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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는 고요한 단언
신형철 2012-09-19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이 상처와 성장에 대해 물은 것과 답한 것

나쁜 이야기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인간을 기능적으로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성실한 주인공이 있으면 어수룩한 동료가 있고 우유부단한 배신자가 있으며 비정한 악당이 있다. 몇 가지 전형적인 성격의 구현체인 인물들이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호출되고 소비되고 버려진다. 이런 식이라면 제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우리는 거기서 오직 한 사람의 인물만을 만날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혹은 생각해봤더라도 절망에 빠져서 좌절해본 적이 없는 한 창작자 말이다. 좋은 이야기들에는 인간에 대한 겸허함이 있어서 이런 말들이 들린다.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내 이야기가 어떻게 나를 속였는지 나에게 말해달라. 그리고 그런 내가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나는 몹시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김희정 감독의 전작 <열세살, 수아>(2007)를 나는 올해 초에 봤는데, 뒤늦게나마 그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인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이하 <청포도 사탕>, 2012)을 보기 위해 개봉 전에 영화제를 찾아가게 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열세살, 수아>는 아버지를 여읜 소녀가 자신의 진짜 엄마는 다른 사람이라고 믿으며 그녀를 찾아 떠났다가 귀가하는 이야기였다. 보다시피 프로이트의 ‘가족로망스’(Familienroman) 개념―자신의 친부모는 내 곁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니라 고귀한 사람들이라고 상상하며 자신의 혈통을 변경하기 위해 상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 과 공명하는 서사인데, 그 소녀가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성장의 한 고비를 넘기는 데 성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 소녀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말았다. 대형 화면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세살 소녀의 내면도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충분히 복잡하기 때문에 섬세하게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그 겸허한 시선은 쉽게 잊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청포도 사탕>이 전작과 닮아 있기를, 그러나 전혀 다른 영화이기도 하기를 바라는 이상한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2011년

결혼을 앞두고 있는 선주(박진희)와 지훈(최원영)은 이미 집을 마련해서 함께 살고 있다. 출근하는 차 안에서, 선주가 갑자기 지훈의 손을 잡고, 그들의 온전한 첫 대화가 시작된다. “앗, 차가워” (지훈), “아, 따뜻해”(선주) 같은 대상 혹은 사건을 서로 달리 느끼고 받아들일 때 흔히 ‘온도차’라는 말을 쓴다. 그 말 그대로, 두 사람이 결혼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에는 미묘한 온도차가 있다. 결혼 준비가 지나치게 급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지훈의 우려에 선주는 단호하게 반박한다. “난 괜찮아, 하루라도 빨리 해야지. (…) 벌써 30대야, 우리. 언제까지 애가 아니라고. 애도 가져야 하고.” 상식적인 대답처럼 보이지만 이 대사에서부터 이미 선주의 생각의 패턴 혹은 삶의 방식 같은 것이 감지될 수도 있다. 남들이 가는 길을 제때 번듯하게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렇다고 지훈에게 예민한 자의식이 있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가 느끼는 것은 결혼을 앞둔 남자들이 한번쯤 느낄 만한 가벼운 망설임 정도다. 두 사람의 내밀한 차이는 아직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닌 채로 잠재돼 있다. 그러나 모든 파국의 출발은 본래 고요하지 않던가.

