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100년(1995년) 이후 그나마 가장 뚜렷이 부상하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목하 마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2012년에도 일정한 소산을 낸 서브 장르를 꼽으라면 파운드 푸티지 영화(Found Footage Film)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참 안 어울리는 노장 마이크 니콜스가 파운드 푸티지 기법을 전면구사했다는 <더 베이>의 리뷰가 나오고 있고 인도네시아에서 찍은 <레이드>로 오랫동안 권태에 몸을 꼬던 액션영화광들의 급소를 찔러준 가레스 에반스 감독이 파운드 푸티지 옴니버스 <V/H/S>의 속편 연출자로 물망에 올랐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마이클 베이의 제목 미정 SF가 파운드 푸티지 스타일이란 소문은 좀 됐다. 말할 나위 없이 할리우드의 파운드 푸티지 유행은 투자 대비 수익의 크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 ‘파운드 푸티지’라는 항목을 하위 장르의 색인에 등재시킨 <블레어 윗치>(1999)는 6만달러로 찍어 전세계에서 2억5천만달러를 벌어들여 당시 사상 가장 수지맞은 영화로 등극했고, 이 양식의 후계자로서 이제는 연례 프랜차이즈가 된 <파라노말 액티비티> 연작의 1편(1999)이 그 기록을 깼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설명은 충분하다. 다만 파운드 푸티지 영화에는 구경하고 해석하는 자들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화장실 코미디건 슈퍼히어로 액션물이건 모든 하위 장르의 성쇠에는 동시대 문화에 이는 바람의 방향이 개입하겠으나, 파운드 푸티지 영화의 대두와 지속은, 최근 10년 사이 현대영화와 관객이 처한 미디어 환경 및 영상 독해 방식의 역전시킬 수 없는 변화와 유독 깊이 접속돼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생존자로서의 카메라
파운드 푸티지 필름(이하 FF영화)은 조금 운문적으로 말하자면 살아남은 영화, 그것을 찍은 사람을 넘어 생존한 영화다. ‘생존’이란 말이 죽음을 전제하고 있는 데에서 보듯 지금까지 이 하위 장르가 속한 주요 상위 카테고리는 호러였다. 산문적으로 정리하면 FF영화는 극 전체 혹은 큰 부분이, 제3자에 의해 어딘가에서 발견된(것으로 극중에서 전제된) 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가리킨다. 촬영의 주체는 죽었거나 실종된 상태일 때가 많다. 카메라는 한대일 수도 있지만 여러 대일 수도 있다. 서사 안에 등장하는 카메라가 한대인 경우라 해도 오늘날 도시 곳곳에 고정된 CCTV와 차량의 블랙박스, 좀더 시야가 넓은 군사목적 감시체계에 부속된 카메라가 제2, 제3의 푸티지 제공처로 기능하는 일이 다반사다. 다수의 촬영기가 동원될 경우 폐소공포가 완화되는 대신 서사의 반경이 넓어진다. 이 카메라들의 공통분모는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감독/저자의 의도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가정 아래 영화에 이미지를 공급한다는 점이다.
<블레어 윗치> 이후의 관람 경험을 통해 우리의 머릿속에는 FF영화의 일정한 상(像)이 형성돼 있다. 관객과 다를 바 없는 극중 인물이 진짜로 일어났다고 가정되는 사건을 손에 있는 캠코더나 스마트폰을 동원해 아마추어 수준의 기술로 찍는다. 이때 카메라를 든 자는 사태의 가해자일 수도 있고 피해자일 수도 있다. 혹은 스토리상의 이유로 그 자리에 불려간 전문 촬영자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며 찍는다. 장르의 조건인 도상(이를테면 저해상 화면과 상단의 타임트랙과 촬영일시 표시)과 관습(평범한 주인공에게 초현실적 사건이 닥치고 마침 주변에는 촬영기가 있다)을 거느리고 있는 셈이다. FF영화가 관객을 납득하기 위해 첫 번째 해결해야 하는 서사적 과제는 “저 난리통에 미치지 않고서야 도망치지 않고 무슨 촬영이냐?”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허들을 넘어 FF영화가 하위 장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21세기라는 특정 시대의 테크놀로지와 거기서 파생된 심성 덕택이다. 첫째, 누구나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올릴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고, 둘째, 재난과 이변 앞에서, 심지어 좀비로 추정되는 존재를 봐도 안전을 위해 경찰을 부르기 전에 유튜브나 텀블러에 찍어올리고자 하는 행동이 그리 희한해 보이지 않는 문화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싱어가 제작한 SF TV시리즈 <H+>가 착목한 대로, 현대인들은 실질적으로 24시간 온라인에 있다. 동시에 전쟁과 참사의 간접적 스펙터클에 단련된 나머지 “설마 정말 극단적 사태가 이 자리에 올까?”라는 무딘 위기의식과, 어떤 현상을 프레임 안에 가둬두는 한 안전하다는 무의식적 미신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현대 생활에 편재하는 카메라는, 누군가가 극중에서 촬영하고 있다고 해도 인물들이 경직되거나 부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는 설정을 가능하게 했다.
