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제작편수만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1960년대야말로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60년대 중반에 이미 연간제작편수가 150편을 넘어섰고 해마다 그 기록을 경신하여 1970년에는 무려 231편이 제작되었다고 하니, 안간힘을 써대도 60편 넘기기가 빠듯한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좋았던 옛 시절’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당대의 관객과 함께 울고 웃으며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행복한 작가가 김강윤이다. 그는 평생 98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해 극장에 올렸는데 그중 57편이 60년대의 10년 동안 완성된 것이었으니 한국영화의 황금기가 바로 그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안북도 삼풍에서 태어난 김강윤은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로 진학하지만 3학년 때 학업을 작파하고 영화판으로 뛰어든다. 그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나운규와 더불어 한국영화의 초창기를 개척한 지사감독 윤봉춘의 <승방비곡>. 본래 일제시대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최독견의 장편소설을 1930년 이귀영 감독이 영화화했던 작품인데, 당시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던 윤봉춘이 이번에는 직접 연출을 맡으면서 그 시나리오를 김강윤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듬해인 1959년 김강윤은 일제하의 광주학생운동을 다룬 <이름없는 별들>을 연출함으로써 감독으로도 데뷔한다. 그를 어여삐 여긴 시나리오계의 대선배 최금동이 써준 작품이었다. 작가와 감독으로 데뷔할 때 각각 한국영화사의 두 거목 윤봉춘과 최금동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이후 그는 자작시나리오를 4편 더 연출하지만 연출보다는 시나리오 집필에 더 열정을 쏟아부어 이 짧은 지면으로는 감히 일별하기도 어려운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1960년대는 한국 최초의 메이저영화사라고 할 수 있는 신필림의 시대였다. 김강윤 역시 신필림에서 많은 작품을 썼고 그중 대부분을 신상옥 감독과 함께했다. 당시 일기 시작하던 문예영화붐에 기름을 부은 작품들이 심훈 원작의 <상록수>와 황순원 원작의 <열녀문> 그리고 나도향 원작의 <벙어리 삼룡이> 등이다. 이중 <상록수>는 1978년에도 임권택 감독에 의하여 리메이크되는데 시나리오는 역시 김강윤의 작품을 사용했다. <빨간 마후라>와 <벙어리 삼룡이>가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두었던 1964년은 김강윤과 신상옥 두 사람 모두에게 최고의 해였다. 한국전쟁 당시 공군 전투기조종사들의 사랑과 투쟁을 호방한 스크린에 수놓았던 <빨간 마후라>는 그 주제가 역시 대히트하여 당시 코흘리개 소년이었던 나 역시 멋도 모르고 흥얼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김강윤 초기의 주요 파트너가 신상옥이라면 후기의 파트너는 정진우였다. 6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감각의 청춘멜로영화들을 선보였던 정진우는 한동안 시대극에 몰두하다가 토속적인 자연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대비시키는 일련의 수작들을 내놓았는데 정윤희를 주연으로 내세운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가 이에 해당한다.
1973년에 만들어진 임권택의 <증언>은 영화진흥공사가 설립된 직후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대형 국책영화 제1호로 기록된다. 영화진흥공사는 물론이고 국방부를 비롯한 관련부서가 총동원되다시피해 만들어진 영화이니 그 스케일이 당시로서는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대단하였다. 다큐멘터리 수법을 빌려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을 증언하는 영화인데, 김강윤과 임권택은 역시 전쟁영화인 <아벤고 공수군단>에서 다시 한번 만난다. 김강윤이 고희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해에 개봉되었던 작품이 <증발>이다. 한때 박정희의 심복이었다가 원수지간으로 변해버린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실종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정치스릴러였는데, 왕년의 명콤비였던 신상옥과의 재회작이었으나 불행하게도 흥행에서는 참패를 기록했다. 천하의 인걸도 자기의 시대를 놓치고 나면 그렇게 쓸쓸한 뒷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나보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8년 윤봉춘의 <승방비곡>
61년 신상옥의 <상록수> ⓥ
62년 신상옥의 <열녀문>
63년 신상옥의 <쌀>
64년 신상옥의 <빨간 마후라> ★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이> ⓥ★
65년 이만희의 <흑맥>
유현목의 <순교자>
정진우의 <밀회>
66년 김수용의 <망향>
67년 김강윤의 <역마>
68년 정진우의 <별아 내 가슴에>
69년 정진우의 <청춘>
70년 정진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71년 정진우의 <경복궁의 여인들>
73년 임권택의 <증언>
80년 정진우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81년 정진우의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82년 임권택의 <아벤고 공수군단>
94년 신상옥의 <증발>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