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개봉하지 않고 IPTV와 웹하드로 직행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한번쯤 챙겨볼 만한 작품 13편을 골라봤다. 그리고 IPTV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전도 정리했다. 모두 KT 올레TV, SK BTV, LG 유플러스 등 IPTV 3사와 네이버, 다음 포털 사이트의 다운로드 서비스를 통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독재자> 감독 래리 찰스 / 출연 사샤 바론 코언, 안나 패리스, 벤 킹슬리, 비제이 노박 / 83분 / 청소년 관람불가
“김정일 위원장을 추모하며.” 시작부터 골 때리는 헌사로 훅을 날리는 사샤 바론 코언과 래리 찰스 감독 콤비다. 곧이어 중동의 가상국가 와디야의 독재자 알라딘(Aladeen, 램프의 요정 따위를 떠올리면 곤란하다)이 등장한다. 링컨 수염을 단 석유 왕자 혹은 오사마 빈 라덴처럼 생긴 그는 막장 독재의 일인자다. 알라딘 올림픽을 만들어 자기 혼자 14종목을 석권하면서 놀다가, 심심하면 아무 단어나 ‘알라딘’으로 바꾸어 ‘HIV 알라딘(양성)’과 ‘HIV 알라딘(음성)’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질 않나, 핵미사일의 탄두 모양을 대형 여성자위기구처럼 만들었다는 이유로 연구원을 사형해버리고, 가케무샤를 수시로 만들어놨다가 암살 위협이 있을 때마다 1회용처럼 쓰고 버린다. 그가 유엔 연설을 위해 미국에 갔다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고 개과천선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비록 선머슴같이 생겼으나 자신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갸륵한 조이의 유기농 슈퍼마켓에서 일하게 된 그는 두손을 잃은 장애 직원을 ‘후크 선장’이라 놀리고, 게을러빠진 가게 점원들을 협박과 고문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한다.
저렇게 밑도 끝도 없는 에피소드들에 마음껏 배꼽을 잡아도 되느냐 묻는다면, 물론이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정치적 올바름’ 같은 건 잠시 쓰레기통에 처박아둬도 된다는 이야기다.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로 무아지경의 유머감각을 선보였던 사샤 바론 코언과 래리 찰스 감독은, 이번에도 옳고 그름에 대한 통념보다 즉자적인 웃음의 힘을 신뢰한다. 사실 남녀노소 흑백빈부를 가리지 않는 웃음이야말로 지체 높으신 ‘가카’들이 그렇게 운운하는 민주주의의 척도이자 동시에 그들이 가장 곤란해하는 무언가가 아닐지. 폭소와 실소와 조소가 난무하는 <독재자>는 그들로서는 웃어도 난감, 안 웃거나 못 웃어도 난감할 영화다.
강성 페미니스트/평화주의자/생태운동가 조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는 독재자 알라딘은, 정치가 낳은 웃음이 정치를 무력화하는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난장판 속에서 정신줄 놓고 웃다보면, 이 영화를 VOD로만 감상할 수 있게 만든 것이야말로 정치적 음모가 아닌가 하는 무모한 추측마저 해보게 된다. 이런 코미디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킥킥거리며 볼 수 없다는 것이 실로 유감이다.
이정희 후보의 TV토론보다 더 큰 웃음을 원하는 유권자들에게 강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감독 스티븐 달드리 / 출연 샌드라 불럭, 톰 행크스, 토머스 혼 / 129분 / 12세 관람가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포스트 9.11을 다룬 영화는 많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역시 그 리스트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오스카(토머스 혼)는 9.11 때 아버지(톰 행크스)를 잃은 소년이다. 그 충격으로 오스카는 엄마와의 대화를 단절하고,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다가 그는 아버지와 함께 어떤 열쇠를 찾기로 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열쇠를 찾아 떠난다. 9.11 때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등 아버지와 관련된 여러 기억들은 때로는 그에게 상실감을, 때로는 그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영화는 외형적으로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열쇠를 찾아 떠나는 한 소년의 로드무비지만, 영화를 지탱하는 정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아버지와 관련한 기억의 여러 조각들이 논리적으로, 혹은 시간순대로 연결되어 있진 않다. 다소 거칠고, 뜬금없는 조각의 연결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9.11 이후 남아 있는 자들의 상실감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일로 상처를 받아 감정적으로 위안을 받고 싶다면.
