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나오긴 하는 걸까. 카메라가 도깨비방망이도 아니고. 2010년 겨울,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들은 양은용(<내부순환선> <경>), 서영주(<은하해방전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김꽃비(<똥파리> <창피해>), 이 세 여배우에게 카메라를 맡기면서 적잖이 불안했을 것이다. “정말 우리 마음대로 찍어도 돼요?”라는 배우들의 되물음은 무모한 도전에 내몰린 배우들의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나 나 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 카메라 작동법도 모르던 세 배우가 1년 만에 셀프 다큐멘터리를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던 데는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이 작동해서였을 것이다. 8월23일 극장 개봉을 앞두고 만난 세 배우, 아니 세 감독은 카메라 공포증에 대한 토로는 물론이고 시어머니 격인 부지영 총감독의 끊임없는 감시에 대한 불만까지, 쉬지 않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놨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를 시작으로 해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상영됐다. 관객 반응은 어땠나. =김꽃비_일단 영주 언니 팬이 많이 생겼다. 가장 매력적으로 나왔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고. 서영주_꽃비 팬들이 영화 보러 왔다가 나란 존재를 알게 된 거지. 김꽃비_왜 그렇게 순화해서 표현해? 정확히 말하면, 김꽃비 보러 왔다가 서영주 팬이 돼서 돌아가는 거지. 서영주_인터넷에 서영주 자의식 쩐다는 험담도 있던데. 내 친구는 나 보러 오라고 했더니만 은용 언니 연애담에만 관심을 보이고. 양은용_그래서 이 영화 보는 게 힘들다니까. 나야 일이 있어서 GV도 많이 못 갔지만. 김꽃비_극영화가 아니다보니 관객 반응들이 아무래도 캐릭터에 대한 품평으로 쏠리는 것 같다.
-기획 단계에서 여배우들 섭외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 =양은용_조영각 PD님이 밀어붙였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술자리에서 장난처럼 이야기한 건데. 막상 결정됐다고 하니까 걱정이 밀려들었다. 일상을 찍는다고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나를 얼마만큼 드러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 이게 그놈의 카메라 갖겠다는 욕심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지. 김꽃비_기획 단계에선 셀프 다큐멘터리라고 정해져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주고 뭐든 찍어오는 것을 보고 싶다는 거였고. 연출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없진 않아서 그럼 가볍게 한번 해보자 했다. 서영주_내가 많이 나오는 것보다는 내 시선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 땐 경이롭고, 어떨 땐 웃기고. 매번 그렇게 다르니까.
-장건재 감독에게 카메라 작동법을 배웠다. 처음엔 카메라가 손에 익지 않아서 고생하지 않았나. =김꽃비_자동으로 모드를 맞춰놓고 찍었으니까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얼굴에 철판을 잘 까는 편이라 카메라 들고 다니는 것도 어색하진 않았고. 그래도 집 바깥에서 내가 나를 찍을 때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더라. “쟨 뭐하는 거니?” 하는 시선들 있잖아. 양은용_난 카메라를 잃어버릴까봐 정말 불안했다니까.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편이다. 촬영이 끝나기 전에 카메라를 잃어버리면 내 돈으로 다시 사야 하나. 100만원이 넘는데 어떻게 하지. 서영주_하긴 은용이 언니는 카메라 라인 하나 연결할 때도 부들부들 떨었으니까. 난 뭘 찍어야 할지 몰라서 여행을 가서도 한달 동안 사물함에 넣어놓고 꺼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부지영 감독님한테 한소리 들었다. 막 찍으라고. 양은용_카메라는 영주 것이 가장 좋다. 가방도 제일 크고, 배터리도 가장 오래 가고.
-뭘 찍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을 텐데. 촬영하면서 상대는 뭘 찍고 있나 염탐도 가끔 했을 테고. =김꽃비_셀프 다큐멘터리쪽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외려 잘됐다 싶었다. 카메라 받고 며칠 뒤에 곧바로 해외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영주_꽃비는 주저함이 없었고, 은용 언니는 고민을 많이 했고. 난 고민을 하다가 잘 안돼서 막 찍었고. 양은용_나야 다른 걸 찍으려야 찍을 수 없었지. 사랑 때문에 다른 건 다 마비 상태였으니까. 서영주_나도 연애를 했으면 카메라 앵글이 달라졌을 텐데. 수많은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장면도 좀 찍어보고. 양은용_난 꽃비가 찍은 걸 조금 본 적이 있는데 기가 죽었다. 글로벌하잖아. 파리 뒷골목에 사람들이 달려가듯 스쳐가고, 모자 쓴 꽃비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게다가 영주도 필리핀 가서 원피스 입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그런데 나만 혼자 방구석에서 저러고 있으니까.
