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사장님이 이걸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예순이 넘으셨지만 안목은 젊으세요.” “왜 자꾸 나이 얘기를 하고 그래. 내가 철딱서니가 없어서 얘한테 야단맞을 때도 많긴 한데.” “말에 뼈가 있는데요. (웃음)” 티격태격, 옥신각신.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부녀 지간처럼 지내온 이춘연 대표와 전려경 PD의 대화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씨네2000 창립이 꼭 20주년인 2013년, 그들의 작은 재난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결코 작지 않은 승리를 이어가고 있는 8월19일에도, 그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과거는 히스토리, 미래는 미스터리, 현재는 선물(present)”이라는 이춘연 대표의 목소리에서 사뭇 밝은 기운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간만에 수백만 관객이 건네온 선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든 그들을 만나 테러 중계 작전의 뒷이야기와 제작자-PD-감독의 삼위일체 포메이션에 대해 들었다.
-500만 관객 돌파를 축하드린다. 올여름은 흥행 ‘속도’ 경쟁도 유독 뜨거웠는데, 씨네2000의 체감온도는 어떤가. =이춘연_한국영화 사상 이런 적이 없다. 1등은 한번도 한 적이 없는 한국영화가 19일 만에 500만명을 넘다니, 아주 기이한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설국열차>를 외국영화로 치고 있다. (일동 웃음)
-주말에 지방 무대인사도 다녀오셨더라. 이번에도 대표님이 직접 사회를 보셨나. =전려경_(연극을 하셔서) 워낙 무대를 잘 아신다. 이번에는 이런 식이었다. “재미있게 보셨나요? 누가 제일 보고 싶어요?” “(관객 일동) 하정우~!” “근데 하정우 머리 깎은 거 보셨죠? 문경에서 촬영 중이에요.” “(관객 일동) 에~.” “그래서! 제가 가서 데리고 왔습니다.” 신기하게도 늘 반응이 좋다.
이춘연_항상 먹히는 건 아니다. 정우가 와 있는 줄 사람들이 몰라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정우는 막 왔다갔다한다.
-“<돌려차기>는 너무 돌려차서 내가 맞은 영화” 같은 자학 개그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더 테러 라이브>는 워낙 잘돼서…. =이춘연_할 필요가 없어졌지. 그런 게 사람들이 뭐라고 한마디 하기 전에 내가 듣기 싫어서 먼저 자빠졌던 거다. 중요한 건 잘될 때도 안될 때도 시종일관 같은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는 거다. 좀 잘됐다고 열심히 하는 후배들 앞에서 왔다갔다하면 되겠나.
전려경_옆에서 봐온 15년 중 요즘 표정이 제일 어두우신 것 같다.
-<설국열차>와 같은 주 개봉은 베팅이었나. =이춘연_제작은 제작자가, 배급은 배급업자가 한다. 그것이 내 소신이다. 근데 한국영화끼리는 안 붙는 게 좋다. 그것도 내 소신이다. 그럼에도 배급사가 시장이 가장 큰 8월1일에 걸자고 했을 때 약간 두려우면서도 알아서 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기차 덕을 많이 봤지.
-6월 CGV 부율 회의 때는 기차랑 고릴라가 극장 독점하면 폭탄 테러하겠다는 농담으로 높은 호응을 샀다고. =이춘연_축사를 하라기에 부율 외 다른 문제도 언급하면서 “야구장 날아간다, 기차 폐차시키겠다”고 농담한 거다. 그때는 한치 의심도 없이 두 영화가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미스터 고> 개봉 이후로는 안 한다. 우리 제작자들은 그런 경험을 취미생활처럼 해봐서 그 상처를 아니까.
-캐스팅 비화도 재밌더라. 하정우가 몸담고 있는 4개 프로젝트의 PD를 모두 호출해 한달만 찍을 테니 양보해달라 부탁했다던데, 보통 제작자가 해서는 안 통할 방법 아닌가. =전려경_하 배우의 의지가 컸다. 하 배우가 다른 감독, 제작사 대표들에게 모두 공유해줬고 그들끼리 고민 중에 미팅이 이뤄진 거다. 우리도 놀랐다.
이춘연_3~4개월 찍을 거였으면 나도 말 못 붙였지. 서로 사정 다 아니까. 근데 한 장소에서 18∼19회차만 찍으면 되니까 설득해봤다. 다행히 그들도 ‘두목이 이 영화 만드셔야 하는데’ 하면서 고맙게도 비켜준 거고. 버스 타고 집에 들어가는데 밤 12시5분쯤 전화가 왔더라. 울컥했지. 크으, 이 자식들한테 진정한 형 노릇을 하려면 내가 잘해야겠구나.