<모터웨이: 분노의 질주> 감독 소이청 / 출연 황추생, 여문락, 곽소동, 임가동, 엽선, 서희원 / 89분 / 15세 관람가
이토록 낭만적인 카체이스 액션이라니. 잠복 교통순경이자 자칭 스피드광인 아상은 도주왕 젠슨을 뒤쫓던 중 90도로 꺾인 골목 앞에 도착하는데, 그 순간 스크린에 신기루가 인다. 곧 홍콩의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우는 건 엔진의 울부짖는 굉음과 타이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그 황홀경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덧 젠슨은 홀연히 사라진 뒤다. 그런가 하면 이후 깊은 밤 녹음이 우거진 국도에서 벌어지는 추격전도 유려하기 그지없다. 한때 젠슨의 유일한 적수였던 선배가 죽음의 레이스를 펼치는 이 시퀀스에서 영화는 단숨에 무림고수들의 세계로 도약한다. 흔들리는 나뭇잎, 세 드라이버의 눈빛 하나 놓치지 않는 카메라까지 절묘하다. 무협영화의 호흡과 누아르의 명암을 품은 소이청만의 카체이스 액션이 빛나는 순간들이다. 그러고 보면 두기봉 사단 출신인 그에게 순정 마초들의 낭만주의가 묻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번 신작에서는 간결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액션의 호흡에 대한 집중도를 더욱 높였는데, 그 덕분인지 몇몇 장면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만든 영화의 쾌감을 선사한다.
장롱면허 딱지를 몹시 떨쳐버리고 싶어질 영화.
<영 어덜트> 감독 제이슨 라이트먼 / 출연 샤를리즈 테론, 패트릭 윌슨, 패튼 오스왈트, 엘리자베스 리저 / 94분 / 15세 관람가
세상의 어른들을 철이 좀 더 든 어른들과 철이 좀 덜 든 어른들로 나눈다면, 메이비스 게리는 후자에 속한다. 한때 잘나갔던 YA 시리즈물의 대필 작가로 연명하고 있는 그녀. 여기서 YA란 ‘Young Adult Literature’의 준말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읽기물을 가리키는 출판계 용어다. 그중에서도 10대용 칙릿물을 주로 쓰는 메이비스는 그녀의 여주인공과 비슷한 멘털리티를 자랑한다.
발단은 고등학교 시절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아기 아빠가 되었다며 보낸 메일이었다. 그녀는 마감에 쫓기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되찾아오겠다며 ‘미션 임파서블’에 나서는데, 그 결과는 참혹하다 못해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시큰거릴 정도다. <주노>로 유명세를 얻은 각본가 디아블로 코디와 제이슨 라이트먼이 간만에 다시 뭉친 신작으로, 특히 라이트먼은 <인 디 에어>에 이어 이번에도 철부지 어른들에게 한발 늦게 찾아온 성장통의 욱신거림을 정확히 간파해낸다.
피터팬 콤플렉스 예방 혹은 치료에 뛰어난 효과가 있습니다.
<창> 감독 연상호 / 목소리 출연 이환, 이수현, 명승훈 등 / 29분 / 15세 관람가
중학교 교실 안의 계급과 폭력(<돼지의 왕>)을 그려낸 바 있는 연상호 감독이 이번에는 군 내무반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정철민(이환) 병장은 ‘모범’ 군인이다. 부대의 작은 규칙을 어겨서라도 후임병의 생일을 손수 챙겨줄 만큼 리더십을 갖추고 있고, 부대 족구대회에서 우승을 놓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운동신경을 소유하고 있다. 그에게 분대원은 한배를 탄 동료이자 가족이다. 그러나 내무반의 평화도 ‘고문관’ 홍영수가 들어오면서 깨진다. 부대의 무분별한 외박 허락을 보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정철민은 그날부터 홍영수를 모범 군인으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정철민의 교육이 성과를 거두나 싶던 중, 홍영수는 동계훈련을 받다가 잔머리를 굴린 게 대대장에게 발각되고, 그의 잘못으로 분대 전체가 ‘얼차려’를 받게 된다. 화가 난 정철민은 홍영수를 구타하고, 홍영수는 화장실에서 자살기도를 한다. 그 일이 알려지자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어진다.
