간되고, 찰리 채플린이 첫 번째 영화 출연 계약을 맺는다. 카프카는 사랑하는 여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2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다가 문득 이렇게 쓴다. “그런데 제 글씨를 읽을 수 있습니까?” 카프카의 청혼은 실패로 끝난다. 밝은 뉴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6월20일 점심시간에 브레멘에서는 교사 자리를 얻지 못한 실직자 에른스트 슈미트가 총기로 무장한 채 초등학교에 들어가 5명의 어린아이를 살해하고 23명에게 중상을 입힌다.
20세기 초에 살았던, 우리가 아는 서양의 거의 모든 인물이 등장하는 이 책의 끝부분에 소개되는 것은 놀랍게도 <1913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서 에른스트 트뢸치는 많은 사람들이 진보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은 오지 않았다”라고 쓰고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진보는 도래했을까? 역시 주어진 한 시대를 살아갈 뿐인 우리로서는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미래였던 현재의 시점에서 또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다. 2113년의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어떻게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