-스스로 ‘나쁜 남자’라고 말하는 배우는 정말 웃기던데. =서영주_완전 최고다. 양은용_같이 공연하는 후배다. 누구는 찍지 말라고 하는데, ‘재밌겠네’ 하면서 더 찍으라고 하는 친구였다. 카메라를 꺼놓고 있으면, “아, 누나∼ 카메라 좀 켜줘” 그랬다 니까. 근데 카메라를 3, 4시간씩 켜둘 순 없잖아. 그래서 껐다 켰다 했는데, 막상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카메라를 켜면 상대가 말을 잘 못하는 거다. 김꽃비_나도 촬영의 시작과 끝이 따로 없다는 게 어려웠다. 서영주_난 카페에서 사람들한테 지금 한 행동들을 다시 재연해보자고 한 적이 있다. 왜 바둑 복기하는 것처럼. 근데 다들 자신이 뭐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못하더라.
-촬영 분량 모두를 부지영 감독에게 넘겨줬나. 차마 이것만은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빼돌린 영상들이 있을 것 같다. 부지영 감독과 친하기 때문에 더 보여주기 싫은 장면도 있었을 테고. 금방 눈치챌 수 있으니까. =김꽃비_다들 있을걸. 서영주_난 다 줬는데. 장건재 감독님이, 찍은 건 절대로 지우지 말고 나중에 회의를 통해서 삭제하라고 했다. 나야 그 말을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보면 난 융통성이 좀 없다. 그래도 뭐, 이상한 걸 찍은 건 아니니까. 양은용_누드 찍었잖아. 나도 그 장면 정말 보고 싶다. 서영주_원시인 누드 컨셉으로 찍었다. 온몸이 새까매서 거의 타잔 수준이다. 여행 갔을 때 방갈로에서 찍었는데 지우기가 너무 아쉬웠다. 나중에 들고 가서 그런 장면이 있다고 했더니, 조영각 PD님은 손을 떨면서 “전 나가 있을게요” 그러더라. PD님한테는 보여준다고 말도 안 했는데. 근데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더 있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 장면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편집 조감독님이 다 지웠는데 1초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하더라. 데이터 관리했던 남자 스탭분은 봤을지도 모른다. 꽃비는? 김꽃비_난 말 안 할래. 서영주_뭔가 있구나. 연애사 아니야? 김꽃비_추측은 사절! 서영주_둘은 그래도 뭔가 있잖아. 난 연애에 관한 게 없으니까 그게 되게 부럽던데. 나도 여행 중에 스쳐지나간 남자가 있었는데 부 감독님이 안 썼더라. 양은용_애정행각이 없어서 뺀 건가. 서영주_애정행각할 땐 애정행각에 충실해야지. 그걸 어떻게 찍고 있어? 양은용_처음엔 나도 사적인 대화는 다 지워버렸다. 친구를 만났는데 뜬금없이 사랑고백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어느날 조 PD님하고 부 감독님이 날 앉혀놓고 그랬다. “우리 이러면 영화 못 만든다”고. 김꽃비_은용 언니가 진짜 용기있는 거지.
-셋이서 MT 간 장면은 개봉 버전에선 빠졌다. 술 마시고 대판 싸웠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었는데. =김꽃비_술 마시면서 가족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양은용_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카메라 다섯대가 한꺼번에 돌았다니까. 서영주_잠도 못 자게 하고. 술은 왜 이리 먹이는지. 피곤해 죽겠는데. 김꽃비_뭘 먹여? 솔직히 말해서 술은 우리가 마셨지. 서영주_자고 있는데 깨워서 먹였잖아. 김꽃비_그건 내가 깨운 거고. 서영주_너였어? 흐흐. 아무래도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들을 꺼내다보니 다들 예민해졌다. 그러고보면 참 극적이었다. 누구는 술 마시다 뛰쳐나가고, 누구는 서울 간다고 하고. 김꽃비_그러다 셋이 부둥켜안고 울고. 양은용_울고 불고 난리였지. 카메라도 다 스톱시키고. 근데 우리 셋이서 손잡고 울 때 말이야. 고개를 잠깐 돌렸는데, 빨간 불 하나가 보이는 거다. 구석에 누군가가 쪼그려 앉아서 촬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부지영 감독님이었다. 투철한 직업의식. 서영주_나중에 한 말이 더 웃기지. 그렇게 찍어놓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나왔다고 하고.
-과거에 붙들려 있는 양은용, 현재를 만끽하는 김꽃비, 미래를 떠올리는 서영주. 세 사람의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나눈 것처럼 보이더라. 촬영 때부터 의도한 건가. 편집할 때 그렇게 정리된 건가. =양은용_그러고보니 그럴듯한데. 서영주_내가 공상만 한 건 아닌데. 항상 부지영 감독님이 넌 시(詩)라면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는 건 재미없다고 하셨다.