<창>은 연상호 감독이 <돼지의 왕>을 만든 뒤 내놓은 29분짜리 애니메이션이다. 종석, 경민 같은 약자(혹은 피해자)의 시선으로 교실의 계급사회를 그려낸 <돼지의 왕>과 달리 <창>은 폭력의 가해자 정철민의 입장에서 피해자이자 약자인 홍영수를 묘사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부조리한 군 현실 속에서 나름 의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정철민이지만 그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군 계급사회에서 맨 밑바닥에 있는 까닭에 살아남으려고 잔머리를 굴린 홍영수 역시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분대원 전체가 폭력에 시달리는 것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계급의 높낮이를 떠나 모두가 폭력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이다. 연상호 감독은 그것이 ‘창’이 없는 군대사회의 모습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곧 입대를 앞둔 청년들에게 꽤 유용한 예습 교재가 될 것이다.
<마사 마시 메이 마릴린> 감독 션 더킨 / 출연 엘리자베스 올슨, 존 호키스, 사라 폴슨, 휴 댄시, 루이자 크로즈, 브래디 코베 / 102분 / 청소년 관람불가
한 소녀가 세개의 이름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첫 장면에서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이름은 마시 메이.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여기는 그녀는 캣스킬이라는 산속의 외딴 마을에서 패트릭이라는 남자가 이끄는 기괴한 컬트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찰스 맨슨식 궤변으로 사람을 홀리는 패트릭에게 첫 경험을 바친 뒤 비밀스런 집단 생활에 깊이 연루된 그녀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루이스 마릴린이란 공동 가명을 사용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그 이름들로부터 도망을 결심하고, 2년 만에 찾은 언니 루시의 별장에 숨어 자신의 원래 이름 마사에 다시 익숙해지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몸과 마음에는 마시 메이와 마릴린의 기억이 더 또렷하게 새겨져 있어 마사의 정체성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현재와 과거의 미로 속에 놓인 이 심리드라마에서 최고의 발견은 마사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 올슨이다. 유명 쌍둥이 자매 올슨이 맞다. 마사가 어쩌다 컬트에 빠졌는지, 언니와 인연은 왜 끊었는지 많은 부분이 모호하게 남겨져 있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미묘한 감정의 얼개를 차분하게 풀어낸다.
많은 평자들도 앞다투어 그녀의 섬세한 연기에 한마디 보태고 싶어 했다. 그중 로저 에버트는 “이제 누구도 ‘둘 중 누가 그 올슨이야’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녀의 존재감을 재치있게 요약했다. 더불어 칸 비평가주간 초청, 선댄스 감독상 수상에 빛나는 신예감독 션 더킨도 주목해야 할 재능이다. 그는 플래시백의 정교한 배치와 차가운 응시를 통해 소녀의 불안을 지속시키는 데 성공한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감독과 배우의 조합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다.
방황하는 청춘, 상처받은 영혼에 끌리는 당신에게.
<위대한 비밀>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 출연 리스 이판, 제이미 캠벨 바우어, 데이비드 듈리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조엘리 리처드슨 / 129분 / 15세 관람가
<위대한 비밀> 자체가 일종의 지각변동이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지구멸망이 아닌 셰익스피어에 관한 이야기로 눈을 돌린 것은 그만큼 예기치 못한 외도다. <스타게이트>부터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투모로우> <10,000 BC> <2012>까지, 지난 20년간 전무후무한 재난영화 전문 감독으로 활동해온 그가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파국의 현장을 찾아나선다. 셰익스피어의 정체에 관한 ‘위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그곳은,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 문제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영국 궁정. 그곳에 불어닥칠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진입한 영화는 관객에게 어느 귀족 극작가의 공모자가 되어주기를 청한다. 셰익스피어라는 꼭두각시 뒤에 몸을 숨긴 채 펜 하나로 민심에 불을 지피려 했던 옥스퍼드 백작이 바로 그다. 예술을 통한 혁명을 꿈꿨던 그는 자신의 유토피아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도박을 감행하는데, 그 풍경을 조망하는 감독의 시각은 <투모로우>나 <2012>의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음모론 마니아라면 제법 솔깃할 가설이다.
