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선택입니다.” 추석 합본호 표지라는 얘기에 장동건의 대답이 이러했다. 어쩌면 탁월한 선택이란 답은 우리가 장동건에게 건네야 할 말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남자의 표본에 가까운 이 배우는 고집스럽게 고난의 행군을 자처해왔다. 그는 “드라마틱한 운명에 처한 주인공”들의 삶을 연기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피로감도 쌓였다. <마이웨이>라는 험준한 산을 넘자 섬세한 작업에 대한 갈증도 일었다. 허진호 감독과 손을 잡은 건 그래서다. <위험한 관계>에서 장동건은 1930년대 상하이 최고의 플레이보이 셰이판을 연기한다. 셰이판은 콧대 높은 모지에위(장백지)와의 하룻밤을 걸고, 조신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를 유혹한다. 그리고, 여심을 훔치는 데 도가 튼 셰이판의 삶은 2012년 서울에 사는 40대 ‘신사’의 삶으로 다시 이어진다. 12년 만에 드라마 나들이를 한 장동건은 <신사의 품격>으로 당대의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재미를 맛보았다.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위험한 관계>와 <신사의 품격>을 찍고 난 뒤 내적으로 변화가 생긴 것 같다”는 장동건과 마주 앉았다. 그의 여유로움이 가을바람을 타고 솔솔 전해졌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 끝나고 원하는 만큼 쉬셨나요. =제대로 못 쉬었어요. 끝나자마자 광고 밀린 거 찍고 영화 홍보 때문에 토론토영화제에 갔다오고.
-장동건씨를 보려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토론토영화제에 몰렸다고 하던데요. =인터뷰하러 가는 장소에 외국 남성들이 많이 모여 있더라고요. 제 이름을 또 막 불러요. ‘저 사람들이 날 어떻게 알지?’ 싶어서 봤더니 <워리어스 웨이> 사진을 들고 사인해달라는 거예요. (웃음) 왜, 닌자영화 좋아하는 마니아분들 계시잖아요. 이연걸이랑 장동건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나, 내기하는 사람들. 그런 분들이 오셨더라고요.
-<위험한 관계>의 촬영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지난해 9월 말에 중국에 가서 올해 1월 중순까지, 4개월 정도 찍었어요.
-외국에서 오래 머물며 촬영하면 작품에 몰입하기는 수월할 것 같은데요. =그렇죠. 인간 장동건으로 돌아오는 게 차단되니까. 특히 <위험한 관계>의 경우는 서울에서 촬영장 왔다갔다하며 찍었으면 캐릭터로 계속 남아 있기 어려웠을 거예요. 집에 가면 아이도 있는데, 촬영장 가면 바람둥이 역할을 해야 하고.
-연기 파트너가 중국 여배우들이라 상대적으로 허진호 감독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겠어요. =그 어떤 영화를 찍을 때보다도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한 장면 한 장면 전부 상의하며 찍었으니까. 미련이 안 남을 정도로.
-<마이웨이>가 고된 작업이었기 때문에 다음 선택지로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조금 편한 작품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결코 만만치 않은 작품을 택했습니다. =블록버스터는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을 겨냥하기 때문에 연기도 보편적인 길을 따라갈 때가 많아요. 그래서 다른 종류의 연기를 하고 싶다는 갈증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죠. <위험한 관계>를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허진호 감독님 때문이에요. 디테일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장동건이란 배우가 조금 더 일찍 허진호의 멜로 세계에 발을 들였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허진호 감독님과는 적시적소에 만났다고 생각해요. <신사의 품격>을 할 때도 왜 좀더 젊었을 때 로맨틱코미디를 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 미련도 없진 않지만 예전이었다면 지금처럼 내려놓고 연기할 수 없었을 거 같아요.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건가요. =젊었을 때는 저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하고 보여주기 싫은 모습은 감추려 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엷어진 거 같아요. <신사의 품격>과 <위험한 관계>를 찍으면서 많이 편해진 느낌이에요.