-서영주가 시라면, 김꽃비는 만화고, 양은용은 수기? =양은용_사람들이 난 만날 술만 먹는 줄 안다니까. 일주일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하는데. 서영주_언니가 매일 집에서 소주 마시는 걸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나는 공상에 빠져 사는 애로 알 테고. 사실 지구를 살리겠다는 그 말, 잠깐 지나가면서 흘린 말이었다. 김꽃비_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거랑 비슷하다. 어느 부분을 부각해서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리 보인다. 반면 내가 찍은 걸 다른 사람이 편집한 걸 보는 재미도 있다. 과자 봉지에 쓰인 ‘enjoy’라는 단어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내가 찍어놓고도 몰랐다. 나중에 부지영 감독님이 넣어주셨는데 감동이 오더라. 서영주_사소한 것에서 뭔가 끄집어내주셨다. 벌레 기어가는 거 찍어놓고 난 포커스가 나가서 안 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귀신같이 보인다면서 넣으셨다. 김꽃비_부지영 감독님이 편집할 때 내 부분 때문에 가장 고생했다. 편집본이 가장 많이 바뀌었고. 언니들이야 큰 주제가 있으니까. 양은용_부지영 감독님은 항상 나한테 그랬다. 모호한 표정으로. 둘이서 대화하는 건 너무 많으니까 사람들 많은 데서 찍어봐. 그러고서 몇달 뒤에 만나면 이런다. “은용아. 사람이 너무 많으면 재미없어.” 나도 어떤 주제와 컨셉 아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였다고 할 순 없는 것 같다.
-촬영 종료 시점 이후에도 계속 찍어보내서 부지영 감독이 곤란했다고 하던데. =김꽃비_저야 뭐 이미 2테라 가까이 찍어서 보낸 터라. 양은용_난 안 찍었는데. 영주가 열심히 한 거지. 서영주_그거야 감독님이 발동을 걸어놨으니까. 사실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다면, 내 사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이상하지 않잖아. 불편하지도 않고.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고. 그런데 스스로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찍다보니 못 견디겠더라. 그래서 어떻게든 매듭을 져야겠다 싶어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계속 찍은 거다. 근데 아마 감독님은 나중에 촬영한 것 안 보셨을걸.
-촬영 소스를 건네받아서 본인이 직접 편집을 해보고 싶지않나. =김꽃비_안 그래도 외장하드 샀다. 서영주_나도 샀는데. <나 나 나…> 말고 <너 너 너> 어때? 김꽃비_<노 노 노>도 좋고. 양은용_일단 편집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지. 서영주_가끔 이 영화가 외국에선 극영화로 보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처음 상영했을 때 반응이 대체로 ‘소 왓’이었다. 그 뒤로 다듬어지면서 훨씬 더 쫀쫀해졌는데, 극영화라고 하면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다. 연기라고 생각하면, 민낯 볼 때도 덜 오그라들 것 같고.
-기록은 채우는 것이지만 비우는 것이기도 하다. 촬영 전과 비교하면 뭐가 좀 달라졌나. =서영주_앵글 안에 풍경을 담는 과정이 즐거웠다. 내 시선이 잘 느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편집본을 보면서는 그때 당시 고민들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보여서 좋다. 양은용_일단 난 사랑의 아픔에서 벗어났다. 원래 일 때문에 사랑이 뒷전이었다가 영화를 찍을 때는 역전돼서 일보다 중한 게 있었구나 그랬고, 지금은 다시 일로 돌아온 거지.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찍고 싶다. 영주를 찍어볼까. 이번엔 꼭 누드도 넣어야지. 서영주_그러진 말고. 아직 부모님 살아 계시는데. 김꽃비_셀프라는 게 어렵다. 중요한 장면은 놓쳐버리니까. 캐치하려고 하면 그 순간이 사라져버리고.
-세 사람 모두 연출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 마음이 줄었는지 커졌는지 궁금하다. =양은용_영화과에 갔던 것도 연출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번에도 영화를 찍으면서 이전에 써놨던 시나리오 꺼내서 콘티를 그려보기도 했다. 가능한 한 해보고 싶어요, 가 아니라 영화연출은 꼭 할 거다. 몇년 동안 연극연출을 몇편 했는데, 일단 올해 말에는 내가 쓴 희곡으로 연극을 올려보고 싶다. 서영주_배우는 일상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인데, 어찌된 것인지 점점 나를 더 보여주는 영화들에 출연해왔다. 이번 작품을 하고 나니까 극영화 생각이 많이 나더라. 아직 마무리 못한 그림책 작업 마감이 끝나면, 영화든 공연이든 연출 준비를 해볼 참이다.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연애도 해야겠지만. 김꽃비_생활감이라고 해야 하나. 가끔 일상에서 발견하는 느낌들을 메모로 남겨놓는 걸 좋아하는데. 꼭 연출이 아니더라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나. 단편소설이 될 수도 있고. 아님, 노래 가사로도 풀어낼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