-하정우란 카드는 어떻게 떠올렸나. =전려경_사장님의 역발상이었다. 김병우 감독은 원래 전형적인 앵커 이미지의 배우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이건 영화야. 방송이 아니야. 그러면 1시간 반을 책임질 수 있는 배우여야 해”라고 했다. 영화가 챕터 단위로 확확 바뀌잖나. 하 배우가 말이나 액팅이 굵직한 배우다. 그만이 그 국면들을 잘 연계하고 감당해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김병우 감독이 아드님 친구이기도 하다고. =이춘연_병우는 나를 처음 본 게 마루에서 팬티 바람으로 헐렁하게 앉아 있을 때였다는데, 팬티가 아니라 반바지였겠지. (일동 웃음) 아무튼 피붙이는 아들이 아니라 할아비라도 근처에 왔다갔다하는 걸 안 좋아한다. 각자 살자 주의다. 근데 녀석이 시나리오를 보내왔기에 별로면 야단이나 치려고 보여줬는데 좋대. 그럼 불러서 연구해보라고 한 거지.
전려경_막상 받아본 시나리오는 읽기가 아주 불편했다. 신이 아닌 챕터별로 나눠져 있는 데다, 부스 안과 밖의 상황이 감독 편의대로 블로킹돼 있었고, 폰트에 대한 감독의 강박도 묻어났다. 그런데도 초반에 굉장히 집중하게 되더라. 그래서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본 인상은. =전려경_씨네2000에서 가장 중요하게 배운 게 ‘사람 생긴 대로 영화 만든다’는 건데, 김병우 감독은 단단했다. 친해지고 나서는 중간에 지칠까봐 다른 시나리오를 써보라는 제안도 했는데 “저는 그냥 이거 할래요”라고 하더라. 나한테도 버팀목이 돼줬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상업적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관건은 무엇이었나. =전려경_시나리오를 읽고 사장님께 스릴러보다 저예산 재난영화로 풀고 싶다고 말했다. 제목도 <뉴스를 없애라>에서 <더 테러 라이브>로 바꿨다. 하지만 감독에게는 주문자가 아니라 질문자이고 싶었다. 김병우라는 사람의 영화의 컬러를 훼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김 감독도 이게 왜 재난영화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굉장히 성실하게 응답해줬다.
-씨네2000의 색깔이 묻어난 부분이라면. =전려경_사람 캐릭터들. 원래는 범인도 이름없는 ‘썸바디’였고, 테러도 빅 브러더의 음모처럼 명확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 캐릭터들이 구체화되면서 흐름도 더 유기적으로 변하고 관객을 위한 가이드도 만들어졌다.
이춘연_옛날부터 점원1, 이런 짓 못하게 했다. 영화에 안 보여줘도 사람을 만들라는 거다. 그 사람들끼리 그 안에서 생활해야지. 물론 그걸 영화에 다 보여주라는 건 아니고.
-첫 편집본은 지금보다도 훨씬 빨랐다던데 두분의 첫 반응은 어땠나. =이춘연_나한테 편집은 기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난 그냥 관객으로서 첫 번째는 정보 전달, 두 번째는 감정을 본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했지만 웃음의 포인트도 보이더라.
전려경_첫 편집본 시사 끝나고 사장님이 투자사들 다 있는 자리에서 그러셨다. “난 재밌어.” 잠시 동안 다들 아무 말도 못하더라. 근데 그게 감독이나 나한테 굉장히 큰 힘이 됐다.
-엔딩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분은 감독의 원안을 고수했다고. =이춘연_마지막에 쓸데없는 짓 하고 싶지 않았다. 감독이 원하는 형식에 맞춰서 끝내줘야지. 지금 엔딩, 폼 나지 않나? 쿨하고! 거기서 윤영화가 누구한테 구출당하는 건 ‘라이브’에 안 어울리지. 사람들은 나 같은 노인네가 왜 그걸 가만히 놔뒀을까 궁금했던 모양인데, 나는 그런 놈이 아니오. 으허허허.
-대표님은 끝에 대통령 목소리로 나오는데, 카메오 출연작도 까다롭게 고르는 것으로 안다. =이춘연_조/단역 배우들 일을 뺏는 거니까 따져야지. 대통령은, 녹음한 배우 목소리가 너무 단정한 톤이라며 나보고 하라기에 했다. 별로면 안 써도 된다고 했더니 잘 안 들리게 썼더라.
전려경_아니다. 주인공 감정 때문에 볼륨을 잠시 낮춘 거다. (웃음) 류승완 감독 영화에서 나쁜 경찰청장이나 국회의원 역을 많이 해보셔서 능숙하셨다.
이춘연_이제는 안 할 거다. 연기 못하는 것 다 들켰다.
-갈수록 대표님은 세세한 제작 과정에는 손을 안 대는 것 같다. =이춘연_가능하면 멍석만 깔아주려고 한다. 아무리 아는 척을 해도 나는 60대다.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면 애들끼리 해야지. 다만 관객 입장에서 이상한 게 있으면 질문하겠다는 거다. 결정적인 대안이 없으면 나도 설득당하는 거고. 감독과 PD에게 설득당하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려경_거창하게 비유하면 그룹의 회장으로서 우리가 작은 프로덕션의 사장처럼 일할 수 있게 만들어주신다. 누군가는 영화판을 공사판에도 비유하고, 제작사 안에서도 갑과 을이 있다는데, 씨네2000은 안 그렇다. 믿어주시니까, 자신감있게 일할 수 있다.