선주가 안정과 평화를 유독 강하게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녀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 이유를 선주 자신은 모르는데 그것을 찾아 과거로 떠나는 것이 이 영화의 뼈대다. 초반부에 선주의 직장 동료인 은지가 선주에게 해주는 이야기에서 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가 무심히 소개된다. 특이한 기억상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은지에게는 영지라는 친구가 있는데 호주에 워킹비자를 받아 들어갔다가 거기서 남자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1년도 안돼서 이혼했다는 것.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가, 이혼 직후 1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블랙아웃 상태에 빠져버렸다는 것. 심지어 이혼을 했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 이 얘기를 전하는 은지는 그 현상을 “영화 같은 데에서 화면이 까매지는 것”에 비유하고, 이 얘길 전해 듣는 선주는 “그런 일도 있구나. 왠지 소설 같다”라고 응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선주 자신이 그와 같은 특이한 기억상실 상태에 놓여 있다. 선주의 경우는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라고 다른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 ‘덮개기억’(Deckerinnerung)이라는 것이 있다. Decke(덮개)와 Erinnerung(기억)의 합성어로 ‘어떤 중요한 기억을 덮기 위한 사소한 기억’을 뜻한다(영어판 전집에서는 이를 ‘스크린 메모리’(screen memory)라 옮겼고, 한국어판 전집(vol.5)에서는 ‘은폐기억’이라 옮겼다. ‘덮개기억’이라는 번역어는 라플랑슈•퐁탈리스의 <정신분석사전>(열린책들 펴냄)의 옮긴이인 임진수의 것이다).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을 유독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어떤 기억을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 이 발견의 메시지는 “우리의 기억 작용이 예기치 못한 목적성을 갖는다”(전집 vol.5, 4장)는 것이다. 얼마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잊고 싶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잊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 미처 정산이 끝나지 않은 채로 버려진 진실이라면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되돌아와서 계산을 끝내려 든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른바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갑자기 나타난 소라(박지윤)는 바로 과거로부터 날아온 진실의 전령사여서 그녀 때문에 선주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선주가 소라의 책을 넘기다 손을 베는 것이 출발점이다. 서점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서 소라의 얼굴을 처음 본 이후 선주는 울면서 학교를 뛰쳐나오는 옛날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브람스의 레퀴엠에 대한 설명이다. 과거에 어떤 죽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선주를 울게 했다는 것, 울면서도 도망쳐 나와야 할 어떤 일이었다는 것. 이렇게 진실이 점점 다가오자 선주에게서 한쪽 귀에 이명이 들리는 육체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리고 약혼자 지훈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마침내 선주와 소라는 대면하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라는 묻는다. “그래서, 행복해?” 이 질문에는 이상한 것이 없지만 이에 대한 선주의 대답은 꽤 이상하게 들린다. “행복? 우리는 그냥 자연스러운 건데.” 이 장면에서 선주는 마치 “행복하니?”라는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지를 물어본 적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행복하니?”라는 질문의 다음 단계는 “기억하니?”다. 소라는 자신의 책을 직접 선주에게 건네주면서 속지에 이렇게 적는다. “1994년 가을, 소녀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라의 입을 빌려 진실이 묻기 시작한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어떤 진실을 은폐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행복이 아닌가? 그래서 얻은 행복이라면 그것은 가짜가 아닌가? 진짜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의 대면 이후에나 겨우 가능한 것이 아닌가? 선주는 소라의 등장과 함께 1994년의 어느 날로 되돌아가기를 강요받지만, 그녀는 그 시절의 어떤 진실과 대면하는 일이 자신의 안정된 삶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1994년의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그녀의 두려움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친구 소라가 약혼자 지훈을 유혹하고 있으며 지훈 역시 흔들리고 있다는 의심. 마침내 선주는소라와 함께 부산으로 떠난다. 소라와 지훈의 진실을 알고 싶어서 떠난 것이겠지만 실상 선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진실이다. 그녀는 부산이 아니라 1994년의 가을로 가고 있다.

1994년

이 영화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면 바로 이 부산행이 분기점이 될 것이다. 언뜻 의아해 보이기도 한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는 것인가. 의심이 문제였다면 원래 소라를 부산까지 데려가기로 한 지훈을 못 가게 하는 것으로 족하지 왜 선주 자신이 직접 차를 몰기까지 해야 하나. 선주가 운전대를 잡는다는 사실에는 생각보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자기 자신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은 그럴 용기를 가진 주체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에서 로드킬로 죽어 있는 짐승을 보고 소라는 충격을 받지만 선주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라며 무심히 넘긴다. 선주가 가져야 할 용기란 단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필요한 용기, 죽어 있는 짐승을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아닐 것이다. 직접 동물을 치고서도 그 상황을 직시하고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용기 정도는 돼야 한다(이후 선주는 실제로 유사한 교통사고를 겪는다). 선주의 용기가 온전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세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차례로 소라를, 여은의 언니인 정은(김정난)을, 그리고 죽은 여은을 넘어가야 한다.

1단계는 부산에 도착한 직후 바닷가 장면에서 펼쳐진다. 거기서 소라는 처음으로 과거의 그 일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선주를 다그친다. “그날 말이야, 우리 중학교 때 그 사고 있었던 날, 왜 수돗가에 안 나왔어?” 물론 선주는 소라의 질문을 피하고 말지만 그 덕분에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1994년의 이어달리기 장면을 떠올리는 데 성공한다. 2단계는 죽은 여은의 언니 정은을 만나는 대목이다. 이 단계에서 정은을 만나 선주가 얻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정은을 만나는 것 자체가 선주에게는 혼란스러운 일이어서 선주는 길을 잃고 만다. 3단계에 해당되는 것은 선주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드는 사슴의 환영을 보고 나무에 차를 들이받는 장면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사슴은 죽은 여은의 환영이다. 진실과의 대면이라는 일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일 것이다. 진실과의 대면은 늘 그렇게 ‘충돌’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선주의 이마가 찢어지는 것은 결국 종이에 손이 베이면서 시작된 흐름의 마지막 귀결이다. 선주는 이렇게 소라, 정은, 여은을 차례로 만났다.