<크로니클>의 근사한 발명, 날아다니는 카메라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시침 뗀 자막으로 삐그덕 문을 여는 호러가 FF영화의 모태다. 어린 살인마의 시점으로 찍힌 존 카펜터 감독의 역사적인 <할로윈> 첫 시퀀스가 웅변하듯, 우리는 심지어 모든 호러영화를 파운드 푸티지 양식으로 리메이크한 판본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만들기와 관람 양식의 거시적 변화와 직결된 서브 장르인 FF영화는, 오로지 호러장르 안에서 왔다 스러진 유행들- 사다코, 캠핑간 10대 슬래셔, <쏘우>를 비롯한 휴양객 고문호러 등등- 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2012년에 이르러 호러 장르 바깥쪽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쇼크 효과는 마모됐으나 대중의 생활 감성과는 강력한 접점을 보유한 기법이 계속 서사 양식 안에서 용도를 찾기 위해 한 불가피한 진화이기도 하다. 하긴 이제 인터넷에 오른 <블레어 윗치>의 예고편을 보고 “이게 정말인가?”라고 몇달이나 술렁거렸던 1999년의 순진한 관객은 없다. 버퍼링이 걸린 저해상도 영상이 리얼리티를 보증하는 기호로 접수되지도 않는다. FF영화의 선조로 여겨지는 <카니발 홀로코스트>의 감독이 실제로 배우를 살해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캐스트를 법정에 불러모았던 심각한 일화는 우스갯소리로 전해질 뿐이다.
FF 하위 장르의 외연을 다변화하려는 시도로 우선 눈에 들어오는 2012년 영화는, 1980년대 집 보는 10대의 일탈을 그린 성장영화의 혈통을 악취미적으로 이어받은 <프로젝트 X>다. 스스로 코미디이기를 주장하지만 10대들의 난장판 파티를 바라보는 관객의 비위에 따라 충분히 괴담으로 간주될 수 있는 <프로젝트 X>는, 호러적 요소는 카메라를 든- 그리고 서사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 정체가 의심스런 소년 한 사람에게 몰아주고 철없는 소동의 채집에 집중한다. 핸드헬드 촬영의 효과 중 공포나 긴박감보다 혼돈 효과에 올인한 셈이다. 그러나 2012년을 FF영화의 짧은 역사에서 진정 기억할 만한 지점으로 만드는 영화는 역시 <크로니클>이다. 이 영화에서 파운드 푸티지는, 사건의 직접적 기록이라는 기본 속성 못지않게 병든 어머니와 난폭한 아버지, 순탄치 않은 교우관계에 포위된 내성적 소년이 심리적인 자기방어의 목적으로 찍기 시작한 영상 일기라는 의미가 더 크다. 주인공 앤드류의 카메라가 만들어낸 푸티지는 병상의 어머니와 함께한 내밀한 홈무비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의도되지 않은 채 포착된 일상적 이미지의 멜랑콜리도 포함한다. 변종 슈퍼히어로 영화로서 핵심인 초능력 발휘 현장을 찍은 푸티지마저 기존 FF영화와 달리 스펙터클에 항복하고 경악한다기보다 친구들끼리의 신나는 한때를 추억하기 위해 찍고 있다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크로니클>의 근사한 발명품은 시점숏의 참신한 연출이다. 주지하다시피 FF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시각적 징표는 1인칭 시점숏과 핸드헬드 촬영이다. 시점숏은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는 무관하게 관객을 카메라의 주인과 자동적으로 동일화하도록 몰아붙이는데, 이때 시점의 주체가 프로타고니스트라면 공감이 강화되고 안타고니스트라면 공포가 가중된다. 모두 효과가 극단적이기 때문에 지속적 1인칭 시점숏은 중간적 입장의 인물에게는 자주 적용되지 않는다. 기계장치가 관객에게 강요하는 이런 위치는 후자의 경우 무서운 대상과 원치 않은 밀착을 하는 데에서 오는 혐오감과 더불어 악당의 시점에 따라 자기와 실제로 비슷한 희생자들을 ‘사냥감’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불쾌감을 자아낸다. 한편 핸드헬드 기법의 특징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대상 외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의 컨디션을 흔들림을 통해 반영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크로니클>은 염동력이라는 플롯 포인트를 활용해 카메라를 물리적으로 주인공 소년으로부터 떨어뜨려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게 함으로써 카메라에게 섬세한 연기를 시키고 앤드류의 분신으로 활용한다. 다시 말해 <크로니클>의 푸티지는 이 소년이 혼자 있는 시간에 누군가가 이것을 볼 거라는 고려없이 자신의 모습을 찍고 싶어 하는 앵글과 거리를 엿보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FF 장르는 주류 영화로 어떻게 도입되는가
그런가 하면 스콧 데릭슨 감독의 호러 <살인소설>과 데이비드 아이어 감독의 경찰드라마 <엔드 오브 왓치>는 파운드 푸티지 양식에 전면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구조의 일환으로 기용하는 길을 보여준다. “진짜인가 허구인가”를 혼동하게 만드는 실감에 더이상 기대지 않는 두 영화는 각각 에단 호크와 제이크 질렌홀-마이클 페냐 콤비라는 스타를 캐스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연기에서 큰 추진력을 얻는다.