이춘연_자기가 선택해놓고 그 사람을 못 믿으면 나쁜 놈이거나 바보지.
-PD님은 첫 직장이 씨네2000이었나. =전려경_이 회사의 유일한 공채다. 1998년에 <씨네21> 뒤에 난 공고 보고 원서 내서 붙은 거 아니겠나. 기획실 들어와서 처음 맡은 영화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고.
-2000년대 중반에는 잠시 씨네2000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전려경_<오! 당신이 잠든 사이>라는 뮤지컬을 <여고괴담4: 목소리>를 같이한 최익환 감독과 도모해서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나간 거였다. 씨네2000에서는 재고해봐야겠다고 했고 오퍼스픽쳐스에서 제안이 들어왔었다. 결국 거기서도 못 만들고 돌아왔지만.
이춘연_한국 영화계가 손바닥만 해서 다 동업자고 다 가족이다. 그래서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는다. 단, 돌아올 때 잘 안돼서 돌아온 느낌을 주면 안되잖나. 나름대로 엄청 연구해서 <체포왕>이 3개월 뒤면 촬영 들어가니까 ‘와라’ 했는데 오래 걸렸다.
-PD님한테 <체포왕>은 어떤 영화인가. =전려경_마음껏 놀아보라고 장을 열어주셔서 또래 충무로 라이징 스탭들과 마음껏 놀아본 영화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첫 기획을 맡았던 <여고괴담4: 목소리> 때도 나랑 최익환 감독 보고 “잘난 척하는 애 2명 붙여놨더니 잘난 척하는 영화가 나왔다”고 놀리시면서도 묵묵히 지켜봐주셨다. 우리는 새로운 기획에 경도돼서 ‘귀신이 왜 대상이 돼야 해? 주인공이 되어보자!’ 이러고 있었는데. (웃음)
-묵묵히 지켜보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그동안에도 돈이 나가잖나. =이춘연_방법이 없다. 그때 포기하면 훨씬 손해니까 가기는 가야 한다. (일동 웃음)
-대표님은 고민 상담을 누구에게 하나. =이춘연_아, 중요한 질문이다. 내 고민이란 게 주로 돈 고민인데 그걸 누구한테 이야기하겠나. 유일하게 강우석 정도?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다. 자기 직전에, 아침 화장실에서, 혼자 운전할 때, 기도하다 막 울기도 하고. 대신 위로받는 어른들은 있다. 임권택 감독님, 안(성기) 스타, 김동호 위원장님.
-<여고괴담> 6편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이춘연_시나리오 단계다. 요즘은 15살 이하는 1.5, 50대 이상은 0.7을 곱하라고들 하잖나. 18살은 27살의 고민을 안고 사니까 정서도 이야기도 다르게 가야지.
전려경_5편까지 한국 호러에서 할 건 다 한 것 같다. 이제는 캐릭터 판타지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보려고 한다.
-장르물 시리즈로서 초기의 활력을 잃었다는 평이 많았다. 그 고민의 해답을 캐릭터 판타지에서 찾은 건가. =전려경_캐릭터 판타지에 대한 욕심이 먼저이긴 했으나, 그런 셈이다. 기존의 한국 호러는 귀신이 나와서 한풀이하는 거라 과거지향적이다. 반면 지금 10대 관객이 좋아하는 캐릭터 판타지들의 제1덕목은 대리만족이다. <트와일라잇> <크로니클>만 봐도 요즘 10대들에게 영화를 통해 자신의 능력 이상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죽은 귀신보다 살아 숨쉬는 공격적인 캐릭터들을 만들려 한다.
-서로는 어떤 딸, 어떤 아버지인가. =이춘연_얘가 시집간다고 하면 내가 손 붙잡고 들어가야지. 동료이자 후배기도 하지만 혹시 아버지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그때도 내 역할을 다하려고 한다.
전려경_영화판에서의 관계를 넘어서, 순수한 말뜻 그대로 두사부일체다. 나를 제일 잘 알고 제일 많이 믿어주는 분이다.
-서로 미울 때는 없나. =전려경_(잠시 생각하다) 많지. 김 감독이랑 나도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 나 때문에 힘든 적 없냐고 물어보니 그러더라. “왜 없었겠어요. 근데 지나고 나니까 PD님 말이 다 맞았어요.” 나도 비슷하다. 사장님이 뭐라시면 화내고 삐치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그 말이 맞다.
-듣다보니 3대가 함께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전려경_(웃음) ‘과속 3대’ 같은 건가. 그런 기운이 있긴 하다. 씨네2000 지론이 사람 영화다. 라인업을 봐도 사람 냄새가 안 나는 영화가 없고. 올해가 20주년이라 옛날 필름영화들 모아서 상영회라도 갖고 싶은데 사장님이 거부하신다.
이춘연_우리끼리 밥이나 먹으면 되지.
전려경_저러실 때 밉다.
이춘연_그나저나 <씨네21>도 100만 독자를 상대로 책을 만들어야지. 사진 좀 시원시원하게 넣어서. 으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