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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윤혜지 사진 오계옥 2013-10-21

<공범> 손예진

우리는 손예진을 얼마나 알고 있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손예진은 어떤 사람인가. 상냥한 눈웃음에 가려진 그녀의 뒤엔 우리가 모르는 얼굴이 얼마나 숨어 있나. <공범>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대사를 빌려 손예진을 부연한다면 이러하다. 보기 전까지 우리는 손예진을 본 것이 아니다.

손예진은 누구인가. 우리는 손예진을 어떤 얼굴로 기억하고 있나. 청순한 외모? 상큼한 눈웃음? 우리는 곧 손예진의 낯선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손예진 스스로도 “내 얼굴에서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 나왔다”고 말한다.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에서의 모습이 연상될 수도 있지만 <공범>의 다은은 그 때보다 미숙하고 뜨거운 인물이다. “내게 이런 표정도 있구나 싶었다. 연기하는 동안 연인이 죽거나 아프고, 병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놓여봤지만 이건 그것과는 또 다른 극한의 감정이었다. 항상 내 안에 오열과 분노,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개봉을 앞둔 <공범>에서 손예진은 시종일관 혼란을 겪으며 흔들린다. 다은을 혼란에 빠뜨리는 건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유괴해 살해한 범인일지 모른다는 의심과 그러면서도 실낱같이 남아 있는 믿음 사이의 딜레마다.

다은을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손예진도 스스로를 괴롭혀야 했다. 딸을 애지중지 길러준 아버지를 의심하는 건, 다은에게 자신을 부정하는 것보다도 더 힘든 부정이었을 터다. “어떤 것도 계산하지 않았다. ‘내가 다은이라면’이 아니라 그냥 내가 다은이였다. 엄마도 없는 상황에서 당신을 희생해가며 날 키워준 아빠를 의심해야 한다. 어떻게 놀라야 할까, 어떻게 슬퍼해야 할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순간순간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 다은이 되고 나니 밤마다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는 걸 국동석 감독이 느꼈는지 너무 그러지 말라고 만류할 정도였다. “잠을 못 자니 사람이 점점 피폐해지더라. 이러다간 영화 못 끝내겠구나 싶어 의식적으로 다은을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다은이 캐릭터는 후유증이 다른 때보다 더 오래 갈 것 같았다.”

이토록 ‘소처럼 일하는’ 여배우가 또 있을까. 스무살에 <비밀>(2000)로 데뷔한 이래 손예진은 일년도 쉬지 않고 드라마와 영화 사이를 오가며 필모그래피를 늘려왔다. 극과 극의 캐릭터를 한번에 오가지는 않았어도 이전에 맡았던 캐릭터와는 조금씩 달라져왔다. 이제 와 지나온 자취를 바라보니 어느새 스펙트럼이 넓은 여배우로 성숙해 있다. “여기서 뭘 더 보여줄 수 있을까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수차례다. “끊임없이 다른 어떤 걸 보여주고 싶고, 새로운 걸 내놓고 싶다. 물론 쉽지 않다. 내 안에 아무리 많은 모습이 있다 해도 지금까지 십년 넘게 자꾸 뭔가를 내놓지 않았나. 하면 할수록 점점 모르겠다.” 작품을 끝낸 뒤 남은 감정으로 힘들 땐 현실의 삶을 들여다본다. “다큐멘터리 보는 걸 좋아한다. 만들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남은 감정이 빠져나가면서 마음이 치유된다.” 작품에 대한 반응을 모른 체할 수 없다보니 생각이 많아질 때도 있지만, “여전히 내 안의 순수함은 건재하다”며 금세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으며 웃어버린다.

그래서 손예진에겐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이 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건 맞다”며 손예진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연기 문제에서 단 한번도 쿨했던 적이 없다. 이게 맞는지 아닌지 항상 불안해 하는 성격이다. 이건 어떤 감정일까. 왜 이런 감정이 나오는 걸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네. 왜 내가 모르는 걸까.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편이다. 명확한 답은 없다. 연기도 그렇다.” “부정확하게 보이려는 묘한 연기”는 드라마 <연애시대>(2006)에 이어 7년 만에 부녀로 다시 만난 김갑수로부터 제대로 배웠다. 연기를 할 때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지 않은 점이 좋단다. “감정적인 디테일은 갖고 가되 넘치지 않게 연기하는 건 정말 어렵다. 선생님이 나보다 더 어려우셨을 거다. 내 역할은 감정적인 폭발도 있고, 그때그때 정확한 감정을 짚으면 됐지만 선생님 역할은 범인일까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훨씬 섬세함이 필요했다.” 김갑수가 한참 후배인 국동석 감독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도 손예진에겐 귀감이 됐다. “나이 들수록 자기 것만 찾게 된다고 스스로 그걸 깨고 싶다 하시더라. 나에겐 호흡을 맞췄다 하기도 송구스러운 큰 어른이시다.”

서른 문턱을 넘으며 손예진은 배우로서 거쳐야 할 또 하나의 산도 넘은 것 같다. 한살 두살 나이 먹어가는 걸 기다리는 듯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배우만큼 좋은 직업도 없는 것 같단다. “내 의지대로 많은 걸 선택할 수 있지 않나. 여배우들은 어릴수록 생각해야 하는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소신껏 헤쳐나가야겠지만 언제나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 하는 직업이니까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지 않나.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다. 힘들다고 투정도 부리고 싶다.” 물론 우리는 손예진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충분히 짐작한다. 안으로 누르면 눌렀지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손예진 특유의 완벽주의를 생각하면 말이다.

손예진의 새로운 도전과제는 사극이다. 지난 여름에 종영한 드라마 <상어>에 이어 김남길과 또 한번 호흡을 맞추게 될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에서 손예진은 강인한 해적 단주 여월을 연기한다. 조선 건국시기를 배경으로 한 <해적>은 고래가 집어삼킨 국새를 찾기 위해 해적과 산적이 충돌한다는 내용의 활극이다. 여월은 거친 해적들 사이에서 여인의 몸으로 기어이 소단주에서 대단주가 되고야 마는 인물로 “연기의 깊이보다는 캐릭터 자체를 드러내야” 한다. 그간 손예진은 무수한 작품에 출연해왔는데 본격적인 사극은 처음이라니 의외다. “사극 톤은 처음 해보는 거라 걱정이 많다. 예쁘기보다 멋지고 카리스마 있어 보였으면 해서 또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있다. 참고할 만한 작품이 많지 않아 헤매는 중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열심히 봤는데 아무래도 정서가 달라서인지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몰랐던 손예진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손예진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할 길이 더욱 희미해진다. 손예진을 보기 전까지는 손예진을 본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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