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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감정의 탁월한 시각화 <은교>

정지우 감독은 삼십대 배우에게 일흔살의 시인 역을 맡겨야 했던 것일까. 그 때문에 박해일은 촬영마다 여덟 시간이 넘는 특수분장을 감당했고, 다소 어색한 말투로 노인 흉내를 내야 했으니 말이다. <은교>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이적요는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고, 그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만들어질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시인이다. 한적한 산속, 제자 서지우(김무열)만이 드나드는 이적요의 집에 어느 날 여고생 은교(김고은)가 나타난다. 집안일을 돕게 된 은교가 맑은 웃음소리를 내고, 이적요는 그녀의 젊고 싱그러운 육체에 매료된다. 그리고 그의 감정이 깊어지는 동안, 스승의 재능을 탐내던 제자의 열패감도 소리없이 늘어간다.

영화의 전반부에는 이적요의 시선을 따라 은교의 가느다랗고 하얀 몸을 클로즈업으로 담은 장면이 많다. 신예 김고은의 해사한 얼굴은 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도발적인 은교 역할에 매우 잘 어울린다. 때로 그녀의 존재가 화면에 불러일으키는 생기는, 성적으로 대상화되기 쉬운 역할의 한계마저 가볍게 유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재능은 없고 야심은 많아 불행한 인물, 서지우를 연기한 김무열도 캐릭터가 가진 무디고 거친 감수성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다만 주인공 이적요의 경우, 인물이 경험하는 감정의 파장이 박해일의 연기를 통해 충분히 전달되고는 있지만, 배우의 존재감을 지우고 캐릭터 자체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노인을 연기하고 있는 젊은 배우 박해일, 혹은 삼십대와 칠십대의 외모가 혼재한 이적요를 마주해야 하고, 이 불안정한 공존이 배역의 리얼리티를 일정부분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우 감독은 영화의 원작인 박범신의 소설을 읽으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음에 청춘이 있으나 껍데기가 늙어가는 것” 같다고 느꼈고, 젊은 배우의 노인 분장이 그 관점을 부각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 분장 덕분에, 노인이 소녀를 갈망하는 설정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가능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영화의 전반부, 이적요는 헤나 문신을 그려주는 은교의 무릎을 베고 그녀의 밭은 숨소리와 닿을락말락한 살결을 느끼며 성적 황홀경을 체험하게 된다. 이 환상 속에서 뮤즈가 된 은교와 육체적, 문학적으로 교감하는 이적요는 젊은 박해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우선, 마음만은 청춘인 노년의 욕망을 시각화하는 일례가 될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대상을 복원하는 퇴행적인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은 현실에 대한 씁쓸한 자각으로 끝날 때가 많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은 이적요의 육체는, 결국 쇠잔한 노년이 갖는 퇴행 의지로 느껴져 서글픔을 남긴다. 영화 <은교>는 그저 노인이 소녀를 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순수에 맞닥뜨린 노년이 느끼는 좌절, 더 나아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꾼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삼십대의 배우에게 노인 분장을 시킨 감독의 고집은 의미를 얻는다.

<해피엔드>나 <사랑니> 때도 그랬지만, <은교>에서 정지우 감독은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신체의 작은 움직임들을 카메라가 따르는 동안, 그 순간을 채우는 공기의 밀도가 차분히 화면에 담기는 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눅진하게 쌓아올린 감정의 무게에 비해, 영화의 결말은 다소 설명적이고 감상적으로 느껴진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별은 그냥 별인 것을. 불발된 감정이 남긴 초라한 흔적을 보듬는 위로 역시, 욕망에 찍힌 또 하나의 낙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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