이제 남은 것은 선주의 기억이 완전히 회복되는 일일 것이고 서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것은 이 과거로의 여행이 오로지 선주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꿈속에서 여은의 슬픈 눈을 본 이후로 소라 역시 여은과 관련된 정산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교통사고 이후로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소라가 선주의 부상 때문에 스스로 운전대를 잡게 되는 것은 그래서 사소한 일이 아니다. 소라 역시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편 죽은 여은의 언니인 정은에게도 동생의 옛 친구인 두 사람의 예기치 않은 방문은 그녀 스스로 잊고 있었다고 말한 과거의 그 상처와 다시 대면하는 일이 된다. 그녀에게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엄마 때문에 힘들었을 여은을 언니로서 감싸안아주지 못했던 것이 상처로 남아 있던 터였다. 세 사람 모두에게는 여은을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고 당시에 미처 못다 한 각자의 애도를 완수해야만 했다. 그 완수의 순간에 사슴 한 마리가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인위적일 수 있을) 장면은 서사의 논리로서는 필연적인 마무리인 셈이다.

이제 2011년의 서울로 다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선주가 경험한 일이야말로 ‘사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서사는 사건을 다룬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영화들이 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겪은 주인공이 그 일이 있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만 그 일은 사건이다. 어딘가에 쓴 문장을 변용해서 말하자면, 사건은,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그러므로 사건 이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덕분에 새로운 존재가 된 선주가 지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돌발적이되 논리적이다. “우리 헤어져. 생각해보니까, 아주 잘 생각해보니까, 난 널 사랑했던 게 아니야. 그냥 세상에 혼자 남겨지기 싫었던 거야. 단지 그뿐이야.” 결국 이 영화는 결혼을 한달 앞둔 선주가, 갑자기 나타난 소라와 더불어 자신이 은폐했던 한때의 기억과 다시 조우하고, 마침내 파혼을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결혼과 파혼 사이에서 선주가 겪은 일을 ‘성장’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신이다. 케냐의 세렝게티 동물원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화면이 보인다. 그것을 보며 선주는 미소를 짓고 있다. 왜일까. 선주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소라가 외국에서 혼자 살아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경탄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게,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난 외국에서 생활하는 거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더군다나 혼자서는.” 그때 소라는 말한다. “아마존 정글이나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는 거 아니고서는 도시에서 사는 건 다 비슷한 거 같아.” 그리고 초원을 그리워하며 힘들어하던 케냐 친구가 있었다고, 자연 없이 사는 게 형벌인 이들도 있더라고 덧붙인다. 아마도 지금 TV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선주는 소라가 얘기해준 그 케냐 출신 룸메이트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관행적인 삶의 행로에 의심없이 몸을 싣던 자기 자신과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선주 또한 케냐의 초원으로 훌쩍 떠날 수도 있으리라. 그런 그녀를 격려하듯이 함께 밥을 먹던 친구 은지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이 도달하기를 꿈꾸는 것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나’ 혹은 ‘진정한 나’일 것이다.

윤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단지 두편의 영화만을 내놓았을 뿐이지만 김희정 감독은 자신만의 고유한 물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 같다. <열세살, 수아>와 <청포도 사탕>의 구조는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한 여성이 가족 혹은 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자신의 삶 속으로 통합해내면서 성장해 나가는가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지켜보는 서사다. 그리고 그 통합과 성장의 과정에서는 ‘진실과의 대면’이라는 단계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고요하게 단언하는 서사다. 그러나 <청포도 사탕>의 세계는 전작보다 서사적으로는 보다 심화된 세계라고 해야 한다. 두 가지 항목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전작에는 없었던 주체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도입됐다. 수아가 아빠를 여읜 것은 그녀의 책임이 아니었지만 선주가 친구를 잃는 과정에는 그녀 자신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전작의 서사가 가족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반면에 이번 영화는 성수대교 붕괴라는 한국사회의 집단적 상처를 서사의 주요한 계기로 들여놓는다. 말하자면 ‘윤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가세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사의 두께가 더 두꺼워지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로 요약될 이 영화의 플롯은 고전적인 것인데, 이런 플롯을 채택한 서사에서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과정의 치밀함이 서사적 설득력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정보의 배분은 매우 중요하다. 관객이 너무 조금 알아도 곤란하고 너무 많이 알아도 곤란하다. 이 영화에서는 주요 정보들이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한꺼번에 전달된 것은 아닐까. 주어진 정보가 부족한 탓에 배우들의 연기가 정서적 강도를 높일수록 관객은 이를 따라잡을 수 없어 오히려 뒤로 물러나버리는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선주의 정서적 불안정은 가끔 과장돼 보였고, 소라의 집요한 의지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의아할 때가 있었으며, 서사의 절정인 정은의 오열도 관객이 동참하기에는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비록 이 영화에 어떤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영화가 ‘영화로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태도’에는 기꺼이 지지를 보내려고 한다. 나는 그런 한국영화가 매우 드물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내가 영화에 기대하는 것이 많아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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