<살인소설>은 실제 범죄에 기초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참극이 벌어진 집으로 이사 가 가해자가 찍은 걸로 추정되는 슈퍼8 필름을 통해 진실을 추적하지만 그 과정에서 악령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이야기다. 즉, 영화 속 영상으로 말하자면 <살인소설>은 가까이는 <퍼킵시 테이프>(2007), 멀리는 마이클 파웰의 <피핑 톰>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가해자 시점 FF영화의 맥을 따른다. 동시에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살인소설>은 푸티지를 촬영한 주체나 피사체가 아니라 발견한 작가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파운드 푸티지의 센세이셔널함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다. 우리는 스너프 필름으로 추정되는 연쇄살인범의 푸티지를 보는, 에단 호크를 본다. 이는 자연히 FF 장르를 즐기는 관객 자신의 거울보기로 이어진다. 한편 영화 속 슈퍼8 홈무비의 거친 영상과 대비되는 안정적 스타일로 찍힌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는 인물의 분열이 깊어가면서 양식적으로도 파운드 푸티지의 그것에 감염되는 과정을 넌지시 보여준다. 한편 <엔드 오브 왓치>에서 극중 인물의 몸에 부착된 카메라와 순찰자의 경계 카메라 등으로 채집된 푸티지는 액션의 긴박감을 높이는 목적보다 캐릭터 스터디의 자원으로 쓰인다. 카메라를 달고 있는 경찰들의 하루가 어떤 톤과 리듬으로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것이 주된 기능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제이크 질렌홀과 마이클 페냐에게 카메라를 들려준 감독은 “실제 경찰은 자기방어 목적으로 카메라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1인칭 시점을 보는 일이 없어서” 파운드 푸티지 기법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살인소설>과 <엔드 오브 왓치>는 이들을 여전히 FF영화라고 명명할 수 있느냐는 중대한 의문을 남기지만, 앞으로 파운드 푸티지가 주류영화에서 도입되는 유형을 예고하는 사례로 보인다.
좀 동떨어져 보이지만 올해 개봉작 가운데 파운드 푸티지가 텍스트에 초래한 가장 흥미로운 트위스트의 예는 뱅크시의 다큐멘터리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에서 발견된다. 강박적으로 일상 풍경을 찍어대는 아마추어 다큐멘터리스트 티에리 게타가 연출한 비디오 다이어리로서 출발한 영화는, 게타가 스트리트 아트에 관심을 쏟고 우여곡절 끝에 유명 아티스트 뱅크시가 게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카메라가 돌려 세워진다. 뱅크시가 게타의 푸티지를 편집해 원래 촬영자의 의도와 별개로 현대 미술계의 풍토를 관찰한 다큐멘터리를 조합해낸 것이다.
FF 영화가 속삭이는 그 밖의 것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화산업의 트렌드로 대두된 3D영화와 나란히 파운드 푸티지 장르는 연민이나 상상, 추론이 아니라 영화적 장치를 통해 강제에 가까운 동일시로 관객의 몰입을 끌어내는 ‘촉각’의 영화라 할 수 있다. 다만 적어도 지금까지 3D와 FF영화 사이에는 요구되는 스크린의 종류가 다르다는 차이가 있었다. 실화를 참칭하는 호러에 뿌리를 둔 FF영화는 아마 작은 스크린으로 관람할 때 더 큰 극적 효과를 내는 최초의 장르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쯤되면 휴대폰카메라로 3D 촬영이 가능해져서, 3D 파운드 푸티지 영화를 극장에서 안경을 끼고 봐야 하는 날이야말로 평론가들의 머릿속 회로가 합선을 일으키는 날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든다.
애초 예상했던 수명을 넘어서고 있는 파운드 푸티지 기법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마지막 단상은, 이 영화들이 전통적인 작가/감독에 대한 권태와 불신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 FF영화는 일관된 스토리텔링을 의도하는 감독의 존재를 일부러 지워버린 장르다. 극중 촬영자도 감독이라기보다는 렌즈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연히 ‘발견’되거나 습득한 매우 사적인 진술만 신뢰하게 된 것은 아닐까? 파편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파편만이 신용을 얻는 시대가 와버린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