<세크리테어리엇> 감독 랜들 윌리스 / 출연 다이앤 레인, 존 말코비치, 마고 마틴데일, 넬슨 엘리스, 스콧 글렌 / 123분 / 전체 관람가
“누가 비서(secretary)의 주인이오?” 비웃음이 섞인 질문에 페니 체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응수한다. “두고 보세요. 제 빅 레드가 당신네 말들도 다 이겨버리고 말걸요.” 아이를 넷이나 둔 중년부인으로서 뒤늦게 경마 사업에 뛰어든 그녀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해 세크리테어리엇은 정말로 미국 3대 경마대회를 모두 휩쓸었고, 가장 힘들다는 벨몽트 스테이크에서는 무려 2등 말과 77.5m 차이로 결승점에 들어오며 경마의 역사를 새로 썼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진정 감동적인 것은 세크리테리엇과 페니 체너리의 지극한 관계보다 승부에 임하는 그들의 태도다. 경기마다 꼴찌로 출발하지만 우직하게 달려 역전승을 거머쥐고 마는 세크리테어리엇,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고비마다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뚝심이 멋있는 페니 체너리, 거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정면승부를 시도하는 트레이너 루시엔 로렌과 기수 로니 터코트까지. 그들과 함께 2시간 남짓 달리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도 그동안 잊고 살았던 무언가가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줄 영화.
<지알로>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 출연 에이드리언 브로디, 에마뉘엘 세이그너 / 92분 / 15세 관람가
옐로우(지알로)는 외국인 미녀를 택시로 납치해 얼굴을 훼손한 뒤 죽이는 살인마다. 어느 날, 영국 출신의 스타 모델이 지알로의 택시에 납치당한다. 동생을 보러 이탈리아 토리노에 온 모델의 언니는 동생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형사 엔조(에이드리언 브로디)를 만난다. 엔조는 뉴욕에서 온 이탈리안 형사다. 두 사람은 동생과 옐로우를 찾기 시작한다. 사건을 조사하던 중, 엔조는 자신이 옐로우와 비슷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지알로(노란색)는 다리오 아르젠토가 구축하다시피한 이탈리아 호러 스릴러 장르를 뜻하는 단어다. 그 얘기는 <지알로>가 다리오 아르젠토가 창조한 호러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임을 의미한다. 전작이 그랬듯 이야기의 전개는 덜컹거리는 반면 미녀를 납치하고, 신체를 훼손한 뒤 자극적인 방법으로 살해하는 감독 특유의 화려한 스타일은 여전하다. 다리오 아르젠트 영화를 조금이라도 챙겨본 이들에게는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게 하고, 초심자에게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입문서가 될 만한 작품이다.
CG로 된 피범벅에 신물이 난 호러영화 팬들.
<잭 앤 미리의 포르노 만들기> 감독 케빈 스미스 / 출연 세스 로건, 엘리자베스 뱅크스 / 96분 / 청소년 관람불가
‘친구와 연인 사이’는 로맨틱코미디 장르가 애용해온 고전적 테마다. 다만 같은 소재를 케빈 스미스가 요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터. 일찍이 <체이싱 아미> <도그마> <제이 앤 사일런트 밥> 같은 인디영화들을 통해 ‘돌+I’ 계열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그가 로맨스와 코미디에 포르노를 함께 넣고 버무려낸 결과물이 <잭 앤 미리의 포르노 만들기>다.
서로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인 잭과 미리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룸메이트로서 대단히 무기력한 삶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밀린 전기세와 수도세로 인해 절수, 절전에 부딪히자 그들도 무위도식 라이프 스타일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방도를 궁리하던 그들은 포르노영화 제작에 나서는데 그때부터 그들 관계에 이상야릇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특히 그들이 베드 신 촬영을 계기로 서로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자각하게 된 뒤로는 진지한 로맨스의 영역을 넘보기까지 한다.
친구가 이성으로 느껴질 때 대처하는 자세를 알려드립니다.