-중국어 연습은 얼마나 했나요. =<무극>이란 영화를 찍은 경험이 있어서 중국어는 그렇게 낯설지 않았어요. 이번에 스스로한테 조금 놀란 건, 중국어 대사가 당일 아침 현장에서 바뀌는 경우가 태반이었거든요. 허진호 감독님도 “한국어로 연기해도 괜찮다, 나중에 더빙하자”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동안 중국어를 한 게 있으니까 또 한국어로 연기하기는 싫고. 결국 두 신 정도는 한국어로 연기하고 더빙했는데, 그래도 어찌됐든 촬영 전까지 대사를 거의 다 외웠어요. 중국 분들도 70% 정도는 더빙 없이 써도 될 정도로 잘했다고 얘기해주셨고요.
-원작이 있고 리메이크도 많이 된 작품이에요. 비교의 대상이 있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겠어요. =유명한 전작들이 많죠. 존 말코비치가 나온 <위험한 관계>도 있고 <발몽>도 있고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도 있고. 우리나라만 해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있고. 촬영이 진행되고 어느 정도 캐릭터가 잡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영화들을 봤어요. 중국에서 인터뷰하다 알게 된 건데, <위험한 관계>의 이 캐릭터를 장국영씨가 그렇게 하고 싶어 했대요. 그때부터 이상한 부담감 같은 게 막 생기더라고요. (웃음) 개인적으로는 이번 영화에서 허진호 감독님의 연출이 인상적인 것 같아요. 감독님이랑 사석에서 “이제 우리도 대표작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 <친구>와 <태극기 휘날리며>,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그게 대체 언제 적이냐” 그런 얘기 많이 했어요. (웃음)
-인물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표현하는 게 중요한 과제였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웠어요. 자꾸 젊었을 때는, 이라고 얘기하게 되는데(웃음) 그때는 큰 감정, 그로테스크한 감정을 연기하면서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거 같아요. 지금은 똑같은 감정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 디테일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도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어요.
-모든 여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셰이판의 겉모습은 어떻게 그리셨나요. 별로 준비할 게 없었을 거 같기도 하고.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니까 그 시대의 룰을 따랐어요. 상류사회의 이야기라 외적으로 꾸밀 수 있는 부분도 많았고. 캐릭터에 유머러스한 느낌을 불어넣으려고 콧수염을 길렀고요.
-그간 해온 작품을 보면 매번 무언가를 크게 배우려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번 영화를 통해 얻은 게 있다면요. =그동안은 내가 맡은 역할, 내 연기만 생각했는데 이번엔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고 고민하게 됐어요. 감독님 어깨너머로 연출에 대한 것도 들여다봤고.
-전에는 연출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나요. =없었어요. 그럴 겨를도 없는 현장들이었고요.
-여자의 마음에 수시로 불을 지른다는 점에선 <위험한 관계>와 <신사의 품격>의 캐릭터가 통하는 데가 있어요. =촬영은 <위험한 관계>를 먼저 했는데 보여진 건 <신사의 품격>이 먼저라 아쉬움이 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대중이 <위험한 관계> 속 제 모습을 훨씬 신선하게 보실 텐데.
-12년 동안 TV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일상을 연기하는 데 특별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거 같아요.
-김은숙 작가의 대사는 말의 맛을 살리기가 결코 쉽지 않은 글입니다. =고생 많이 했어요. 보통은 배우에게 편한 대사로 바꿔 연기하기도 하는데, 김은숙 작가님은 처음부터 자기 대사를 한 글자도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셨어요. <신사의 품격> 녹음기사님이 김은숙 작가님과 드라마를 쭉 같이 해온 분인데, 모든 배우들이 처음엔 다 헤맨다고 하더라고요. 대사에 적응을 하고 나니까 캐릭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편리함은 있었어요.
