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모텔일 거라 생각하고 갔는데 ‘매직하우스’라는 이름의 세트장이었다. 아뿔싸! 베드신을 공개한다는 제작진의 전갈을 제멋대로 오해한 것이다. 3월23일 경기도 남양주시 근처의 한 세트장에서 진행된 이상우 감독의 <비상구> 촬영현장. 색색의 조명이 칙칙한 모텔방 세트를 요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침대 위의 남자 우현(한주완)은 여자(조윤희)의 배꼽 아래 새겨진 화살표 모양의 문신을 핥고 있었다. 촌스러운 여관 조명 때문인지 그들의 벗은 몸은 유독 앙상해 보였고 앙상한 두 육체가 뒤섞이는 풍경은 그래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혹여 배우가 불편해할까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중, 이상우 감독이 “컷!”을 외친 뒤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촬영 장소가 모텔일 거라 생각했다”는 어색한 농을 인사 대신 건넸다. 그는 웃으며 “섭외 가능한 모텔이 하나도 없었다. 세트를 짓는 바람에 제작비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들어갔다”고 아쉬움부터 털어놓았다.
<엄마는 창녀다>(2009), <아버지는 개다>(2010), <바비>(2011) 등을 만든 이상우 감독이 ‘숏!숏!숏! 2013 소설, 영화와 만나다!’를 위해 선택한 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은 <비상구>다. 작가의 단편 모음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수록된 작품이다. 여자의 화살표 문신이 배꼽에서 시작해 성기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다고 해서 비상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건 막 스무살을 관통한, 하지만 마땅한 탈출구가 없는 우현의 절실한 바람이자 꿈이다. 어두운 청춘이 풍기는 우중충한 분위기가 취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여자의 성기에 난 털을 미는 장면 같은 만만치 않은 노출 설정 때문일까. “<비상구>를 고른 감독은 아무도 없었다”는 게 영화제 관계자의 전언이다. 반면 이상우 감독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하릴없이 방황하는 우현의 모습에서 신촌 거리를 방황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고 “한치의 고민 없이 <비상구>를 골랐다”. <비상구>는 그간 가족을 극단적으로 해체하거나 성과 폭력을 과감하게 묘사해온 이상우 감독의 첫 청춘영화이다.
원작이 그랬듯 이날 공개된 장면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우현과 여자가 섹스를 통해 정서적으로 친밀해져가는 장면이다. 그래서일까. 거리에서 기를 쓰고 살아가는 둘은 어떤 치장도 하지 않은 전라의 상태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을 보이고 있나보다. 여자의 몸을 혀로 핥던 중 우현은 화살표 문신이 가리키고 있는 여자의 성기에 이름을 붙인다. “네 거시기에 이름을 붙였는데 말야.”(우현) “뭔데? 웃기면 죽어.”(여자) “비상구.”(우현) “비상구는 불났을 때 뛰어가는 곳이잖아.”(여자) 그 말을 들은 우현은 팬티를 내린 뒤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며 “지금 불났어”라고 말한다. 대사만 보더라도 만만치 않은 장면인데, 두 배우는 거리낌이 없다. 400여명의 경쟁률을 뚫고 우현 역을 차지한 한주완은 지난해 이송희일 감독의 <지난여름, 갑자기>에서 선생님을 무턱대고 쫓아다니는 상우 역의 그다. 한주완은 “김영하 작가의 오랜 팬이라 <비상구> 역시 출연 전 이미 읽은 작품”이라며 “그 사실을 감독님께 메일로 써서 알”릴 만큼, 당돌한 신예였다. 노출 연기를 선보여야 했던 여자 역을 맡은 조윤희 역시 “일일이 가족을 설득”하며 <비상구> 출연에 대한 의지를 보였단다. 두 배우의 의욕 덕분인지 감독은 간단한 주문만으로도 촬영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오늘 속도가 빠른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이상우 감독은 “아니다. 지금까지 한 작품 중에서 가장 느린 속도”라고 투덜거렸다. 그의 대답은 빠른 진행 속도만큼이나 공들이며 찍고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우현과 여자, 이 불안한 청춘들은 밝은 미래를 향한 비상구를 찾을 수 있을까. 그건 전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청춘의 어떤 불안함
<비상구>의 이상우 감독 인터뷰
-김영하 작가의 단편 <비상구>를 선택했다. =원래 작품을 알지 못했다. 이번 ‘숏!숏!숏! 2013 소설, 영화와 만나다!’에 참여하면서 그의 소설 여러 편을 읽을 수 있었다.
-<비상구>는 방황하는 청춘을 그린 어두운 작품인데,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 속 주인공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건 아니었지만, 어릴 때 우현과 비슷한 고민과 방황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고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비상구>를 선택한 감독님들이 아무도 없었다. (필모그래피에서 청춘을 소재로 한 작품이 없었다고 말하자) 맞다. 청춘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청춘과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하는 청춘은 또 다른 모습일 것 같다.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고, 그래서 더욱 치기어린 청춘의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소설 속 우현에 공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만든 작품 모두 직접 각본을 썼다. 원작을 영화화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확실히 편하더라. 이야기의 큰 줄기가 있고 캐릭터가 확실하니까. (앞으로 원작을 영화화할 계획이 없냐는 질문에) 그래도 직접 써야지. (웃음)
-영화 <비상구>는 원작과 어떻게 달라질까. =김영하 작가님께서 편하게 각색하라고 하셨다. 원작과 다른 장면이 몇 군데 있다. 특히 원작의 후반부에 우현과 경찰이 거리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간단하게 처리했다. (그 이유가 뭔가라는 질문에) 원작처럼 이 골목, 저 골목 옮겨가며 긴박하게 찍으려면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게 되니까.
-촬영 전 배우들에게 주문한 건 뭐였나. =특별한 주문은 하지 않았다. 배우를 특정 캐릭터에 맞추기보다 배우가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게 했다.
-노출 신의 비중이 상당하다. =두 배우가 서로 어색해하지 않아야 했을 텐데. 촬영 전부터 두 사람에게 서로 자주 만날 것을 주문했다.
-올해 공개할 예정인 차기작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지옥화> <내 아버지의 모든 것> <나는 쓰레기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 등 총 4편을 선보일 계획이다. 많다고? 더 찍고 싶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