<더 시터> 감독 데이비드 고든 그린 / 출연 조나 힐, 아리 그레이너, 샘 록웰, 카일리 번버리 / 81분 / 청소년 관람불가
이보다 더 난장판일 수는 없다. 여자들에게 만만한 남자 취급을 당하며 살아온 20대 청년 노아 그리피스는 엄마의 소개팅을 돕고자 엄마 친구네의 1일 보모를 자청하는데, 아이들을 보고 ‘급’후회한다. 아직 자신이 게이인지 깨닫지 못한 자칭 성격장애 아동 슬레이터, 화장을 떡칠한 채 아무 데나 ‘섹시’하다는 말을 갖다붙이는 막내 블라이드, 남미 갱스터 취향에 심취한 나머지 폭탄 제조가 취미인 입양아 로드리고. 집안에만 가둬놔도 무사고를 보장하기 힘든 조합이건만 노아는 여자친구의 꾐에 넘어가 그들을 데리고 외출에 나서고 만다. 거기다 그녀의 부탁으로 찾아간 코카인 딜러와의 거래가 예상외로 꼬이기 시작하면서 노아와 아이들의 저녁은 한편의 악몽이 되어간다. 하지만 한바탕 아수라장을 통과하고 나면 어른들도 아이들도 한뼘 자라 있다. 그 건전한 결말이 남기는 뭉근한 여운은 물론, 주드 애파토우 사단이 배출한 또 하나의 듬직한 배우 조나 힐과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에서 마약 소동극과 진솔한 드라마를 요령있게 넘나들었던 데이비드 고든 그린 감독 덕택이다.
간 큰 부모가 되고 싶다면.
<피쉬 탱크>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 / 출연 케이티 자비스, 마이클 파스빈더, 키어스턴 워레잉, 해리 트레더웨이 / 124분 / 청소년 관람불가
장편 데뷔작 <레드 로드>에 이어 차기작 <피쉬 탱크>로 연거푸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휩쓸며 영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여성감독으로 떠올랐던 안드레아 아놀드. 이제는 신예라는 표현이 무색해진 그녀의 모든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조금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이 닿은 영화에는 언제나 황홀할 만큼 감각적으로 촬영된 장면이 하나 이상 포함돼 있다. <피쉬 탱크>에서 그런 희열을 선사하는 건 사춘기 소녀 미아가 달밤에 엄마의 애인 앞에서 독무를 추는 장면이다. 소녀의 달뜬 숨결이 달빛에 차갑게 식은 공기와 마찰을 일으키는 그 순간은 전후 맥락을 솎아내고 보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두 사람이 거실 소파에서 충동적인 섹스에 빠져드는 다음 장면까지 흥분은 이어진다. 그런 장면들을 만날 수 있기에 소녀의 서투른 첫사랑을 다룬 이 통속물은 작은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영화적 몰입을 체험케 해준다. 미아와 미아 엄마의 상대역 코너를 통해 마이클 파스빈더의 과거를 엿보는 재미 또한 있다.
아직 사랑에 서투른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영화.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감독 미이케 다카시 / 출연 이치카와 에비조, 야쿠쇼 고지, 에이타 / 129분 / 청소년 관람불가
사무라이가 더이상 필요없게 된 에도시대. ‘다이묘’라 불리는 영주가 귀족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며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반면, 전쟁이 끝나자 사무라이는 힘, 영토, 직업 모두를 잃었다. 그러면서 사무라이 사이에서 ‘할복 연극’이 유행처럼 퍼져갔다. 자신의 마당에서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게 귀찮은 다이묘는 그들에게 돈이나 직업을 내주었다.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은 쓰쿠모 한시로(이치카와 에비조)라는 한 사무라이가 다이묘를 찾아가 할복을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다이묘인 사이토 가게유(야쿠쇼 고지)는 한시로에게 몇 개월 전 똑같이 할복 요청한 젊은 사무라이 모토메(에이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는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 시대에 체면을 버릴 수밖에 없는 (혹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그려낸다. 체면이라는 것이 어차피 남들이 알아줘야 존재하는 것인데, 먹고사는 게 먼저인 세상에서 체면은 더이상 삶의 중요한 가치가 아니게 된 것이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어느 선까지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체면 때문에 곤욕을 치른 남성들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