-40대가 되어서 40대의 로맨스를 연기한 느낌은 어땠나요.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 있는 40대의 로맨스는 뭔가 중후하고, 제목처럼 좀더 품격있고 그럴 것 같잖아요. 그런데 40대가 돼도 남자들은 똑같거든요. 40대를 철없이 그렸다는 게 이 드라마의 매력이에요. 처음엔 40대의 로맨스가 어떻게 비칠까 싶었는데, 한편으로는 이건 지금까지 없던 로맨틱코미디다 싶기도 했고. 배우들끼리도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자 의기투합했는데, 결과가 만족스러워 다행이었어요.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고, 자연인으로서 겪은 변화가 연기를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얘기한 적 있습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예전에는 없던 기준이 생겼어요. 내 아이가 커서 아빠가 출연한 영화를 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의도적으로라도 아이를 위한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조니 뎁이 그랬잖아요.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고. 그 마음이 이해가 돼요.
-고소영씨가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것도 화제였습니다. =저희 둘 모두 <힐링캠프…>를 즐겨보는 시청자였어요. 좋은 프로그램이란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고소영씨가 섭외를 받았어요. 처음엔 걱정도 많이 했어요. 워낙 (고소영씨가) 말이나 표현이 직설적이라. (웃음) 그런데 저만의 기우였더라고요.
-예능프로그램 출연 제의를 많이 받나요. =자신이 없어요.
-웃길 자신이 없다는 건가요. =웃길 자신도 별로 없고, 제 얘기를 하는 게 아직도 어색해요.
-1990년대 초•중반에 이영자씨가 진행하던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그게 어떤 트라우마 같기도 하고. (웃음) 그땐 신인이었고 방송사에 계약이 돼 있어서 섭외가 오면 무조건 나가야 했어요. 데뷔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94년 1월에는 이틀을 빼고 매일 TV에 나왔어요. <우정의 무대> 빼고 다 출연한 거 같아요.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내성적일 때였는데.
-완벽주의 기질 때문에 방송을 하지 않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그렇지 않아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달라요. 무척 게을러요.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그제야 허둥지둥 하는 편이고. 미리 계획 세워서 꾸준히 노력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배우로서 완벽해지고픈 욕심이 있나요. =그런 마음은 항상 있죠. 전 배우로서 자신감이 넘쳤던 적이 한번도 없어요. 제 출연작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순간에도 저는 움츠러들어 있었던 거 같아요. <친구> 때도 그랬고 <태극기 휘날리며> 때도 그랬고. 저에게 칭찬이 와도 그걸 즐기지 못했어요. 지금은 제가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성공이 있다면 그 성공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 같아요.
-요즘에 배우로서 꾸는 꿈은 뭔가요. =영화로 흥행도 해봤고, 흥행으로 기록도 세워봤고. 그런 것들이 굉장히 큰 영광이긴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서 남는 건 캐릭터 같아요. 다수의 관객에게 저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있지만, 덜 보편적이더라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신비주의랄까? 좀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는데 <신사의 품격> 이후 한결 가까워진 느낌입니다._딸짱(미투데이) =저도 제가 그렇게 무거운 이미지인 줄 몰랐어요. 비극의 주인공을 많이 연기하다보니 그런 것 같은데, 스스로도 그런 이미지에 싫증이 났을 때 <신사의 품격>을 만나게 됐습니다. 작정하고 저를 내려놓은 작품이라, 드라마 끝나고 대중과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 저도 들어요. 예전에는 선뜻 다가오지 못하던 분들이 이제는 쉽게 다가와 사인 요청도 하시고요.
-캐릭터를 만들어갈 때 자신의 경험, 상상, 본능 중 어느 것을 가장 중시하시나요._이준식(페이스북) =세 가지 다 동원을 하고, 세 가지 다 중요하게 생각해요. 일단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게 가장 믿음이 갈 때가 많죠.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동원하고. <위험한 관계>는 경험은 아니고요. (웃음) 처음 캐릭터에 접근할 땐 ‘나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