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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표현물] 피서를 원하신다면
이적(가수) 일러스트레이션 아방(일러스트레이터) 2013-08-19

부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이적, 태일과 <설국열차>를 이야기하다

부산에 갈 일이 있어 한낮 서울역에서 태일과 KTX를 탔다.

“야, 이적, 이거 특실이잖아. 나 특실은 첨 탄다.” “이름이 특실이지 조금 편한 정도야.” “의자 죽이는데? KTX는 원래 졸라 좁은 줄 알았더니.” “의자도 의자지만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이 적어서 종종 타.” “너도 애들 있으면서 시끄러운 건 못 참겠냐?” “내 애도 시끄러운데 남의 애는 오죽하겠니.” “그러고 보니 난 비행기 비즈니스석도 아직 못 타봤다. 짜증나네.” “나도 일 때문에 갈 때나 타지, 남의 돈으로. 제 돈 주고 어떻게 타.” “빠져나가지 마라. 더 열 받게. 비행기에서 내릴 때 비즈니스석을 거쳐 내리게 하는 거 다 지친 승객에게 ‘다음번에는!’ 하는 상승욕구를 심어주기 위해서라며?”

지나가는 매점카트에서 맥주와 오징어포를 사서 분위기를 바꾼다.

“차창을 스쳐가는 산과 들을 보며 한잔할 수 있는 게 기차여행의 생명 아니겠어.” “근데 이적, 지난주 내가 <씨네21>에 보낸 메일 실렸더라. ‘태일의 메일.’ 반응 죽이던데?” “반응? 글쎄. 뭐 특별히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놀고 있네. 질투하냐? 편집부에서 장문의 감사메일이 왔었어. 이러다 너 까이는 거 아니냐?” “그냥 예의상 남기는 인사지.” “내 글이 훨씬 시원하고 매력적이라더라. 너 나한테도 밀리면 어떡하냐. ‘패닉’에선 김진표한테 밀리고 ‘카니발’에선 김동률에게 밀리고 ‘처진달팽이’에선 유재석에게 밀리고 ‘방송의 적’에선 존 박에게 밀리더니, 급기야 나한테도 밀리냐, 븅신.” “화장실 좀 다녀올게.”

화를 식히려 객차 사이에 앉아 밖을 쳐다본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논밭. 시속 300km쯤 되려나. 저 자식을 여기서 밀어버릴까. 자리에 돌아왔더니 그새 태일이 맥주 캔 몇개를 더 사 쌓아두었다.

“카트가 한번 지나가면 잘 안 오는 거 같아서 좀 재어 놓았다. 잘했지?”

가끔은 이쁜 짓도 한다. 권커니 잣거니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는 와중 태일이 <설국열차>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좋던데 말들이 많대? 뭐 그래도 천만 가겠더만. 최근 천만 영화 중에는 제일 밀도있는 작품 아니냐?” “알레고리란 게 참 다루기 어려운 거야. 좋게 말하면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지만 나쁘게 말하면 의도가 보이는 우화가 되니까.” “영화에서 특히 그렇겠지.” “그래. 예를 들면 카프카의 <변신>. ‘직장인이 잠에서 깨보니 벌레가 되어 있더라.’ 이건 ‘버러지 같은 삶’에 대한 직유 같은 알레고리거든. 잘못하면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카프카 소설에선 생생하다고. 물론 처음 프라하의 카페에서 카프카가 이 작품을 친구들한테 낭독했더니 다들 깔깔 웃었다고 하는데…. 유머를 포착한 걸로 해두고. <변신>을 그래픽노블로 만들어도 몰입이 돼. 루이스 스카파티의 일러스트 버전도 괜찮아. 그런데 만약 이 작품을 실사영화로 만든다고 생각해봐. 잘못하면 <맨 인 블랙>의 바퀴벌레 외계인처럼 농담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어. 영화는 가장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문학을 받아들일 때와는 다른 더듬이들이 작동하거든.” “그런 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선방한 거 아니냐고. <가타카>같이 도식적인 영화보다 낫잖아. 원작 만화는 못 봐서 모르겠지만 관념적인 설정들을 최대한 살갗에 닿는 피와 땀의 체험으로 바꾸어내잖아.” “난 핵심이 봉 감독님 특유의 시선에 있다고 봐. 서늘한 냉소주의. 하나의 생태계를 기획한 뒤 그걸 차분히 배양하고 관찰하는 거지. <월드워Z>에 잠깐 나왔던 세균학자의 시선과 비슷해. ‘대자연은 연쇄살인마다.’ 이 얘기 할 때 그에게 선악의 판단 같은 건 없어. 미드 <본즈>의 법의학자 본즈도 그렇지. 시체건 뭐건 침착하고 냉정하게 분석해 가는 거야. 약간의 스릴감을 느끼며. 이런 시선으로 감독이 ‘사회란 이런 것이다’를 툭 던지듯 보여주니 순간순간 소름이 돋지.” “사회학과 출신이라 그런 거 아니냐. 이적 너도 어떨 땐 소시오패스같이 보일 때가 있어.”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소시올로지. 겨우 졸업한 나한테 전공 얘기는 하지 마. 그리고 누가 봐도 소시오패스는 너지.” “이 새끼가 누구보다 감성 충만한 나를!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건 봉준호의 리듬감이거든. ‘봉의 순간들’이 있어. 한 박자 빠르다고. 에드가가 죽을 때나 길리엄이 죽을 때나 죽음의 포인트도 늘 한 박자 빨라. 애정을 갖고 따라가던 캐릭터인데 감정선을 못 챙겼다고 징징대는 관객도 있더만, 난 그 뜻밖의 리듬이 이 영화를 감동과 교훈 가득한 할리우드영화와 다르게 만들어줬다고 봐. 봉 감독이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변태’라고 칭했던데 역시 진짜 그래서 나랑 잘 맞는 건가. 으하하.” “태일아, 너도 결국은 음악 계속해야 돼. 변태성을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풀 수 있는 곳은 예술밖에 없어. 변태일수록 더욱 숭앙받기도 하고.” “까고, 야, 에드 해리스가 윌포드로 나올 때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트루먼 쇼>의 PD가 겹쳐져 짜릿하더라, 응? 에드 해리스가 의외로 절대자 타입인가봐.” “너 아까 <가타카>는 도식적이라며, <가타카> <트루먼 쇼> 둘 다 앤드루 니콜이 각본 쓴 거 알아?” “그래서 영화는 각본도 중요하지만 감독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아니냐!”

부산역에 내리자 광장은 뙤약볕에 끓고 있었다.

“이적, 오늘 일 끝나면 김영하 작가 만나는 거냐? 부산 산다며?” “만나야지. 나눌 얘기도 좀 있고. <씨네21> 격주연재도 같이 하잖아. 사실 이 칼럼 컨셉 아이디어도 영하 형이 준 거야.” “칼럼 컨셉? 뭔 컨셉이 따로 있냐?”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태일과 나는 딱정벌레 같은 택시에 올라타 해운대로 향한다. 더위를 뚫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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